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곱버스도 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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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공모 칼럼니스트

주식시장 애국심보다 생존이 먼저
2030 한국 증시 망하는 데 베팅
해외 주식 투자 지속적 증가 추세

국내 기업 향한 투자자 분노 최고조
금투세 폐지·밸류업 대책은 곁가지
투자자 신뢰 회복 없인 백약이 무효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였다. 2024년 8월 5일, 코스피가 8.77% 떨어지면서 역대 최대 하락률을 기록했다. 포인트로는 234.64포인트. 대학 시절 글로벌 금융위기도 겪어봤지만 그때도 전 거래일 대비 200포인트 넘게 떨어진 건 본 적이 없었다. 더 혼란스러운 건 미국 주식이었다. 미국 증시는 한국·일본 증시에 비해 선방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종목들의 하락 폭은 제법 컸다. 그중에는 뭇 ‘서학개미’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엔비디아도 있었다. 고점에서 샀던 까닭에 피해는 더 컸다. 남들은 엔비디아 주식 투자로 몇 배를 벌었다는데 나는 30%를 잃는구나. 참담함에 넋을 놓고 있는데 주식에 정통한 친구가 조언을 해줬다. “어차피 미국 주식은 갖고 있으면 오를 거니까 그냥 놔둬.”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미국 증시도, 엔비디아도 ‘검은 월요일’의 충격을 금방 만회했다. 반면 우리 증시의 회복은 지지부진했다. 올해 초 세계 증시가 급등할 땐 홀로 제자리걸음이더니 떨어질 땐 남들보다 많이 떨어졌다. “이쯤 되면 국장(한국 증시) 투자한 내가 바보”라는 ‘동료 개미’들의 하소연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코스피와 코스닥이 모두 폭락한 그날, 2030세대에서는 “곱버스도 국장이다”라는 말이 화제가 됐다. 이 말은 최근 국내 주식 투자자들이 곱버스에 많은 투자를 한 걸 두고 한 경제 유튜브 채널의 출연자가 “주식시장은 선함이나 애국심보다는 (자신의) 생존이 먼저”라며 “곱버스도 엄연히 한국 코스피에 등록돼 있는 종목”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곱버스(KODEX200선물인버스2X)는 ETF(상장지수펀드)의 한 종류다. 코스피200 선물지수인 F-KOSPI200을 -2배로 추종한다. 주가가 1% 하락할 때마다 2%의 수익을 낸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 두 배로 돈을 잃는다. 비유하자면 ‘한국 증시가 망하는 데에 손모가지를 거는’ 격이다.

5일 국내 증시가 대폭락하자 2030 투자자들은 “곱버스도 국장”이라던 그녀에게 열광했다. 누군가에게는 우리나라 증시가 망할 거라는 데 베팅하고 그게 실현되자 열광하는 2030세대의 모습이 낯설기만 할 것이다. “돈 때문에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망하길 바라는 거냐”고 혀를 찰 수도 있다. 하지만 청년들이 “곱버스도 국장”이라는 말에 열광했던 사실에는 돈보다 더욱 엄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 바로 국내 증시를 향한 불신과 분노다.

수출 경기가 역대급 호황이네, 한국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네 하는 뉴스들은 우리나라 ‘개미’들에게 ‘먼 나라 이웃 나라’ 이야기다. 이상하게 우리나라에선 기업의 온기가 주주에게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자사주 소각 같은 건 하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르겠고 배당은 쥐꼬리다. 유럽처럼 산업 전체가 침체되었다면 모를까, 우리 기업들은 세계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데 주가는 제자리를 맴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속담만큼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올해 상반기 국내 개인 투자자의 해외 증시 거래액은 약 284조 원(약 2058억 달러), 국내 증시 거래액(약 3698조 원)의 7.7% 수준이다. 2017년 전까진 이 비율이 1%에도 미치지 못했다. 해외 주식 투자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해외로 눈을 돌리는 국내 투자자는 계속 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논란이 뜨겁다. 그들은 연 5000만 원 이상의 금융 투자 소득에 부과되는 금투세의 존폐가 국내 증시에 큰 영향을 끼칠 듯이 말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영향은 있겠지만, 이런 유의 세제 지원은 부차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미국 주식에 열광하는 건 단지 미국 기업의 실적이 좋아서가 아니다. 미국 주식에는 지금 당장은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회사가 건실하다면 언젠가 다시 오를 거라는 믿음이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회사가 클만하면 잘나가는 계열사를 떼어 내 새로 상장하고, 멀쩡한 회사 지분을 돌연 부실한 계열사 지분과 엿 바꿔 먹는다. 무기력한 이사회는 대주주가 이런 불합리한 결정을 해도 반발하지 않는다.

정부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근본적인 원인에는 눈 감으면서 곁가지에 집착하고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합병에서 나타났듯, 저평가 우량주에 투자하더라도 언젠가 ‘호구’가 될지 모른다는 불신이 여전히 국내 주식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이 불신을 해소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기업이 밸류업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한들 의미가 없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지 않는 한, “한국 증시가 망하는 데에 투자하겠다”는 청년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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