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활 잘 쏜다고 ‘전투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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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올해 여름 달궜던 파리 올림픽 폐막
한국은 양궁 사격에서 무더기 메달
무기 잘 다뤄 전투 민족 추측 나돌아

탁월한 활 솜씨 역사적 일화는 존재
모두 외적에 대항한 자위 수단일 뿐
이젠 심신 단련 생활체육화 계기를

정말 뜨거운 여름이다. 파리올림픽은 이런 여름을 더 뜨겁게 달궈 놓았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출전한 여러 경기를 새벽까지 보았는데, 압권은 역시 양궁이었다. 한 종목에 걸린 금메달을 싹쓸이하는 일은 전혀 쉽지 않다. 그런데 양궁만이 아니라 펜싱과 사격에서도 낭보가 이어지자, 우리가 원래 활 총 칼과 같은 무기를 잘 다루는 ‘전투 민족’이었나 하는 추측이 나돌았다. 과연 그럴까, 적어도 활은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활을 잘 쏜 인물로는 우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들 수 있다. ‘주몽’이라는 말이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고 전한다. 한편 직접 활을 잘 쏘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에 쇠뇌를 만드는 장인이 있었다. 서기 669년,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이 쇠뇌 기술자인 구진천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서 나무 쇠뇌를 만들게 하였다. 그런데 30보밖에 날아가지 않았다. 당나라 천자는 신라의 쇠뇌가 1000보를 날아간다고 들었는데 왜 30보밖에 날아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구진천은 재질이 신라의 나무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했고, 천자는 신라의 나무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런데 신라의 나무로 만든 쇠뇌도 신통치 않았다. 60보밖에 나가지 않은 것이다. 구진천은 오는 길에 나무가 습기에 젖어 그런 것 같다고 하자, 천자는 일부러 기술을 숨기려 한다고 여겨 중벌로 위협했다. 그래도 구진천은 끝내 ‘1000보의 쇠뇌’를 만들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일화이다. 그러나 쇠뇌는 기계식 활이어서 개인 능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의외로 우리 역사상 활쏘기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다름 아닌 조선 태조 이성계다. 그의 활 솜씨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한데, 조선왕조실록과 용비어천가에는 활과 관련된 일화가 적지 않다. 태조실록 총서를 보면 이성계가 화살 하나로 까마귀 5마리부터 담비 멧돼지 범 등을 잡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더 극적인 이야기는 왜구와 관련된 것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구들과 지리산 아래에서 200보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이었다. 왜구 한 명이 등을 돌려 몸을 숙인 채 손으로 엉덩이를 두드리며 욕설을 했다. 이때 태조가 편전(애기살) 단 한 발로 고려군을 조롱하는 그를 쓰러뜨린 것이다. 200보는 지금 기준으로 360m 정도인데, 현재 양궁의 사거리가 70m인 점에 비하면 5배가 넘는다. 왜구들은 화살이 올 수 없는 거리라고 생각해 조롱했을 테지만 이성계의 화살은 어김이 없었다. 당시 왜구의 두목은 아기발도였는데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감싸고 있어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퉁두란에게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수리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라”고 한 뒤 투구의 정수리를 두 차례나 맞춰 투구를 벗겨 버렸다. 이때 퉁두란이 두목을 쏘아 죽이니 비로소 적군의 기세가 꺾였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일화는 모두 용비어천가에도 등장한다. 제47장은 “편전(片箭) 한 날에 도이(島夷·섬 도적)가 놀라 자바니, 어늬 구더 병불쇄(兵不碎)하리오”라고 노래하고 있다. 바로 엉덩이를 드러내고 고려 병사들을 조롱한 왜구를 화살 한 발로 제압한 얘기다. 뒷부분은 “어떤 적이 굳건하여 분쇄되지 않겠는가”라는 뜻이다.

52장 역시 이성계가 왜장의 투구를 벗긴 상황을 “투구 아니 밧기시면 나랏 소민(小民)을 사라시리잇가”라고 노래하고 있다. 지리산 아래에서 벌어진 이 사건을 우리는 황산대첩으로 기억하고 있다. 적장 아기발도는 15~16세의 젊은 나이였는데도 왜구의 우두머리였다. ‘발도’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붉은 영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웅’이라는 뜻이다. 온몸을 갑옷으로 두른 적장에게 활은 소용이 없는 듯했지만 이성계는 적장의 투구 위에 장식으로 달린 뭉뚝한 부분을 두 번이나 명중시켜 결국 투구를 벗겨냈고, 이성계와 의형제이자 탁월한 궁사인 퉁두란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적장을 죽일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전투의 현장 근처에 황산대첩비가 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뒤 이 비석을 조각조각 부수어 땅에 묻어버렸다. 왜구를 진압한 이성계가 바로 자기들이 식민지로 만든 조선의 시조였던 사실이 불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 이후 비석을 새로 세우고 일제가 부숴버린 원래 비석도 한쪽에 모아두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결코 전투 민족이 아니다. 국토를 침략한 적들을 막기 위해서 무기를 들었을 뿐이다. 지금 다시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온 국민이 활쏘기를 사회체육으로 생활화해 우리의 국토를 지키려는 의욕에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 나라에 보여주면 어떨까. 뜨거운 여름에 떠오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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