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재미있어졌다…동삼동 주공2단지 이야기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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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한 복지관에서 일하는 분으로부터 최근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우리 동네 아파트에서는 주민끼리 양봉을 하고, 스마트팜에서 채소도 길러 먹는다’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주민들의 자서전을 발간했고, 주민들이 출연하고 감독한 영화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는 소식도 들어있었다. 가끔 아파트에 뱀이 나와 동네 뉴스가 되기도 하고…. 그 과정을 청년 예술가들이 오랜 시간 기록한 전시회를 열고 있으니, 꼭 방문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부산에 이런 아파트가 있었나? 요즘 보기 힘든 소식을 가득 담은, 문제의 그 아파트를 찾아가 봤다.


동삼동 주공 2단지는 상리마을로 불리고 있다. 동삼동 주공 2단지는 상리마을로 불리고 있다.

지난 14일 부산 영도구 동삼동 주공 2단지에 있는 상리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했다. 상리, 중리, 하리 등 영도 동쪽 해안에 위치한 세 개의 마을이 지금의 동삼동(東三洞)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라진 ‘상리’는 복지관 이름과 주공 2단지를 부르는 ‘상리마을’이란 애칭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곳 복지관과 빈집 한 곳을 빌려 열린 전시 ‘단지, 감각한 기록展’은 공교롭게도 이날이 마지막 날이었다. 복지관에 들어서자, 주민들이 자기 집의 풍경을 직접 그린 전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제목: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집. 방 두 개가 고작인 13평 아파트. 조그마한 방에서 난 그림책 작가도 되고, 화가도 되고, 시 낭송가도 되며, 우쿨렐레·오카리나 연주가도 된다. 책도 읽고, 시도 쓰고, 연극 대본을 외우기도 한다. 조그마한 베란다는 나의 아틀리에. 나는 매일 기적을 본다. 10XX호 오정희 씨가 그린 멋진 그림과 글솜씨에 놀라고 말았다.


오정희 씨가 자신의 집을 그린 작품. 오정희 씨가 자신의 집을 그린 작품.

다음 작품의 제목은 ‘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우리 집이란, 내 생활의 보금자리로 내 마음에 제일 좋은 곳이라 적어 봅니다. 베란다가 예쁘고 바깥의 바다와 배들이 너무 좋아요. 나는 아무리 크고 좋은 집을 준다 해도 우리 집과는 바꾸지 않을 겁니다. 13XX호 김춘자 씨의 작품에는 우리 집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쳤다. 문득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가 생각났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또 ‘우리 집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라고 쓴 어떤 주민의 표현은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각자가 우리 집 내부를 그린 작품이 모두 50점 가까이 됐다. 아파트 생활이란 우리 집만 알지, 옆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르기 마련이다. 12~13평 비슷한 구조와 평수의 ‘동삼 주공’을 그린 그림을 모아 놓으니 개성 있는 살림살이가 너무 재미있게 느껴졌다. 주민 한 분은 “30년을 여기에 살았어도 남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오늘 50집을 집들이한 것 같다”라고 말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샀다. 아파트의 익명성이 때론 편하지만, 옆에 누가 사는지 항상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이 모여 양봉사업을 하고 있다. 주민들이 모여 양봉사업을 하고 있다.

복지관 내 상리카페에서는 주민 두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분이 동삼 주공의 동네 스타로 짐작되는 김양자 씨다. 김 씨는 올해 자서전 쓰기에도 참여했고, 주민들이 만든 영화에도 출연해 작가 겸 영화배우가 되었다. 지난 2월에 출간된 <인생사 돌아보기>에는 김 씨가 쓴 ‘나는 스칼렛 오하라였다’를 포함해 주민 7명의 자서전이 수록됐다. 김 씨 편을 짧게 소개한다.

‘혼자 아들 둘을 키우고 살면서 서러운 일이 많았다. 대학교 앞 하숙부터 시작해서 식당과 피부관리실 운영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힘들게 일해 두 아들 장가보내고 나니 방 하나 얻을 돈도 없었다. 새 두 마리를 열심히 키웠더니 어느새 짝을 찾아 엄마 혼자 두고 멀리 날아가 버린 셈이었다. 그때 영도에서 영구임대아파트 모집을 해서 입주하게 됐다. 지금은 88-1 버스가 다니지만, 예전에는 차도 다니지 않아 오르막길을 힘들게 올라야 했다.


주민들이 스마트팜에서 채소를 수확하고 있다. 주민들이 스마트팜에서 채소를 수확하고 있다.

나는 힘든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 늘 책을 읽었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은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를 거야”라며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여기에 온 지도 30년이 넘었다. 내 공간이 있어 너무 좋다. 해가 지고 창문가에 서면 바다가 가까워서 마치 내가 물 위에 떠가는 느낌이다. 나는 소설 속 대저택 못지않은 나만의 공간에서 나를 위로하는 책을 든다.’

