[밀물썰물] 레이더 조사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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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은 미국과 영국 해군 주관 아래 2년마다 열리는 세계 최대 국제 해군 훈련인 림팩 훈련이 있던 해였다. 림팩 훈련의 지휘는 미국 하와이 근처에 있는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가 주로 맡는다. 당시 림팩 훈련에는 일본 해상자위대도 참가했는데 훈련 과정에서 큰일이 터지고 말았다. 미국 해군 항공기가 일본 해상자위대 구축함의 근접 사격을 받고 격추돼 버린 것이다.

당시 미국 해군 A-6E 공격기는 표적지를 예인하던 중이었다. 일본 구축함 유우기리호는 항공기를 표적지로 오인해 사격용 레이더를 조사(겨냥해 비춤)한 뒤 곧바로 근접방어무기(CIWS) 사격을 개시해 A-6E 공격기를 격추시키고 말았다. 이 사고는 일본의 즉각 사과로 미국이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아 조용히 마무리됐으나 전시가 아닌 때에 사격용 레이더 조사가 항공기 격추라는 실제 무력 사용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사고 이후 미국과 일본은 교전 규칙과 항공기 식별 및 사격 통제 절차를 새로 마련하고 레이더 운용 규정까지 뜯어고치는 등 사고 재발 방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2013년엔 동중국해에서 중국 해군 호위함이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 유다치호에 사격용 레이더를 조사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일본 측 주장도 있다. 당시엔 즉각적인 사격이나 격침이 없었지만 일본은 중국 호위함의 행위를 ‘발포 직전 행위’로 규정하고 항의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과 일본도 레이더 조사 논란으로 양국 여론이 들끓었던 적이 있었다. 2018년 12월 동해에서 북한 선박의 구조 신호를 받고 출동한 광개토대왕함에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대잠초계기가 근접 비행을 하던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본 측은 한국 함정으로부터 사격용 레이더 조사를 당했다고 주장했으나 국방부는 일관되게 사격용 레이더 조사는 없었다고 맞섰다. 이후 논란은 묻힌 모양새지만 한동안 양국 사이의 앙금으로 남았다.

지난 6일 중국 랴오닝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J-15 전투기가 오키나와 섬 남동쪽 공해 상공에서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F-15 전투기에 사격용 레이더를 조사했다는 일본 측의 주장으로 레이더 조사를 둘러싼 국제적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다행히 실탄 발사 행위나 충돌은 없었지만 언제라도 국지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는 점이 불안하다. 특히나 바닷길 확보에 혈안이 돼 있는 중국과 바닷길을 막고 선 모양새인 일본은 일촉즉발의 관계라 더욱 그렇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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