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우리의 언어는 너무 비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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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공동연구원

미투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해서는 안된다는 합의에 애써 도달했다. 이는 그간 성폭력 문제에 힘써온 개인과 운동이 이루어낸 성과다. 성폭력은 한 사람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상대를 사람이 아닌 물건 취급하는 대상화를 수반하고, 거기에는 어떤 여성들을 내 성욕 처리의 대상으로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남성중심적 교만이 깔려 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미투 운동 이전에는 짐짓 그래도 되는 일로 치부되었던 사실이다. 어떤 운동이든지 그 운동이 있기 전 사회는 그럼 어떠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 전 시절의 언어란 어째서 그렇게 비좁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

성폭력 가해자 관련 연구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천편일률적이다. 왠지 남자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아서, 혹은 이 여자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해자의 행동과 사고 패턴이 똑같다는 것이야말로,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속에 작동하는 남성성의 문제라는 증거다. 즉 성폭력 가해는 특정 사이코패스나 변태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남성성의 각본을 당연히 여기는 이를 통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성폭력을 특정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폭력이 해서는 안되는 일로 널리 알려진 후부터,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손절’이 상식처럼 자리잡고 있다. ‘손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폭력은 절대 안된다는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오는 한편, 그것이 늘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손절’은 행형의 이념에도, 사회를 바꿀 변혁적 사법과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성폭력 가해에 대한 단죄와 처벌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선 피해자가 해원되고, 다음으로 가해자의 진정한 반성과 교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양자 모두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성폭력을 남성성 권력이 아니라 가해자 개인의 일탈로 보는 것은, 지난날 페미니스트들이 누구보다 앞서 거부해온 일이다.

최근 고인이 된 성폭력 가해자를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다. 성폭력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추모할 수 없다는 것과, 아무리 죄인이어도 그 죽음을 추모할 수는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팽팽하다. 한 사람의 궂긴 소식을 추모할 때 그 사람이 생전에 벌인 궂은 일은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히 가해 사실의 삭제로 이어지기 쉽다. 일본의 경우가 그렇듯이 있는 가해 사실을 삭제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 이 문제의 해답은 피해자의 해원을 위해 고인의 가해 사실을 명백히 밝히는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사회적 경험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런 방식의 추모를 경험해온 일이 잘 없다. 그런 걸 보면 지금도 우리의 언어는 참으로 비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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