영도의 스칼렛 오하라 김 씨는 영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아들이 의사인데 너는 왜 극빈자들이 사는 아파트에 사느냐고 묻던 친구들도 우리 집에 와 창문에서 보면 정말 외국에 온 느낌이 든다고 감탄한다”라고 말했다. 또 “여기 사는 할머니들한테 다른 데로 가겠느냐고 물으면 한 사람도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안 갈 거다”라고 덧붙였다.


주민들이 모여 마을 기록화 작업을 하고 있다. 주민들이 모여 마을 기록화 작업을 하고 있다.

동삼 주공 2단지는 1995년에 준공되어 30년이 지난 낡은 아파트다. 2단지 1968세대 가운데 수급세대(기초생활수급자)가 1236세대, 수급 세대 외 지원 세대(차상위계층·긴급지원 대상) 365세대, 일반 세대 367세대로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많이 산다. 지난해 복지관 측이 이 아파트에서 고독사 시신을 3건이나 발견했다. 영구임대아파트는 말할 것도 없고, 공공임대아파트를 향한 사회적 차별의 시선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영구 임대에 사는 분들은 빨리 돈 벌어서 나가고 싶어 할 것이라는 짐작과 달랐다. 지난 2023년에 고신대 사회복지학과에서 423명을 대상으로 주민 욕구 조사를 한 결과 주민 만족도가 3.5 이상으로 높게 나타났다. 영구 임대를 바라보는 외부 시선과 주민들의 생각은 괴리가 너무 컸다.

또 한 분의 주민은 상리 마을 영화 ‘그 많던 꿀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에 출연한 김상호 씨였다. 김 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 5명과 어린이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 BIFF에서 상영되어 호평받았다. 또한 일본에서 열리는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이다.


마을 영화 ‘그 많던 꿀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를 찍고 있다. 마을 영화 ‘그 많던 꿀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를 찍고 있다.

김 씨는 영화에서 오랫동안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오는 역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 씨는 실제로 오랜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고 금주한 지 8년이 넘었다. 자기 집에서 중독자를 치유하는 모임을 열고, 오갈 데 없는 중독자들을 집에서 보살피기도 했다. 김 씨는 이날 “과거의 나는 교만했다. 영화 촬영 때 감독님이 크게 웃으라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 지금도 웃는 연습을 하고 있다”라고 말해 감동을 줬다.

이번에는 올해 내내 동삼 주공에서 살다시피 하며 작업한 작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먼저 상리마을을 사진으로 기록한 청년 작가 조건 씨다. 조 작가는 “영구 임대라는 선입견을 품고 와보니 노인 계층이 많을 따름이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았다. 좀 더 밝고 따뜻하게 찍어보자는 생각으로 색감이 최대한 화사하게 나오도록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복지코디네이터가 개별 가구를 방문하고 있다. 복지코디네이터가 개별 가구를 방문하고 있다.

이재웅 작가는 청년 작가들의 멘토 역할을 하며 ‘다큐 상리’를 만들었다. 이 작가는 “돌아다니다 보니까 여기가 참 매력적인 곳이더라. 주민들과 친해질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문화 복지’를 통해서 주민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라고 말했다.

청년 작가 박세진 씨는 주민을 인터뷰한 뒤 동삼 주공을 배경으로 일러스트 엽서 작업을 했다. 박 작가는 “육지 사람은 영도에 대한 편견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영도에 살고 있지만 상리마을에 대해 못 사는 동네, 위험한 동네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됐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편견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청년 작가들이 처음에 작업을 위해 돌아다니자, 동네 주민들이 자꾸 “뭐 하는 사람이냐? 어디서 나왔냐?”라고 물어봤단다. 그동안 동삼 주공에서는 젊은이들을 만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양자 씨는 “젊은 사람이 드문 동네에 청년이 지나가면 보기가 참 좋다. 씩씩하다. 나라의 보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주민, 참여 작가, 일본 '아시아 커먼즈' 일행이 자리를 함께 했다. 주민, 참여 작가, 일본 '아시아 커먼즈' 일행이 자리를 함께 했다.

영화 ‘그 많던 꿀벌…’은 오래된 임대 아파트에서 양봉하는 주민들이 주인공이다. 영화는 어느 날 꿀벌들이 사라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민하던 주민들은 꿀벌이 다시 돌아오도록 꽃을 심는다. 꽃이 피면 환경도 좋아지고, 언젠가 벌이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편견이 특정 집단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낳고, 상호 존중 대신 적대감을 키워 편을 나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만의 고립된 집에서 나와, 옆을 돌아보는 시간이 아닐까.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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