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노벨상 강국 미국의 치트키 '이방인'
김백상 지역미래팀장
역대 노벨상 개인수상 40% 미국
이주민 유입이 곳곳에 활력 넣어
싱가포르도 개방성 내세워 성공
일본은 외국인 배척해 허송세월
연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 중에 노벨상 소식이 있다. 수상자 발표가 들리면, 겨울이 시작될 즈음이다. 노벨상 수상식이 열리고 수상 소감이 들리면, 이제 정말 한 해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다. 2025년 시상식은 오는 10일에 열린다.
올해도 분야별로 총 14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는데, 역시 미국이 4명으로 가장 많았다. 거의 매년 미국이 일등이었다. 지금까지 노벨상의 개인 수상자는 990명으로, 이 중 424명이 미국인이다. 이중 국적 등의 기준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여하튼 노벨상의 40% 이상은 미국이 챙겨갔다.
미국이 노벨상 강국이 된 이유로 우수한 교육과 세계적인 연구소, 막대한 과학 투자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미국만의 ‘치트키’가 있는데, 바로 이민자이다. 미국정책재단(NFAP) 등의 자료를 보면 미국인 노벨상 수상자의 31~35%가 이민자였다. 이민자 가정의 2세들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2016년엔 6명의 미국인 수상자 전원이 이민자이기도 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엔리코 페르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를 피해 유럽의 과학자들이 대거 대서양을 넘었다. 그 덕에 미국은 핵폭탄도 만들었고, 확실한 패권 국가로 성장했다. 과학 분야만 아니라 경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민자 유입은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장 세르게이 브린(구글 공동창업자)은 러시아, 일론 머스크(테슬라 CEO)는 남아공, 젠슨 황(엔비디아 창업자)은 대만, 사티아 나델라(MS CEO)는 인도 출신의 이민자이다.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이민자가 미국의 성장 시기 부족한 노동력을 메워줬다.
만일 과거의 미국이 유럽의 도망자들을 거부했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적대시해 국경을 막았다면, 지금의 미국은 많이 초라해졌을 것이다. 그랬던 미국이 지난 9월 조지아주에서 LG에너지솔루션 직원들을 구금하고 내쫓았다. 트럼프의 미국은 예전의 미국이 아니라는 느낌이다.
아시아에도 개방을 통해 극적으로 성장한 나라가 있다. 1965년 떠밀리듯 말레이시아에서 분리 독립한 싱가포르는 중국계, 인도계, 말레이계 사람들이 섞여 있었고 종교도 제각각이었다. 갈등의 씨앗이 될 법했던 다양성을 싱가포르는 인종·종교를 서로 인정하는 문화로 승화시켰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에 더해 영주권을 적극적으로 개방하며 노동력과 인재를 모았다. 싱가포르의 틀을 세운 리콴유 초대 총리는 “다양한 민족이 갈등 없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강한 의지와 일관된 정책의 결과다”며 다민족 개방적 사회를 이룬 것을 싱가포르 성공 이유로 꼽았다.
일본은 정반대의 사례다. 미국 경제를 위협하던 일본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침체가 시작됐다. 잃어버린 10년이 거의 잃어버린 30년이 된 느낌이다. 특히 ‘노동력 공급 부족’이 구조적인 요인으로 지목된다. 고령화, 저출산으로 일할 사람이 없으니 경제가 활력을 잃는 건 당연했다.
폐쇄적 이민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일본은 문화적 동질성을 추구하다 보니, 이민과 외국인 노동자의 취업에 배타적이었다. 2010년 이후로는 정책 변화를 시도해 외국인 노동자가 몇 배가 늘어, 전체의 3%를 넘겼다. 그래도 OECD 중 여전히 최하위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2024년 기준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이주민을 포함해 약 265만 명이라고 한다. 전체 인구의 5% 정도다. 이미 국내 조선업이나 중공업, 건설현장 등은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돌아가기 어렵다. 외국인 유학생, 이민자들도 국내 경제 활동에서 일정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OECD 웬만한 나라들은 체류 외국인 비중이 10%를 넘고 20~30%인 곳도 있다. 그만큼 앞으로도 더 많은 이방인이 우리를 찾아와 이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올해 〈부산일보〉에 실린 ‘내겐 여전히 낯선 부산’이라는 기획 기사는, 이 도시가 글로벌허브를 지향하지만 외국인과 이민자들에게 만만치 않은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더 많은 외국인 이웃이 생길 것이라면, 기사의 지적대로 이들과 잘 융합하는 것도 고령화 시대를 극복하는 방법일 것이다.
사실 외모와 살아온 배경이 이웃의 조건은 아니다. 한국인 얼굴에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한국에서 큰돈을 벌지만, 정작 뉴욕증시에 상장된 미국 플랫폼 기업을 운영하며 개인정보 유출 파문을 일으킨 이도 있다. 반면 생김새는 달라도 지역 사회에서 함께하고 있는 가까운 이주민도 있다. 누가 우리의 진짜 이웃이겠는가.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