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부산은 싱가포르가 될 수 있을까
박태우 사회부 차장
강력 통치 기반한 국가주도 싱가포르 모델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에 똑같이 적용 무리
국가 존속 해법 균형발전 공감대 확산해야
‘아시아의 네 마리 용.’ 1970~80년대 일본의 뒤를 이어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아시아 신흥 공업국인 한국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를 한데 묶어 일컫던 말이다.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을 잇는 지정학적 강점에다 높은 교육열, 근면한 국민성 등을 앞세워 이들 네 나라는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이끌어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축전을 벌였다.
하지만 인구 규모가 컸던 한국이 화학, 철강,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용 중의 용’으로 날아오르면서 이 표현도 차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이를 국제사회에 입증 받는 일종의 세리머니였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현재 네 마리 용의 운명도 엇갈렸다.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돼 일국양제 체제가 흔들리며 빛바랜 홍콩영화 속 ‘화양연화’를 그리워하는 처지가 됐고, 대만 역시 중국과 첨예한 양안 갈등으로 상시적인 안보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 반열에 올라섰지만, 극단적인 지역 불균형과 인구 급감으로 해가 다르게 성장 동력이 꺾이고 있다.
‘네 마리 용’ 중 가장 주목 받지 못하던 싱가포르만이 오늘날 여전히 드라마틱한 성장세를 구가하는 국가다. 아시아의 금융 허브, 스마트 물류 중심,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 싱가포르는 해상 물류산업을 기반으로 조선·정유·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제조업을 육성하고, 여기에 금융·관광·마이스 등 서비스산업을 접목시키는 등 세계 산업구조 전환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글로벌 경제 중심지로 우뚝 섰다.
지난 6월 부산시 연구팀과 함께 싱가포르를 방문해 느낀 소회는 부산이 꿈꾸는 미래상이 싱가포르에 있다는 점이다. 초고층 빌딩들이 밀집한 싱가포르의 금융중심지 래플스 플레이스부터 코로나 팬데믹 이후 숙박료가 갑절 이상 뛰었지만 객실 구하기가 어렵다는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인공섬을 매립해 세계 최대의 완전 자동화 스마트항만을 건립하는 대역사가 착착 진행 중인 투아스까지 싱가포르는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의 모범답안이 되기에 충분했다. 도심 곳곳에는 공원과 정원이 숨겨져 있어 일상에 여유와 휴식을 선사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 외국인이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다는 점도 큰 매력이었다.
국토가 좁고 내수시장도 작은 싱가포르가 ‘글로벌 허브도시’로 우뚝 선 원동력은 적극적인 개방 정책과 해외투자 유치다.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줘 기업을 유치하고 규제와 절차 역시 줄여줬다. 상속세와 증여세가 없고, 자본소득과 배당소득에도 과세하지 않으며 법인세 역시 17% 수준이다.
부산이 ‘글로벌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 통과에 목을 매는 이유가 이것이다. 싱가포르 ‘성공 방정식’을 적용해 부산을 사람과 기업, 자본이 함께 몰리는 국제적인 비즈니스·관광도시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게 부산시 복안이다.
관건은 국회가 연내에 특별법을 통과시킬지, 통과되더라도 입법 취지를 훼손하지 않고 순조롭게 시행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싱가포르가 파격적인 유인책을 통해 글로벌 기업을 끌어 모으는 이면에는 철저한 국가 주도의 발전 전략이 있다.
법과 원칙에 예외를 두지 않는 무관용 원칙을 표방하면서 국민 반대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국가 청렴도 순위에서 아시아 1위를 차지하면서도 언론자유와 민주주의 지수에서는 하위권을 맴도는 양면성을 가진 국가다. ‘먹고 사는 문제는 정부가 책임질테니 국민들은 따르라’는 엘리트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나라다. ‘싱가포르 모델’은 극도의 효율성과 강력하고 속도감 있는 정책 집행이라는 측면에서 강점을 지녔지만,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뿌리를 둔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부산을 글로벌 허브도시로 도약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적 명분과 사회적 합의가 필수다. 특별법이 단순히 ‘부산 특혜법’이 아니라 ‘대한민국 특단법’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사실 특별법은 부산만의 발전을 꾀하자는 것이 아니다. 낡은 수도권 일극체제를 고수하다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틀을 바꿔 혁신과 발전을 이끌 기폭제로 삼자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타 지역 눈치를 보느라 법안 처리에 미적거리고 이런저런 칼질을 가한다면 ‘허울뿐인 특별법’으로 전락할 것이 뻔하다. 지방소멸이 단순히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존립 자체를 흔드는 위협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수도권 중심의 불균형 성장 전략부터 포기해야 한다. 지금처럼 산업은행 부산 이전 문제를 풀지 못해 여야가 티격태격하며 ‘골든타임’을 허비해서는 미래가 없다. 부산을 필두로 지방을 국가의 신성장 동력으로 십분 활용해 대한민국이라는 반쪽짜리 운동장을 온전히 넓게 써야 한다.
박태우 기자 wideney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