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또 다른 성장의 시대를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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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공모 칼럼니스트

‘학습된 무기력함’이라는 단어가 있다. 반복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부정적 상황에 노출되어, 자기 행동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서 무기력해지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다. 이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건 노동시장 속 청년들의 상황을 담은 한 기사에서였다. 대한민국의 성장 속도는 더뎌진 지 오래고, 기회는 희미해졌다. 자연스럽게 청년층에 대한 타격이 상당하다. 비관이라기보다 냉정한 현실 감각이다. 2025년 청년층의 체감실업률은 16.4%로 전년보다 높아졌고, 주요 기업 중 절반 이상이 하반기 신규 채용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해당 기사는 청년들이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부분을 ‘학습된 무기력함’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변을 둘러보면 청년들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퇴근 후 영어를 배우고, 독서 모임에 나가고,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 이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회사 일만으로도 버거운 하루를 보내면서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부업과 창업을 병행하는 이들도 있다. 2023년도 잡코리아 조사 결과, 설문에 응답한 MZ세대 직장인 중 66.5%가 ‘공부하거나 자기 계발 하는 것이 있다’고 응답했다. 청년들은 스스로 ‘성장 중독’이라 자조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왜 우리는 끝없이 노력하고 성장하려는 걸까?

청년, 심각한 실업 현실 냉정하게 인식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믿음 흔들려

직장·연봉·자산보다 '의미의 성장' 중시

저성장 시대 일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문제의식·가치 공유 통해 공동체 형성

각자의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삶' 시도

돌아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까지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현실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노력의 결과가 공정하게 보상받지 않는다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수저·은수저·흙수저로 출발선이 나뉘고, 주거 환경과 자가용 브랜드로 신분이 구분되는 사회를 통과했다. 노력만으로는 더 나은 환경에 다다르기 어렵다는 사실이 상식이 됐다.

그래서 이제 청년들이 추구하는 ‘성장’의 방식은 과거와 다르다. 과거의 성장 서사가 직장, 연봉, 자산처럼 수치로 측정되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세대는 ‘의미의 성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하는 일의 방향’과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도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0대가 직업을 선택할 때 ‘자아실현’을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경제 저성장 시대에 직업을 생존 수단으로만 여기기보다 자아실현의 일부로 인식하는 응답자 비율이 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일’을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연구원의 ‘서울시 청년의 사이드 프로젝트 활동과 노동에 대한 가치관 고찰’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포착된다. 사회적 성공이나 안정된 직장보다 자신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일과 삶을 설계하려는 청년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가 정해둔 기준보다 스스로 정한 가치에 따라 움직이며, 그 과정 자체를 성장으로 여긴다.

이러한 변화는 일의 영역을 넘어 문화와 소비, 삶의 방식으로까지 확장된다. Z세대의 67%는 ‘조금 비싸더라도 ESG를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겠다’고 답했다. 사회적 책임, 환경 보호, 인권 감수성이 새로운 경쟁력의 기준이 된 시대다. 의미를 중심으로 한 성장의 흐름은 개인의 자기 계발에서 멈추지 않는다. 같은 문제의식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로컬 프로젝트나 소셜벤처의 형태로 도전하기도 한다.

도시에 밀집해 있던 청년들이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탄생한 ‘괜찮아마을’은 7년 만에 전국 51곳으로 확산해 이제는 1만 680여 명이 각자만의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전남, 충청, 경북 등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살아가려는 청년층의 다양한 시도 중 하나이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많은 청년이 각자의 상황 속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며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도 스스로의 의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노력이 평가 절하되기 쉬운 사회 속 청년들의 노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장의 시대를 지나, 지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첫 세대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성공이나 혁신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영역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실험은 사회의 결을 바꾸고 있다. 비록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저성장의 시대에 걸맞게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법이다. 우리 청년들은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또 다른 의미로 ‘성장의 시대’를 지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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