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여자는 애 낳는 기계가 아니야!
김효정 젠더데스크
편견 없는 단어 쓰기 실천 중
‘저출산’ 아니라 ‘저출생’ 사용
여성 조기입학·괄약근 운동 등
황당한 저출생 대책 어이없어
생식·생물학적 관점 탈피하고
아이 낳을 세상인지 따져봐야
여성에 대한 편견, 소수자에 대한 차별, 성·인권 범죄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고 올바른 관점으로 신문을 만들겠다며 시작한 부산일보 젠더데스크가 어느새 4년을 맞았다. 단어 하나에도 신경 쓰며 매일 신문을 만들지만, 아쉬운 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문이 인쇄되기 직전까지 문제있는 문장이나 단어가 발견되면 수정하고 있다. 일명 ‘가치중립적 단어 쓰기’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유모차’는 육아를 마치 여성(엄마)의 몫으로만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기에 이제 ‘유모차’ 대신 이젠 ‘유아차’라는 단어로 바꾸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가치중립적 단어 쓰기를 진행하며 고민되는 점이 있다. ‘저출산’과 ‘저출생’이다. 다들 알고 있듯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최저 출산율 국가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4분기 합계출산율은 사상 처음으로 0.6명대로 떨어졌다. 몇 년간 몇 백 조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자했지만,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관련 뉴스가 자주 나올 수밖에 없다.
가치중립적 단어 쓰기에선 ‘저출산’은 사용하지 않아야 할 단어로 지적된다. ‘저출산’은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는다는 뜻으로 마치 여성에게 책임을 돌리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저출산’ 대신 아이가 적게 태어나는 현상만 뜻하는 ‘저출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핵심부서 이름은 여전히 저출산고령화대책위원회이다. 이들이 발표하는 정책 이름도 저출산으로 시작된다. 결국 기사를 쓸 때 저출산 대신 저출생으로 쓰자고 했지만, 부서나 정책 고유명사를 살리면 ‘저출산고령화대책위원회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 저출산대책을 발표했다’는 애매한 문장이 돼 버린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최근 공적 기관들의 황당무계한 저출생 대책을 보며 이들은 ‘저출산’과 ‘저출생’의 차이조차 알지 못하는 수준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많은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황당한 저출생 대책을 보자. 먼저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재정포럼은 인구 비중 감소에 대한 대책으로 “남성의 발달 정도가 여성 발달 정도보다 느리다는 점을 고려해 여성들을 1년 조기 입학시키면 향후 적령기 남녀가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여성을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도구로 보는 관점이자 국책연구기관이 대놓고 남자는 발달 속도가 느리다며 남혐을 조장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위원회는 지역 순회 간담회에서 인천시를 찾아 “무료로 미혼남녀 만남을 많이 지원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만날 기회가 없어서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일까. 핸드폰만 켜면 데이팅앱을 통해 즉석 만남이 가능하고 밴드와 인터넷 동호회에서 취미·관심이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대이다. 남녀를 만나게만 해주면 결혼해서 금방 애를 낳을 것이라는 철없는 기대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서울시가 추진하는 정관·난관 복원 수술 지원도 그렇다. 애를 낳지 않으려고 굳이 수술했는데 애를 낳을 수 있도록 수술해주면 애가 많이 태어날 것이라는 정책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서울시 한 의원은 ‘괄약근을 조이는 케겔 운동으로 자궁이 건강해지면 저출생을 극복할 수 있다’며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저출생 같은 복잡미묘한 사회 문제를 괄약근 운동으로 해석하는 논리는 마치 ‘여성은 애 낳는 자궁 기계’로 보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다.
괄약근을 조여도, 정관을 풀어도, 남녀 만남을 주선해도, 여성을 1년 먼저 입학시켜도 저출생은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이미 비슷한 정책으로 실패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2016년 행정차지부는 자치단체별 가임기 여성의 수를 공개하고 줄을 세운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발표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2017년에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여성의 고학력과 소득수준 상승이 저출생 현상을 심화시킨다며 불필요한 스펙 쌓기를 방지해 하향 결혼이 가능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쏟아지는 비판에 선임연구원은 보직 사퇴했고, 연구원장은 공식 사과글을 올렸다. 당시 화가 난 여성들은 항의 시위에 나섰다. “내 몸이다 이것들아 얻다대고 낳으라 마라야” “우량암소 통계내냐 출산지도 웬말이냐” “여성은 아기공장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7~8년이 지났지만, 정책은 나아진 것이 없다. 당시 항의 시위 문구 중 “여성인권 없는 나라 비출산으로 망해라”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저출생이 심각해진 건 여성이 똑똑해져서도, 남녀가 만나지 못해서도, 자궁이 튼튼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과연 아이를 낳고 키울 만한 좋은 환경인지 확신하지 못해서다. 여성인권, 육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내놓는 것이 저출생 문제를 푸는 첫걸음이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