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몰래 AI 쓰는 당신과 ‘사짜 직업’의 미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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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IT 업계 등 자동화로 대량 해고 공포
직장인 36% ‘비밀 경쟁력’으로 AI 활용
고소득 전문직 위험 연구 결과 잇따라
부모 세대, 자녀 전공 선택 전전긍긍
노동 대체 대신 생산성 향상 효과 주목
AI 활용력이 경쟁력되는 시대 대비를

<바둑이 두 배로 강해지는 책>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바둑 기사 조치훈이 1985년 출간한 필살기 모음집이다. ‘두 점 머리는 두드려라’ 등의 바둑 격언을 소개한 뒤 그에 따른 행마 전략을 알려주는 식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책 제목의 이유가 흥미롭다. 바둑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몰래 실력을 배가시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바둑은 맞수가 있고, 자존심이 걸린 경우가 많아 갑자기 일취월장해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은 심리를 간파한 제목이었다.

인공지능(AI) 자동화 도구 사용에서도 남몰래 성과를 내고 싶은 직장인들의 속내가 투영된다. 한국의 챗GPT 유료 구독자가 미국에 이어 전 세계 2위일 만큼 AI는 일상이 됐다. 그런데 직장 내 상급자나 동료 사이에 AI 활용 여부를 안 밝히는 문화는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직장 내 뚜렷한 원칙이 없는 경우가 많고, 굳이 드러내지 않으려는 정서가 겹친 결과다. 최근 미국 직장인 대상 설문 조사에서는 응답자 3분의 1이 AI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인들이 업무에서 남몰래 AI를 사용하는 경향을 AI로 그린 이미지. 직장인들이 업무에서 남몰래 AI를 사용하는 경향을 AI로 그린 이미지.

■ 美 직장인 36% “AI는 비밀 경쟁력”

미국 포춘지는 최근 직장인들이 업무에 AI를 활용하면서도 숨기는 이유가 ‘비밀 경쟁력(Secret Advantage)’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업무 자동화 IT 회사인 이반티(Ivanti)의 조사를 인용한 이 보도에 따르면 AI 활용을 감추는 가장 큰 이유는 남몰래 동료보다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36%)였다. AI 의존도가 드러나면 실직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숨긴다(30%)는 응답에서는 일터를 휩쓸고 있는 AI 공포마저 읽힌다. 미국 글로벌 IT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하던 작업에 AI가 투입되면서 대규모 해고가 발생하는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의 일자리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사정 탓이다.

산업 현장만큼 교육계도 혼란스럽다. 어떤 대학은 과제 제출에 생성형 AI 사용을 막지만, 다른 곳은 권장한다. 고교 교사는 생기부 작성 때 챗GPT나 구글 제미나이를 활용하지만 이를 교장, 교감에 노출하기를 꺼린다. 학생들은 쉬쉬하며 AI를 활용해 과제를 작성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속이 탄다. 디지털 네이티브도 모자라 AI 네이티브 세상에 살아갈 자녀의 진로가 고민이다. 많은 연구에서 의사, 변호사, 판사 등 소위 ‘사짜 직업’이 AI에 가장 노출되어 있다는 결과가 속속 나왔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 스틸 컷.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 스틸 컷.

■ AI 시대, 아이들은 무엇을 배워야 하나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로봇으로 자동화된 공장에서 쫓겨난 한 가장의 직장 복귀 사투를 그린다. 기계화·자동화 시대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 블랙 코미디다. 영국 BBC가 ‘암울하면서도 웃긴 코미디’라고 논평한 이유다. 다만, 그저 픽션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일이라 웃기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다.

‘어쩔수가없다’는 산업용 로봇이나 소프트웨어가 일터를 장악해 파생된 부작용을 다루는데, AI는 훨씬 더 거대한 쓰나미를 몰고 올 예정이다. 기계는 비반복적 육체적 역량을 대체할 뿐이지만 AI는 분석 업무의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했다. AI는 그 이름 그대로 ‘지능’을 모방하는 데 뛰어나다. 기존에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던 영역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건 당연지사다. 그래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자라나는 후세대는 앞으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하나? 기술에 대한 수용도가 높고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한국 사회는 새로운 기술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더 크게 느껴진다.


AI 노출 지수가 높을 수록 AI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이다. AI 노출 지수가 높을 수록 AI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이다.

■ 고소득 전문직이 AI 희생양?

