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골디락스 콤플렉스 “부산 여권 뭐라도 하라”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미셸 오바마 최근 지지층 안일함 깨는 한 마디
김민석 밀어준 민주당 '산은 이전 반대' 더 강화
여권 외부 변화 기대선 부산 현안 고착 못 벗어나
과단성, 상상력 발휘해 제2의 '희망고문' 막아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를 보면서 뜬금없이 고대 로마 콜로세움의 검투 장면이 떠올랐다. 막판까지 5명의 최고위원 당선권 경계선에 있던 전현희 의원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에서 “김건희 살인자”를 목청껏 외친 후 단숨에 2위로 지도부에 입성했다. 친명(친이재명)계 중에서도 그닥 존재감이 없던 김병주 의원이 줄곧 당선 안정권에 속할 수 있었던 동력 또한 국회 본회의장에서의 느닷없는 “정신 나간 국민의힘 의원들” 발언이었다. 치과의사 출신에 장관급인 권익위원장까지 지낸 정치 엘리트와 ‘별 중의 별’ 4성 장군 출신 의원이 강성 지지층의 ‘엄지척’을 받기 위해 싸움닭을 자처한 꼴이다. 극에 달한 여야 적대 정치를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더 험하게, 더 격렬하게 여당과 치고 받을 줄 알아야 지지층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민주당 의원들과 더 잔인하고 흉폭하게 상대를 제압해야 광기 어린 군중의 선택을 받는 검투사, 왠지 신세가 흡사해 보이지 않는가. 여기서 무슨 정책과 비전, 리더십을 논하는 건 한가롭다. 오로지 윤석열 정권을 끝내고, 이재명 대표를 옹위하는 것 외에 나머지는 다 부차적일 뿐.
그렇게 쓸려 간 부차적인 것들 중에 KDB산업은행 부산 이전도 있다. 부산 전대에서 산은 이전의 최대 장애물인 김민석 의원의 약진은 개인적으로 충격이었다. 김 의원이 누구인가. 2010년 부산시장 선거에 도전하면서 ‘부산의 아들’을 자처한 김 의원이다. 당시 그의 선거 슬로건이 “서울을 이기자”였다. 경선이 끝나서도 부산 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그는 이제 “산은이 부산에 가면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결사 반대한다. 부산 연고를 언급하는 질문에 처가는 호남이라며 “출신지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말이야 맞는다고 해도 그 표변이 놀랍고, 허탈하다. 그에게 부산은 그저 ‘철새 정치’로 인한 경력 단절을 해소하기 위한 소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이재명 대표가 “김민석 표가 왜 이렇게 안 나오냐”고 했어도 적어도 부산이라면 김 의원에게 준엄한 경고장을 날릴 것이라고 봤다.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였다. 김 의원으로선 이제 지역구 시설인 산은을 지키는 데 거칠 것이 없어졌고, 전대 이후 ‘부산 민심을 이제 알겠느냐’며 김 의원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려던 부산은 할 말을 잃게 됐다.
민주당 전대 이후 산은 이전의 전제인 산은법 개정안 처리는 더 험난한 상황에 놓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등장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이전을 반대하는 민주당의 힘은 더 막강해졌고, 핵심 반대 세력들의 입지는 더 굳건해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뚫고 가야 할 부산의 대응은 무기력해 보인다. 금방 될 것처럼 여겼지만 20년의 ‘희망고문’을 겪었던 가덕신공항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물론 부산시나 개별 의원 차원에서 산은법,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에어부산 분리매각 등 부산 주요 현안을 두고 ‘원내 지도부에 당부했다’, ‘산은 회장을 만났다’, ‘대한항공과 접촉했다’ 등 움직임은 부산해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 결과를 반드시 얻어내겠다는 결기보다는 ‘그래도 할 만큼 하고 있다’는 알리바이 만들기 정도로 느껴진다면 좀 지나친 얘기인가.
최근 만난 부산의 한 원외 인사는 “지난해 새만금 사업 예산이 삭감됐을 때 전북 국회의원과 시·도 의원까지 일제히 삭발로 항의로 정부의 재검토를 이끌어냈는데, 부산 정치권은 지역 회생의 절호의 기회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너무 차분한 것 아니냐”고 했다. 물론 삭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이재명 지키기에 올인한 거대 야당과 거부권 외에 수단이 없는 무기력한 소수 여당의 끝없는 반목 사이에서 수도권과 버금가는 국가적 과제인 지역 소멸을 막을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얼마 전 미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선 미셸 오바마가 언급한 ‘골디락스 콤플렉스’가 기억에 남는다. 영미권 구전동화에서 유래된 이 말은 ‘극단적 조건 사이에서 적당한 해법을 추구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녀는 카멀라 해리스의 승리를 의심하는 지지층에게 ‘적당히 이길 수 있는 후보’는 없으니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말고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뭐라도 하라(Do something)”고 지지층에게 일갈했다. 부산 여권이야말로 지금 이 콤플렉스에 갇혀 있는 상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과 당 지도부는 물론 민주당 지도부와도 과감하게 부딪쳐 현상 변화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적당하게 안주하면서 상황 변화만 기다리다가는 부산이 국가 ‘양대 축’으로 도약할 기회는 영영 날아갈지 모른다. 무모한 결행이든, 과감한 상상력이든 정말 뭐라도 해야 할 때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