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치자꽃
유치환(1908~1967)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또렷이 살아 있는 네 모습.
그리고 그 너머로
뒷산마루에 둘이 앉아 바라보던
저물어 가는 고향의
슬프디 슬픈 해안통(海岸通)의
곡마단의 깃발이 보이고
천막이 보이고
그리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눈과 눈을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있는가.
- 시집 〈울릉도〉(1948) 중에서
화엄경은 우주를 하나의 꽃으로 보면서 ‘하나의 꽃이 한 세계(一花一世界)’라 표현하고 있다. 치자꽃이 그렇지 않을까? 치자꽃이 피면 장마가 시작되고 치자꽃이 지면 장마가 그친다. 치자꽃이 피는 시기는 장대비와 함께 진한 향기가 천지를 뒤덮는 한 여름의 세계다. 장마가 잠시 물러간 날 곳곳에서 풍기는 치자꽃 향기는 얼마나 코끝을 달짝지근하게 만드는 설렘이었던가!
사랑하는 이의 눈 속에서 ‘치자꽃’이 떠오르는 것을 본 사람은 이미 한 세계를 산 셈이다. 특히 ‘저녁 으스름 속의 치자꽃 모양’의 눈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아득한 기억 속 안으로 또렷이 살아 있’는 연인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운명일지 모른다. 그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아니, 그 얼마나 치명적인 아름다움인가! 김경복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