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일하다 죽는 나라
최혜규 사회부 차장
이재명 대통령, 산재 사망사고 근절 연일 강조
노동 환경 개선 대신 위험 외주화 경향 가속화
구체적 고통 외면 말고 단호한 의지와 대응을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월 대선 하루 전날 “일하다 죽는 나라, 더는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중 사망사고가 일어난 날, SPC 제빵공장의 세 번째 끼임 사망사고로부터는 2주 뒤였다. 취임 후 지난달 국무회의에서는 올해 들어 노동자 4명이 사망한 포스코이앤씨 등 중대재해가 반복된 기업들을 들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는 표현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죽어도 할 수 없다, 뭐 죽어도 어쩔 수 없지, 이런 생각을 한 결과가 아닌가”라는 대통령의 질타는 산재 사망사고 통계를 보면 공감하게 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3년 산업재해 사망자는 2016명이다. 업무상 질병 사망이 1204명이고, 812명은 사고사인데, 대부분이 떨어짐(286명), 끼임(88명), 부딪힘(69명), 물체에 맞음(68명), 깔림·뒤집힘(64명) 등 재래형 사고가 원인이다.
2000명이든, 800명이든 선뜻 와닿지 않을 만큼 큰 숫자다. 같은 해 교통사고 사망자가 2551명, 화재 사고 사망자가 284명이다. 사망자가 한 손가락만 넘어가도 대형 사고라 부르고 뉴스가 쏟아지는데, 1년에 812명, 근로일 기준으로 하루에 꼬박꼬박 세 명 이상이 일하러 나왔다가 죽는 것이 참사가 아닐 수 없다. 기본 안전 수칙만 준수해도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사회 수준이 발전할수록 노동 환경이 개선된다는 것은 늘 참은 아니다. 통계청이 2023년 발간한 ‘지난 20년의 산업재해 발생 추이 및 구조’ 보고서를 보면 산재 발생률은 꾸준히 낮아졌지만, OECD 주요 국가와 비교하면 여전히 높다. 특히 보고서는 1990년대 가파른 감소세가 2000년대 들어 둔화되고 2010년대에 사라졌다며, 노동 환경이 의미 있는 수준으로 개선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분석한다.
이 배경에는 고용 관계와 노동 인구 구성의 변화가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하도급과 특수고용, 플랫폼노동의 확산은 위험을 외주화했고, 소규모 사업장에는 고령층과 이주노동자가 늘어났다. 그 결과 중대재해 사건 세 건 중 한 건은 하청 노동자 사망이 됐고, 재해 사고사 중 60대 이상과 이주노동자의 비중은 20여 년 동안 각각 네 배와 두 배가 됐다.
이렇게 해서 개인은 하루하루의 참사를 이름 없는 노동자의 단신으로 넘기고, 국가는 매년 국민 수백 명이 일터에서 죽는 참사를 후순위 과제로 미룰 수 있었다. 책임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취약 계층이 죽음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기업은 국민과 국가를 먹여살린다는 실체 없는 지위를 부여 받고,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는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미필적 고의’의 토양이 되었다.
여기에 균열을 낸 것은 역설적으로 숫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름이다.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 현장에서 혼자 석탄 운송용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다 끼어서 숨진 채 발견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 그의 죽음은 원청 책임을 강화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일명 김용균법과 경영 책임자의 중대재해 예방 책임과 처벌 규정을 명시한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부디 구체적 개인의 사실적 고통에 대한 인식이 이 논의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의 심성에 바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소설가이자 생명안전시민넷의 공동대표인 김훈 작가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2021년 8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이 글을 발표했다. 산재 근절을 위해 전체의 이익과 다수의 행복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이 겪는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우리는 여전히 하루가 멀다하고 구체적인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겪는 개별적인 고통을 마주한다. 김용균의 죽음으로부터 7년이 지났지만, 중대재해처벌법은 아직 충분하지 않고 태안화력발전소에서는 김충현 씨가 또 다시 혼자 작업하다 기계에 끼어 숨졌다.
그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소년공 출신 대통령을 만들었다면, 그 정부가 산재 근절을 위해서 칼을 빼들었다면, 그 칼끝은 어느 때보다도 정확하고 단호해야 한다. 〈어떤 양형 이유〉에서 박주영 판사가 한 산재 사건 판결문에 쓴 것처럼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하는 현실”은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사람 목숨값을 기업 가치보다 가볍게 여기는 야만을 문명이라 말하면 안 된다. 개별적인 노동자의 구체적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보다 많은 노동자들이 삶이 있는 저녁을 맞이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정부가 의지가 있다면 기업과 사회를 이끌 수 있다. 이 과업을 해내는 정부는 그 성과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고 믿는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