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모래 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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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소설가

바다 산책 후 딸려 온 모래
특별한 인연의 결과일까
나라는 주체의 화두에 연결
저마다 각자 우주 가진 주인공

뭔가 답답한 일이 있거나 혹은 탁 트인 공간을 느끼고 싶을 땐 바닷가에 간다. 부산은 백사장을 거닐 수 있는 해변 외에도 넓은 시야와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다. 언제든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부산이 그래서 좋다.

그렇게 바닷가 백사장을 걷고 나면 삶에 닳아 너덜거리던 뭔가를 날려 보낸 느낌이다. 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면 마치 내가 어디에 갔다 왔음을 일러바치듯이 모래알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신경 써서 바지를 털어낸다고 해도 그렇다.

모래알을 꼼꼼히 살펴보면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다. 크기만 작을 뿐이지 작은 보석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바위 같기도 하다. 그렇게 손바닥에 모래알을 굴리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백사장엔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이 있을 텐데, 어떤 인연으로 묻어와 이렇게 내 시선을 사로잡을까? 재미 삼아 확률을 한번 따져보자. 해운대 백사장 길이가 1.5km에 폭은 약 50m라고 한다. 깊이를 1m로 잡고, 모래의 평균 지름을 0.5mm로 계산하면… 해운대 해변에는 대략 1150조 개의 모래알이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니까 이 모래알은 1150조분의 1의 확률로 나에게 묻어 왔으며, 사실상 불가능의 확률을 뚫고 나와 연결된 것이다.

확률로 치면 대단하긴 한데, 이걸로 특별한 인연이라 하기엔 좀 억지스럽다. 내가 해운대 백사장에서 모래 한 알을 집었다고 해서, 그 모래알과 내가 1150조분의 1의 확률을 극복한 특별한 관계라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비약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냥 모래알 하나를 집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확률 자체가 의미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여하튼 수없이 많은 모래알 중의 하나가 선택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에서 벌어지는 우연과 필연, 그리고 인연에 관해 묘한 신비감을 느낀다. 이런 우연과 필연에 가장 신비하게 여겨지는 것이 또 있다. 수많은 사람의 화두가 되었을 질문이기도 하다.

바로 ‘나’라는 주체이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수많은 ‘나’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팔 두 개 다리 두 개에, 이렇게 생긴 얼굴을 가진 생명체를 ‘나’라고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 생명체에 ‘나’가 깃든 것일까. 아니면 이 생명체에서 ‘나’가 생겨난 것일까?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나’중에 왜 하필 ‘나’의 시선으로 이 세계와 우주를 응시하고 있는 걸까?

‘나’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감각과 지능을 이용해 주위 사람과 부대끼지만, 누구와도 동일화되지 않는다. 다른 ‘나’의 생각을 엿볼 수 없으며, 어떤 고통도 공유하지 못한다. 그저 상황을 유추하고, 판단하여 이성적, 감성적으로 동조할 뿐이다. 나는 나만의 우주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나’는 결국 타인이며 관객이다.

나는 물리학의 초끈이론이나, 브레인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평행우주’가 어쩌면 바로 ‘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나만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나는 결코 엿볼 수 없는 타인의 우주가 수없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타인의 우주에도 내가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우주에서는 내가 타인이다.

그러니 사람들 각 개개인은 저마다의 우주를 가졌다. 어쩌면 동물들도 가졌을지 모른다. 저마다의 세상에서는 잘났든 못났든 바로 자신이 주인공이다. 승객은 기차에 오르내릴 것이고, 주인공은 저마다 죽느냐 사느냐를 외칠 것이며, 객석에 앉아 먹는 팝콘은 여전히 맛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객석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다큐멘터리를 찍든 영화를 찍든 나도 나만의 무대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모래알처럼 많은 ‘나’중에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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