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푸른곰팡이 - 산책시
이문재(1959~ )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올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시간도 익는다. 풋풋한 영혼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향기를 내뿜기 위해서는 ‘발효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것도 사랑의 감정을 지닌 채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는 단련과 숙성의 시간을 보낼 때, 사랑의 효모들은 시간 속에 녹아들어 그윽한 향기로 익고 영롱한 색채로 우러난다.
연분의 시간이 무르익음을 확신한다면 어디에 있은들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지 못할까? 인연이 다하게 되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소중한 것 가운데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시간이 주는 세례를 참지 못하거나 믿지 못해서다. 시간이 세계를 익게 하여 시간마저 요요(夭夭)히 향기로워지는 순간, 그때서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존재 전환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 일상에서 존재 전환의 이 황홀경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산책’이다. 산책은 시간의 효모들을 발효시켜 존재를 승화하는 작업이다. 김경복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