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공인중개사의 한숨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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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부동산 중개업자를 ‘집주름’(家儈 ·가쾌)이라 불렀다. 이들이 직업으로 자리를 잡은 건 18세기 중반이라고 한다. 당시 집주름의 수입, 즉 중개 수수료는 어느 정도였을까? 신택권의 〈성시전도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특별히 집주름이 나타나 생업을 꾸리니, 큰 집인지 게딱지인지를 속으로 따진다. 천 냥을 매매하고 백 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또 김형규의 일기 〈청우일록(靑又日錄)〉 1880년 2월 14일 기록에도 350냥짜리 집에 대한 거래로 받은 수수료가 40냥으로 나온다. 18세기 후반~19세기 후반 집주름의 중개 수수료는 거래가의 10% 내외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쾌들은 한양과 평양에서 활동하면서 토지와 가옥 매매를 중개했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복덕방이다. 복덕방은 복을 주고 덕을 나눈다는 의미로 가쾌들의 영업장이었다. 가쾌들은 집이나 땅 매매를 성사시킬 경우 중개료를 받았는데 입으로 일해서 버는 돈이라는 의미에서 ‘구전’(口錢)이라 했다. 1890년 무렵 제정된 ‘객주거간규칙’을 보면 당시 구전은 거래액의 1% 정도였지만 일률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가쾌들의 영업 규칙은 일제강점기에 ‘소개영업규칙’이란 이름으로 정비됐고, 광복 후에도 일정 기간 유지되다 1961년 ‘소개영업법’으로 개편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개 수수료는 가쾌 당시의 구전이 거의 그대로 답습됐다. ‘소개영업법’이 1983년 폐지되고 같은 해 12월 ‘부동산중개업법’이 제정되면서 공인중개사 제도가 도입됐다. 1985년 공인중개사 시험 시행으로 합격자들이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열게 됐고, ‘복덕방’이란 명칭은 점차 사라졌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지난해 부산에서 1000곳 가까운 공인중개업소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하루 3개꼴로 폐업한 셈이다. 지난해 부산에서 개업한 공인중개업소는 719곳이었는데 폐업한 곳이 994곳으로 폐업이 개업보다 275곳 많았다. 지난해 부산시에 등록된 사무소가 7324곳이었으니 폐업률은 약 13.5%에 이른다. 당근마켓 등 온라인 거래 플랫폼을 통한 부동산 직거래가 늘어난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부동산 거래 절벽으로 ‘한 달에 한 건 계약하기도 힘들어 월세를 내는 것도 벅차다’는 공인중개사의 한숨이 안타깝다. 대출 규제 완화, 정치적 불확실성 해소 등으로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고 거래가 활성화돼 공인중개업소가 다시 활력을 찾았으면 한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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