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영의 법의 창] 반(反)헌법에 퇴색된 제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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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의기관이 대의민주주의 유린 역설
견제·균형 작동 안 하면 법치도 없다
선출된 권력이 폭주하면 국민이 심판

헌법이 대중화되었다. 그만큼 헌법이 국민들 가까이서 체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헌법이 등장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헌법적 판단과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일이 도처에서 등장하곤 한다. 그런 헌법이 17일로 일흔여섯 번째 탄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제헌절에 마음이 무겁다. 나라의 경사를 기리는 5대 국경일(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 중 2008년부터 제헌절만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것 때문만은 아니다. 헌법 제정을 축하하고 후손들의 제헌 정신 계승 의미를 이어 가기 위해 제헌절의 공휴일 재지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적잖고, 지난달에는 공휴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으니까.

제헌절을 맞은 헌법학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건, 우리 헌정 사상 요즘처럼 헌법의 근본 이념과 기본 원리가 심각하게 퇴색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권자들은 시대가 흘러도 나라의 근본을 바탕으로 이어 가야 하는 헌법 이념과 원리를 1948년 7월 17일 선언했다.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근본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 존중·기본권 보장·국민주권 원리·자유민주주의·법치주의·시장경제 원리 등을 핵심으로 한다.

국민주권은 존엄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주인의 위임을 받은 한시적인 국가권력은 국민의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만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선출된 권력이 민주적 정당성을 가졌어도 헌법적 정당성에 어긋나는 권력 행사를 하면 안 되는 이유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 대의기관인 국회는 필연적으로 다수와 소수의 정치 세력이 대립하는 구도가 될 수밖에 없다. 다수결 원리와 소수의 보호는 대의민주주의를 기능하게 하는 쌍두마차다. 다수의 소수 보호는 민주주의 가치이기도 하다. 대의민주주의는 양자 간 타협과 절충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국회가 보여 주고 있는 모습, 다수결 원리만을 앞세워 타협과 절충을 무시하며 소수를 배제하는 건 사이비 대의민주주의다. 대의기관이 대의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이 상황을 뭐라 해야 하나. 22대 총선에서 야당은 182석의 다수가 되었지만, 여야 간의 지역구와 비례대표 득표율은 큰 차이가 없었다. 주권자가 디자인한 이 숫자 사이의 숨은 함수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으면 법치도 작동할 수 없다.

그뿐인가. 우리 헌법은 사회의 다양성을 포용하지만 평등 아래 자유를 희생시키거나 참여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의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대의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극복하는 것이 참여민주주의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국정에 대한 투입(Input)이 최대한 보장된다 하더라도, 헌법의 근본 이념과 기본 원리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된다. 때문에 합법과 민주주의로 포장한 극단적 열성 지지자들로 인한 민주주의 훼손은 허용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상호 관용과 자제라는 두 규범적 가치를 필수 요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개헌이 언급되고 있다. 이즈음 헌정 현실의 모든 모순과 폐단이 헌법에 기인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물론 우리 헌법이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백 년의 헌법 역사를 가진 나라들이 제도와 운영의 정합성을 찾아왔던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제도보다 운영의 문제가 컸다. 그래서 헌법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운영을 위한 보완적 개헌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국가 운영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제어 장치의 도입이나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 폐지, 심지어 공직자에게는 유죄추정 원칙을 더 엄격히 적용하는 선진국의 예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또 헌법 재정 조항에 국가 부채 한계를 정해둔 나라들처럼, 우리 헌법에도 재정준칙 규정을 신설해서 퍼주기 포퓰리즘 정책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그들만의 정쟁으로 국민을 잊은 국회가 국민을 위한 정부의 중요 정책을 발목 잡지 않도록, 국민 생활에 직접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 정책은 대통령이 국민투표에 부쳐서 국민의 뜻으로 시행될 수 있게 하는 개헌 방안도 생각해 볼 만하다.

주권자가 선출해 준 현재의 권력들이 헌법을 정면으로 파괴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살펴보면 주권자인 우리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헌법의 지표가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소위 두더지식 헌법 파괴라 할 만하다. 선출된 권력이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이렇게 반헌법적인 정치 행태를 계속한다면, 주권자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대한민국 주권자의 모습에 제76회 제헌절의 비애가 스며 있다. 퇴색된 제헌절의 의미를 누가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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