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견디는 사진의 힘’ 보여준 강운구 사진전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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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월 9일까지 고은사진미술관
‘우연 또는 필연’ 전시·사진집 발간
31년 전 영구 보존 처리 사진 개봉
“사진 핵심은 기록성·진실성” 강조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경상북도 월성(경주시 월성동) 1973.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경상북도 월성(경주시 월성동) 1973.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지난 10월 23일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 참석한 강운구 사진가. 김은영 기자 key66@ 지난 10월 23일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 참석한 강운구 사진가. 김은영 기자 key66@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사진의 가치와 힘’을 보여주며, 다큐멘터리 사진 미학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지난 9월 11일 개막해 내년 1월 9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우연 또는 필연’이란 제목의 강운구(85) 사진전이다.

고은사진미술관은 사진가 강운구의 초기작이자 첫 개인전인 ‘우연 또는 필연’을 31년 만에 다시금 선보인다. 1990년대 초 인화된 11×14인치 젤라틴 실버 프린트와 20×24인치 크기로 확대된 디지털 프린트 17점 등 130여 점이 소개된다.

실제 촬영한 시기로 치자면 약 50년 정도 된 사진들이다. 그런데 이 사진들이 전혀 지루하거나 낡은 느낌이 들지 않고, 여전히 진지하고 서늘하다는 게 놀랍다. “저도 상당히 긴장했습니다. 영구 처리를 했지만, 곰팡이가 피지나 않았는지 걱정됐으니까요. 그런데 꽤 잘 보존돼 상당히 기뻤습니다. 심지어 ‘어, 나쁘지 않네!’ 싶었습니다.”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내설악) 1973.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내설악) 1973.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작가 자신도 후한 평가를 내렸지만, 그 비결은 무엇일까. “소재 선택을 어떻게 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그는 또 자기 작품을 “원칙주의적이고 정통적인 사진”이라 평가하며, 시간이 지나도 사진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진은 찍을 당시뿐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작품은 시대를 넘어선 ‘시간의 기록’이자 인간과 삶의 흔적을 담은 인류학적 관찰물인 것이다.

이번 전시는 다양한 시리즈를 한데 모은 ‘앤솔로지’(특정 기준에 따라 엄선된 사진 작품을 한데 모아서 보여줌) 형식의 전시로, 대표작인 ‘마을 삼부작’(황골·용대리·수분리)을 포함한다. 이 작품은 1960~70년대 근대화와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것이며, 포토저널리즘과 서정적 리얼리즘의 경계에 선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난 9월 사진전 개관에 맞춰 부산을 찾은 강운구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지난 9월 사진전 개관에 맞춰 부산을 찾은 강운구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전시장은 과거 사진집과는 다르게 구성했다. 노 트리밍(사진을 자르지 않음) 원칙을 고수했고, 21mm 초광각 렌즈 촬영 등 다양한 렌즈를 사용했으며, 렌즈별로 사진 테두리 두께에도 차이가 난다고 부연 설명했다. 특히 네 장짜리 연속 사진으로 동영상 효과를 시도했다. 일상 속 이동(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떠나는) 장면을 영화적 기승전결로 표현한 것도 있다.

전시 제목 ‘우연 또는 필연’은 작가의 사진 철학을 담고 있다. 누구에게나 우연은 찾아오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필연으로 포착된다. “우연이란 것도 필연이다”라는 인식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정직하게 순간을 기록하려는 예술적 신념이다. 전시는 12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각 사진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촬영되었지만, 그 사이의 여백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통해 자유로운 서사를 제시한다.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경상북도 울릉도 1973.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경상북도 울릉도 1973.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작품에는 소, 아이, 농촌 생활,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 같은 일상적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소가 쓰러지는 장면 등은 우연히 찍은 것처럼 보여도, 오랜 관찰과 애정에서 나온 필연적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에서 우연은 노력한 사람에게만 온다”는 말처럼, 그의 대표작 ‘우연 또는 필연’의 철학을 직접 설명했다. 흑백사진의 톤을 ‘B 마이너’(단조)에 비유하며, 어둡지만 따뜻한 정서를 담은 회색의 감정이 자신의 사진 세계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경상남도 김해군 사하 을숙도(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1976.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경상남도 김해군 사하 을숙도(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1976.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또한 사진 속에는 아이를 업은 장면도 자주 보이는데, 이는 의도된 연출이 아니라 일상 속 자연스러운 풍경을 담은 결과라고 전했다. 당시 사진미학보다 문화인류학적 시각으로 인간의 삶을 탐구했던 작가의 시선이 반영돼 있으며, 인간관계와 시대상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디지털과 저작권 변화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2000년대 초 한 기업 광고에 자신의 사진이 무단 변조된 사건을 회상했다. 그는 이를 “단순 도용이 아니라 디지털 조작의 심각한 사례”라며 문제를 제기했고, 사과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도록 해 해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그리고 AI 시대로의 윤리 문제를 경고했다. 그러면서 “AI가 만든 이미지는 출처를 알 수 없고, 사진의 진정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도 사진의 본질은 기록성이며, 기술만 좋아지고 사람의 감각은 퇴화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새재) 1970.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강운구 사진가 대표작 중 하나인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새재) 1970. ⓒ강운구,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사진가는 걸어야 합니다. 걸으면 사진이 옵니다”라는 말로 사진이란 현장성을 가진 예술이며, 움직이고 부딪혀야 좋은 사진을 만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돈이나 명예보다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강운구의 사진은 시간의 예술이며, “사진은 사라지는 것을 남김으로써 시간을 증명한다”고 정리했다. 기술이 발전해도 결국 중요한 건 카메라 뒤의 사람, 사진가의 시선과 철학임을 상기시켰다.

강운구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강운구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한편 강운구는 평생 ‘정직한 기록의 사진’을 신념으로 삼아 왔다. 그는 “쌀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는 밥인 것처럼, 사진의 본질은 기록”이라 말하며, 기술이 변해도 기록성과 진실함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른바 ‘밥 사진론’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를 넘어선 태도를 보여준다. 최근에는 디지털 도구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며, 과거 사진집의 톤을 라이트룸(디지털 사진 관리와 보정 전문 소프트웨어)으로 재조정하는 등 전통과 현대를 잇는 사진가의 태도를 실천하고 있다.

지난 9월 사진전 개관에 맞춰 부산을 찾은 강운구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지난 9월 사진전 개관에 맞춰 부산을 찾은 강운구 사진가. 고은사진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에 맞춰 31년 만에 새롭게 디자인된 동명의 사진집 <우연 또는 필연>도 출간됐다. 초판(조세희)과 달리 서문을 직접(강운구) 썼다. 국내 1세대 북디자이너 정병규가 디자인 디렉션을 맡았으며, 미술관 홈페이지와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또한 미술관 로비에서는 강운구의 주요 사진집과 도서를 열람할 수 있어, 그의 반세기에 걸친, 정직하고 꾸준한 사진 세계를 한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10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쉼). 무료 관람. 문의 051-746-0055.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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