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잔재인데 새 단장? 사천 반민족행위자 기념비 이전 ‘논란’
반민족행위자 저수지 준공 기념
양지바른 곳 옮기고 반석 깔아
농어촌공사 뒤늦게 인지…대책 고민
사천시 두량저수지에 있는 반민족행위자 비석 ‘남주제 준공기념비’. 대나무숲에 있던 것(좌)을 양지바른 곳(우)으로 옮기고 반석까지 깔았다. 강호광 씨 제공
경남 사천시 한 저수지에 방치돼 있던 반민족행위자 비석을 음지에서 양지바른 곳으로 옮기며 정비까지 마친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논란이다. 한국농어촌공사에서 저수지 공사를 하다 벌인 일인데, 공사 측은 비석 내용이 뭔지도 몰랐단 입장이다.
23일 한국농어촌공사 사천지사에 따르면 지난 2020년부터 최근까지 사천 두량저수지 개·보수 공사가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저수지 가장자리에 있던 대나무숲을 정비했고 숲 안에 방치돼 있던 비석이 발견돼 50m 밖 양지바른 곳으로 이전했다. 이 과정에서 비석 아래 반석까지 새로 까는 등 유적에 버금가는 대우가 이뤄졌다.
문제는 이 비석의 정체다. 이 비석의 이름은 ‘남주제 준공기념비’로, 일제강점기 사천 지역의 대지주이자 반민족행위자로 활동했던 남주 최연국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강호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최연국은 경남 지역의 대표적인 반민족행위자다. 그런 사람의 비석을 사람 통행이 많은 곳에 반석까지 설치해서 옮긴 건 이해하기 힘들다”며 “어떤 비석인지 안내판도 없다”고 지적했다.
경남 사천 지역에서 활동한 반민족행위자 최연국(우) 모습. 조선 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11년간 지냈다. 강호광 씨 제공
최연국은 1886년 2월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사천공항 일대가 그의 땅이었을 것이란 추정이 나올 만큼 지역 대지주이자 자본가로 알려졌다. 1912년 경남은행 설립 당시 대주주로 참여했으며 조선총독부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평의원과 사천금융조합 조합장직에도 올랐던 인물이다. 당시 일제와 가깝지 않았다면 맡지 못했을 직책이었다. 그즈음 다이쇼 천황 직위 기념 대례기념장까지 받았다.
최연국의 친일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경남도 도평의회원, 임자신탁 주식회사 사장, 사천군번영회 회장 등을 차례로 맡으며 영향력을 키웠고 1933년에는 조선 총독의 자문 기구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불과 60명 안팎만 임명되는 인원에 포함된 것으로 최연국은 11년간 이 요직을 지낸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꾸준히 일제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한 그는 일본식 이름인 ‘아사히 쇼’로 활동하며 일제의 창씨개명에도 앞장섰다. 일제가 1940년 2월 창씨개명에 나서자 한 달 뒤인 3월 자신과 아들 3형제의 창씨개명 사실을 신문을 통해 홍보했다. 또한 이듬해 조선인 최초로 일본 교토 헤이안 신궁에서 딸의 혼례를 치르기도 했다. 이밖에 전쟁 협력을 위한 전시 최대 친일 민간단체 ‘조선 임진 보국단’이 조직될 때 경남도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국민총력 사천군연맹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대 역할을 한 셈이다.
최연국은 해방 후 1949년 7월 반민특위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6·25 전쟁 등으로 인해 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1951년 2월 26일 사망했다. 이후 정부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최연국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했다.
사천에 있는 두량저수지는 최연국이 벌인 대표적인 지역 사업이다. 두량저수지는 1932년 사천수리조합에서 조성했는데 당시 조합장이 최연국이었다. 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농민과 조합원들의 돈과 노동력으로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늘어난 쌀은 일제의 곳간에 가득 쌓였다. 수리조합 자체가 일제 수탈 기구의 중요한 축이었던 셈이다.
조성 당시 두량저수지는 최연국의 호를 그대로 붙여 ‘남주제’라 불렸으며, 공적을 기린다며 기념비까지 세웠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는데 주변에 대나무숲까지 형성되면서 비석의 연원과 내용이 완전히 잊혔다.
이번에 정비 사업을 진행한 한국농어촌공사 역시 비석의 내용을 알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주민들에게 물어봤지만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웠고 비석을 없애지 말고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 양지바른 곳으로 이전했다는 해명했다. 뒤늦게 비석의 정체를 알게 돼 내부 논의를 거쳐 대응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설명한다.
한국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오랫동안 근무한 직원들도 전혀 몰랐다. 비석을 옮긴 이후 인지하게 됐는데 어떻게 할지는 전문가 의견도 좀 들어보고 내부 논의도 거쳐봐야 할 것 같다. 비석을 없애기보다 안내판을 설치하는 방안 등을 신중히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김현우 기자 khw82@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