새로운 기술의 도입은 항상 특정 직업군의 흥망으로 귀결된다. 산업용 로봇이나 소프트웨어 자동화가 저숙련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이 대표적 사례다. AI 시대에 어떤 직업군이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될까. 초기 연구에선 AI에 많이 노출된 직업일수록 위험하다고 봤다. ‘AI 노출 지수’(AI Occupational Exposure, AIOE)’는 대체 가능성을 수치화한 것이다. 공학기술자, 의사, 데이터 분석가 등 대용량 데이터를 활용하거나 정형화된 판단이 필요한 직업군에서 노출도가 높고, 대면 응대, 상담이 주된 일은 낮다. <위 표 참조>

2023년 11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AI와 노동시장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AI 노출 지수가 가장 낮은 직업은 점성술사였다. 표준 직업 분류 체계에서 무속인, 관상가 등을 아우르는 이 직업의 핵심은 대인 관계 형성과 감정 노동이다. 같은 이유로 성직자도 대체 가능성이 낮다. 기자직과 교수직은 ‘예상보다 낮아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인간적 상호작용과 창의적 사고를 AI가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으로 풀이됐다.

이 조사에 따르면 의사, 회계사, 변호사 등 고소득 종사자들의 미래가 암울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전문직 업무 프로세스에는 데이터로 처리될 수 있는 부분과 정형화될 수 없는 업무가 혼재되어 있는데, 이를 뭉뚱그려 자동화시킨다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일 수 있다. 자격, 면허와 관련된 법적 규제, 사회적 윤리 규범과도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그리하여 AI 노출 지수를 보완해서 AI 시대 직업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AI가 전담할 수 없는 정도를 지표로 만든 보완 지수를 내놨다. 책임감, 중대성 등에서 불가피하게 사람이 수행해야 할 역할 비중을 노출 지수와 상계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노출 지수가 높아도 보완 지수가 함께 높으면, 대체 가능성은 그만큼 낮게 평가되는 식이다.

올 2월 한국은행의 ‘AI와 한국경제’ 보고서에서 보완 지수를 적용해 재차 분석한 결과는 앞선 분석과 일부 달랐다. 노출도와 보완도가 모두 높은 직업이 AI 도입을 통해 생산성 향상과 임금 상승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온 것이다. 의사, 한의사, 기업 대표 및 기업 고위 임원, 금융 전문가, 대학 교수, 고객 서비스 관리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 노출도가 낮았던 건설·운송·전기·배관·경찰·소방·교정·선박 등은 보정해도 여전히 노출도가 낮아 대체하기 어려운 직업군으로 꼽혔다.


■ 중요한 건 AI 활용 경쟁력

자동화로 인한 노동 대체 효과뿐만 아니라 ‘증강(Augmentation)’ 가능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역량을 강화하고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가능성을 잣대로 AI의 파급력을 분석하자는 접근법이다. 이 개념은 국제노동기구(ILO)가 노출 지수를 보완하기 위해 개발한 것인데 생산성 향상 측면을 살펴보는 데 용이하다.

ILO 방식은 ‘직업은 여러 직무로 구성된다’고 전제한다. 각 직무의 노출 지수를 평균을 내어 표준편차를 비교 분석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간 <진격하는 AI와 흔들리는 노동자>에서는 변호사의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판례 검색과 문서 작성 업무는 자동화할 수 있으나, 현장 조사, 면담과 분쟁 조정은 사람이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평균 노출 지수는 낮고 표준편차는 큰 ‘증강형 직업’에 가깝다. 즉, 변호사는 AI의 보조로 단순, 반복 업무를 줄이고, 창의적이고 판단이 필요한 업무에 집중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반면 콜센터 상담사의 여러 직무를 AI로 대체해도 무방하다면 노출 지수의 평균은 높아지고 표준편차는 낮아진다. 이 경우는 ‘대체형 직업’이다. 이 방식으로 분석한 결과 증강 가능성이 높은 직업은 변호사, 웹 개발자, 영업·판매 관리자, 약사 등이고,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은 텔레마케터, 번역가, 통역가, 비서, 아나운서 등으로 나타났다. 전체 근로자로 보면 10%는 대체 가능성이 높고, 16%는 증강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행 조사국 고용연구팀이 지난 15년 간 한국의 일자리 추이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수학적 이해와 응용을 뜻하는 ‘인지적 능력’과 인간 관계에 바탕한 ‘사회적 능력’ 모두가 높은 일자리는 크게 늘어났다. 반면 두 가지 능력 모두가 낮은 일자리는 가장 많이 줄어들었다.

이상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AI 자동화가 모든 일자리를 사라지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은 확연하다. 특히 AI를 활용한 새로운 증강형 일자리는 더 많이 창출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인지적 능력이 필요한 업무는 AI를 보조적 도구로 활용하되, 사회적 능력이 필요한 부분에서 사람의 진가가 발휘되는 방식으로 직업이 진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어떤 일자리는 안전하고, 어떤 일자리는 위험하다는 결론은 아직 섣부르다. 분명한 것은 대체될 수 있는 위험을 줄이고, 증강시킬 기회를 잡는 능력이다. AI 활용력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의 도래는 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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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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