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정부 요직에 뉴라이트 대거 배치
독립기념관장까지도 논란 인물로
건국절 등 논쟁에 '반쪽' 광복절
역사 논쟁이 사상 검증 과정 '변질'
과도한 이념 논쟁 인한 피로감
역사 무관심으로 이어질까 걱정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민감한 이슈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는 문장이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오히려 역사를 잠시 잊고 싶은 심정이다. 십수 년째 되풀이되며 슬슬 지겨울 법도 한 건국절 논쟁이 또 한 번 불붙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 시기가 1919년이냐 1948년이냐를 두고 다시 좌우가 충돌 중이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논쟁의 핵심. 이는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빌미는 윤석열 정부가 제공했다. 정부 산하 국내 3대 역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수장을 모두 뉴라이트 계열 인사로 교체하더니, 최근 독립기념관장마저 뉴라이트 성향이 짙은 인사로 채웠다. 뉴라이트 역사관은 대체로 임시정부 등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역할을 축소 평가하고, 대신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한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반도의 근대화,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내용이다. 독립운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을 정작 독립운동을 기리는 독립기념관장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반발하는 측의 행태도 다소 과해 보인다. 광복회는 ‘뉴라이트 판별법’까지 내놓았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만 말해도 일본의 식민지배 합법화를 꾀하는 이른바 친일파라는 식이다. 무모하다. 올해 초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누적관객수가 무려 1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승만의 과(過)는 눈감고 공(功)에만 집중했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실관람객 평점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광복회의 기준대로라면 그 영화에 좋은 평점을 준 시민 모두가 친일파인 셈이다.
물론 뉴라이트 역사관이라는 것이 듣는 이에 따라 다소 불편할 수도 있고, 또한 한국사회의 주류 견해도 아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부정(이미 일본 정부도 1993년 고노담화에서 강제성을 인정했다)하는 등 일부 내용은 재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전히 학문적으로 충분히 다퉈볼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시점에 건국 논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영토·국민·주권을 필수 요소로 하는 국가의 성립이 임시정부 당시에도 합당했냐는 의문이 마냥 억지스럽지만은 않다. 사료를 바탕으로 학자적 견해를 밝히고 토론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학문의 토론 과정이어야 할 역사 논쟁이 사상을 검증하고 불온자를 색출하는 작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급기야는 윤석열 대통령이 “(건국절 제정 논쟁이)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며 진화에 나섰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정작 이 진흙탕 싸움에 불을 붙인 것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대통령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근의 무의미해보이는 이념 논쟁에 대한 피로가 자칫 역사에 대한 무관심, 냉소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얼마 전 우리 정부는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에 앞장서 찬성표를 던져 논란을 불렀다. 이를 두고 “과거의 강제노역 사실을 들춘들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변명한다면? 통 크게 찬성표 던져주고 우호적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이득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 “이제 와서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는 것이 먹고 살기 힘든 위안부 가족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일본 정부가 주든 한국 정부가 주든 보상금부터 받으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대통령 말에 대한 과도한 확대 해석이라고? 과연 그럴까?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는 이미 이런 사고 체계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최근 광복절 축사에서 대통령이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미 대통령은 먹고 사는 데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과거사 따위는 훌훌 털어버린 것 같다.
일본의 과거사에 면죄부를 주고 얼마나 많은 경제·안보적 이익을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안부 할머니와 그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까지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지는 않다. 미래 세대 역시 마찬가지 심정일 거라 생각한다. 여전히 이 지긋지긋한 역사 논쟁들에 머리가 지끈지끈거리지만,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김종열 문화부장 bell10@busan.com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