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현대 한국 사회는 급속한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발전 덕택에 세계에서 명성이 자자하지만, 비관주의와 냉소주의로 채색된 문화적 풍경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진보와 성장의 약속에 대한 집단적 환멸을 반영하는데, 사회 구조적 압박, 정치적 격동, 지도층의 위선 때문에 촉진되고 있다. 비관적, 냉소적 태도는 헬조선, 삼포세대 같은 대중 담론과 청소년 문화, 심지어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인기 창작물에도 스며들어 불신과 좌절에 시달리는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개인의 삶을 웅크리게 할 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조장한다.

비관주의는 부정적 결과를 예견하거나 최악의 상황에 시선을 집중하는 경향이다. 비관주의자는 일이 잘못될 것이고, 난관은 불가피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사고 방식의 바닥에는 인생이란 불가피하게 힘들고, 예측 불가능하거나, 사회 제도가 불공정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직장 면접을 앞두고 비관주의자는 자신은 지방대 출신이니 어차피 떨어질 것이라고 포기한다. 비관주의는 실망과 좌절로부터 개인의 감정을 보호하는 방어 기제로 작동하지만, 늘 불편한 결과를 바라보기 때문에 쉽게 우울한 기분에 빠지며, 성취 동기를 줄여버리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심리적 내전에 조롱·불신 확산

개인 삶 위축 인간 관계도 단절

사유하는 낙관주의적 자세 필요

냉소주의(cynicism)란 용어는 개(kynikos)라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의 냉소주의 학파는 사회적 규범과 제도를 부정하고 마음대로 방랑하는 개의 자세를 추종하는 태도로 묘사되었다. 반면 현대의 냉소주의는 사람이나 기관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고, 이기심이나 탐욕, 그리고 음모로 얼룩져 있다는 회의적 태도이다. 이를테면 냉소주의자는 정치인들이 가난한 사람을 진심으로 돕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표를 얻기 위해 벌이는 술책이라고 여긴다. 혹은 친구의 친절을 진정한 선의가 아니라, 미래에 호의적 보답을 얻기 위해 꾸미는 작전이라고 본다.

비관주의와 냉소주의는 서로 다르다. 비관주의는 부정적 결과에 초점을 두는 반면, 냉소주의는 의도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동기 지향적 자세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근본을 고려하면 비관주의가 냉소주의의 뿌리이다. 비관주의가 냉소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가 실패한다고 예상하는 상황에서, 실패의 원인을 관련 기관이나 인사들의 불순한 의도에서 찾을 때 냉소주의는 생기는 것이다.

비관주의는 스토아주의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스토아주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예상하는 비관주의적 자세를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실패에 대비하게 하면서, 부와 성공, 명예처럼 대중이 추구하는 것들의 가치를 부정하여, 그것을 얻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고 한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의 전략은 종종 이점보다 훨씬 더 해악이 크다. 비관주의적 자세를 취하면 세상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므로 삶이 우울하고 지루하며, 타인의 동기를 불신하기 때문에 인간 관계를 형성하기 힘들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런 랭어는 신간 〈사유하는 신체〉에서 비관주의의 대안으로 ‘사유하는 낙관주의’(mindful optimism)를 제안한다. 결과를 낙관해도 결과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리부터 나쁜 결과를 예상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낙관적 기분으로 지내다가 실패를 목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단순한 낙관주의는 그냥 일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게으르게 살기 쉽다. 반면 사유하는 낙관주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길이 있는지를 사유하고 그것을 실행하면서 결과를 낙관하는 자세이다.

더 나아가 사유하는 낙관주의는 실패와 성공을 가르는 기준마저 사유한다. 대개 우리는 사유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시험에 합격하고, 돈을 벌고, 선거에 승리하고, 인기를 얻는 것을 성공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기준을 바꾸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며, 오히려 실패일 수 있다. 경쟁이 최고로 치열한 대학 학과에 합격하여 자신의 취향이나 소질과 어울리지 않는 전공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차라리 불합격이 성공이다. 어떤 교수는 국회의원에 당선하였기 때문에 연구 분야에서 업적을 이룰 기회를 상실했다. 깊이 생각한다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유하는 낙관주의자에게는 실패마저도 성공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최근 몇 달 동안 심리적 내전으로 묘사될 정도로 한국 사회는 양분되어 조롱과 불신, 비난과 자조(自嘲)의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 풍토 속에서는 개인의 삶은 위축되고, 인간 관계는 단절된다. 사유하는 낙관주의의 자세는 비관주의와 냉소주의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의 질환을 치유하는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