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소주병
공광규(1960~ )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시집 〈소주병〉(2004) 중에서
사랑은 희생이다. 자기 생명과 정수(精髓)를 새끼들에게 차곡차곡 넘겨주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은 점차 ‘비어가는’ 것, 날로 ‘쪼그려’ 드는 것. 가벼워지고 작아지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과업을 무사히 달성해 냈다는 표지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흙냄새, 술 냄새 속에 단단한 허벅지와 팔뚝으로 나를 들어 올리셨다. 꽉 차 있었다. 나이 들어 방 아랫목에만 계시게 되었을 때는 홀쪽한 볼에 끊기지 않는 기침으로 힘들어했다. 바람 같았다.
아버지는 그때 무슨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다보았을까?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지만 알 것도 같아라, 이미 저버린 생애의 슬픔을 저렇게 ‘빈 소주병이 내는 소리’처럼 안으로 울고 있었을 것임을! 세상의 아버지들은 비어서 비로소 처연한 울림통의 악기가 된다. 김경복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