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디지털자산, 제도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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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홍열 비댁스 대표·변호사

상속 같은 전통적 자산관리서도 다뤄져
공인된 평가 기준 모호 등 여전히 문제
기업 ‘재무 전략’으로 부상, 경쟁 요소 돼

국내 금융 경쟁력 끌어올릴 핵심 축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 꼭 필요
내년, 변화를 현실로 만들 전환점 되길

최근 지인을 통해 흥미로우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사례를 하나 접했다. 일찍부터 디지털자산에 투자해 온 자산가였는데, 가업 승계와 자산 이전을 준비하던 중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포트폴리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디지털자산을 어떻게 평가하고 처분할지, 또 어떤 방식으로 이전할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상속세 부담은 물론 제도적 불확실성이라는 장벽을 마주한 것이다. 단순히 세금 문제가 아니었다. 법적으로 공인된 평가 기준이 모호하고, 안전하게 자산을 이전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승계 프로세스가 부재하다 보니, 자산이 있어도 이를 합법적이고 투명하게 물려주는 과정 자체가 골칫덩어리였다는 후문이다.

이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디지털자산은 더 이상 일부의 ‘투기적 부수 자산’이 아니라는 점이다. 상속·증여·가업 승계와 같은 전통적인 자산관리 영역에서도 기존 금융자산과 동일한 수준의 법적·제도적 보호와 명확한 기준이 절실해졌다. 디지털자산을 제도권 금융 체계 안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요구는 이제 개인의 영역을 넘어 기업과 금융기관 모두에게 선명한 과제가 되었다.

올해 디지털자산 시장은 큰 기대 속에 출발했으나, 실제 속도는 더뎠다. 발행·유통 기준, 디지털자산 현물 ETF, 내부통제, 그리고 스테이블코인 규제 등 후속 입법은 여러 이유로 지연되었다. 금융당국의 신중한 접근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법과 규제의 정합성이 미비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투자를 머뭇거릴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글로벌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그러나 잠시 주춤한다고 해서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글로벌 시장의 문법은 이미 바뀌었다. 미국은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을 통해 기관 자금의 진입을 일상화했고, 유럽은 MiCA(미카) 시행으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일본과 싱가포르 역시 기업 회계와 결제 시장에서 디지털자산을 새로운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변화는 디지털자산이 기업의 재무 전략으로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디지털 자산 재무 전략(Digital Asset Treasury)의 부상이다. 이는 기업이 잉여 현금을 단순히 은행 예금이나 채권에만 묶어두지 않고, 비트코인이나 스테이블코인 등 디지털자산 형태로 보유하며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국경 없는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기업에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으로 다가오고 있다. 기존 금융망이 멈추는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통해 자금을 즉시 이전할 수 있으며, 복잡한 중개 은행 절차를 생략함으로써 환전·송금 수수료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와 마이크로스트레티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일찍부터 디지털자산 전략을 채택한 이유도, 디지털자산이 제공하는 ‘24시간 유동성’과 ‘운영 효율성’이 이제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기업의 글로벌 비즈니스 과정에서 환 헤지, 해외 결제 간소화, 공급망 정산 자동화 등 실질적인 수요는 이미 차고 넘친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한국의 실물 경제와 블록체인 기반의 글로벌 금융망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변화가 현실화되기 위한 선결 과제는 ‘안전한 보관(Custody)’이다. 기업이 안심하고 자산을 맡길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수탁 인프라 없이는 디지털 자산 재무 전략도, ETF(상장지수펀드)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은행 수준의 보안과 내부통제 시스템을 갖춘 커스터디 인프라가 제도권 금융 진입의 장벽을 낮추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상속·증여, 회계, 수탁, 스테이블코인 규율 등은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제도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치러야 할 기회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다. 다행인 점은 당국과 국회 모두 손을 놓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국제 기준과의 정합성을 맞추기 위한 숨 고르기였다면, 다가올 2026년은 한국 디지털자산 시장이 ‘기초 공사’를 끝내고 제도권 금융의 본류로 진입하는 원년이 되어야 한다.

디지털자산 현물 ETF, 기업용 재무 전략,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한국 금융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핵심 축이다. 디지털자산은 이미 우리 삶과 기업 활동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혁신적인 기술보다 신뢰할 수 있는 제도다. 다가올 시간이 그 변화를 현실로 만드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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