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참음의 불평등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대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공동연구원

젠더·섹슈얼리티 이슈가 새롭게 등장할 때마다, 이번엔 또 뭐냐,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드느냐는 여론을 심심찮게 마주한다. 거기에는 내가 어디까지 너의 이야기를 참아야 되냐는 심정과, 이제 더 못 참겠으니 여기서 더 밀리면 안되고, 여기서 더 봐주면 안된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나에게 낯선 이슈를 앞으로 살면서 평생 대면해야 하고, 또한 남의 얼굴과 남의 일에 매번 마음을 여는 과업이 기본적으로 쉽지 않은 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나는 이제 너를 더 이상은 못 참겠고 여기서 더 밀릴 수는 없다는 감각에는 그런 통상적인 일을 넘어서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 감각의 이면에는, 여태껏 썩 내키지는 않았는데 스스로 짐짓 정의로운 사람이기 위해 내가 당신의 낯선 이야기를 애써 참아왔다는, 즉 나로서는 참지 않아도 되었는데 여지껏 선심써서 참아‘주었다’는 뜻이 거기에 포함된다. 말하자면 그의 ‘참아줌’은 그에게 일종의 시혜이자 선심인 셈이고, 그런 점에서 그 사람의 기본값은 연약한 교양에서 비롯된 참음보다 내가 금방이라도 돌아갈 수 있는 ‘참지 않음’의 세계에 보다 근접한다. 훈련소의 조교나 아우슈비츠의 교도관처럼, 어떤 사람에게 전해질 환대를 언제라도 내 뜻대로 철회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막강한 위계에 올라앉아있다는 증거다.

참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안 참으면 그만인 것이야말로, 참는다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과 같다. 누군가가 이번 사회적 약자·소수자를 과연 참아‘줄까’ 말까를 고민할 때, 누군가는 세상을 참지 않는 선택지가 애초에 없는 채 인생을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과 남에게서 오는 부당함과 무례를 무던히도 참는다. 그러지 않고서는 삶을 살아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참는 것과 참아‘주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일은, 남의 일, 남의 생각, 남의 서사, 남의 역사를 배우고 이해하는 고통보다, 그걸 몸소 겪은 이들의 고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염치를 배우는 과정과 같다.

환대란 하해와 같은 선심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일지 말지 재는 것이 아니라, 그간 무던히도 참아왔던 누군가를 비로소 나와 같은 사회적 구성원으로 대접하는 일이다. 그것은 내가 여지껏 누리고 있던 파이를 그들에게 쪼개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애초부터 마땅히 누리고 받아야 했을 몫을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느끼는 참음이 다른 이들의 참음과 견주어 그것이 어떤 무게인가를 되짚는 감각이 요구된다. 남과 남의 일을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연약한 교양의 영역에 방치하지 않고, 여지껏 내가 차마 상상해보지 못한 것을 내 상상과 추체험의 영역으로 애써 끌어들이는 노력으로부터 환대는 시작된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