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치솟는 물가, 위태로운 국민 삶
물가 안정은 국민이 정부에 부여한 제1의 책무다
사과 1알 1만 원! 좀체 믿기지 않던 이 가격이 이젠 ‘가능한’ 현실이 됐다. 도매가격으로도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후지 사과 10kg 도매가격이 9만 원을 훌쩍 넘은 것이다. 정부는 지난달 초만 해도 설 명절에 따른 수요 급증 탓이라며 설이 지나면 가격이 안정세를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전망은 틀렸다.
■사과만이 아니다
다른 과일 가격도 무섭게 치솟고 있다. 지난달 복숭아 가격 상승률이 역대 최고를 기록했고, 배는 외환위기 이후 최고 상승률을 보였다. 귤, 딸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과일 전체로 따지면, 지난달 상승률이 40.6%로 1991년 9월(43.7%)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채소 가격도 연달아 올랐다. 부추와 배추, 상추, 파 등의 가격이 전년 대비 못 해도 2배 이상 올랐다. 수산물 가격도 심상치 않다. 마른 김이 1년 만에 40% 가까이 뛰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오징어, 냉동 고등어, 북어 등 서민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수산물의 가격이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형편이니 전체 물가가 요동칠 수밖에 없다. 올해 1월 2%대로 떨어졌던 소비자물가가 지난달 3% 넘게 올랐다. 앞으로가 더 불안하다. 정부는 연간 목표치 2.6%를 제시했지만 지금 추세라면 불가능한 수치다. 국민은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의 77%는 향후 물가가 현재보다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물가 잡기 총력전?
“세븐일레븐, 대규모 물가 안정 ‘갓성비’ 행사 진행!” “농협, 대국민 물가 안정 단독 기획전 개최.” “CJ제일제당, 밀가루 제품 가격 인하!” 국내 유통·식품업체들이 잇따라 물가 부담 낮추기에 나섰다는 보도가 신문 지면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여기엔 배경이 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비상경제장관회의를 통해 ‘현장 중심의 범부처 특별물가안정체계’를 출범시켰다. 모든 부처 차관이 물가안정책임관이 돼 품목별 물가 대응방안을 마련한다는 게 요지다. 이후 전에 못 보던 장면들이 나타났다. 기획재정부 차관이 대형마트를 찾고,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석유시장 점검 회의를 열고,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은 외식 관련 업체 관계자들을 만나는 게 그렇다.
실제로 한훈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은 지난 12일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농협 하나로마트, GS리테일 등 유통업체 임원들을 만난 데 이어, 13일에는 CJ제일제당, 오뚜기, 롯데웰푸드, 농심 등 19개 식품기업 대표들을 만나 물가 안정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 차관은 해당 업체들에 “가격 담합 시 조사에 착수하겠다”며 엄포도 놓았다. 지난 14일에는 김병환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농수산물 도매시장을 방문해 “유통비용 절감을 통해 물가 안정에 동참해 달라”고 촉구했다.
정부는 대대적인 돈 풀기에도 나섰다. 11조 원 규모의 예산을 올해 상반기 중 투입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과일 등 농축산물 관련 대책이 가장 구체적인데, 정부가 지난 15일까지 밝힌 지원 규모는 유통업체 납품 단가 지원에서 직접적인 할인 판매 지원까지 무려 1600억 원이 넘는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인데, 향후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즉흥적인 땜질식 처방
이처럼 정부가 하루가 멀다 하고 물가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예산만 축낸다는 목소리가 크다. 정부의 물가 대책이 즉흥적이고 다분히 땜질식이라는 인상이 짙다는 비판이다. 물가 폭등의 원인을 정부 스스로가 아닌 기업 등 외부에서만 찾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지금 물가 폭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과 가격 관련 대응이 좋은 예다. 정부는 유통단계 관리에만 치중할 뿐 근본 원인인 생산과 공급 측면에선 확실한 대처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대적인 지원 정책을 발표하지만 이는 물가를 잡는 게 아니라 가격 인상분을 국민 세금으로 대신 지불하는 것일 따름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돈을 쏟아부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전문가들은 이상기후와 재배면적 축소에 따른 공급량 급감 대응책을 시급히 마련할 것을 주문한다.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공급을 늘려야 하고, 이를 위해선 안정적인 생산 기반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안정적 생산 기반 마련은 다른 게 아니다. 새로운 재배 농가에 대한 지원책 등 장기 대책을 마련하고, 저비용 고효율 생산을 위한 재배법과 품종 개발에 대한 연구에도 박차를 가하는 한편, 관세 등 수입 문턱을 낮추는 등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근본적 성찰의 필요성
우리나라는 식량 자급률이 낮고 에너지 대외 의존도가 높다. 이상기후나 전쟁 등 외부 충격에 따른 물가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대응 시스템은 현저히 미흡하다. 독과점식 시장 구조가 강한 탓에 물가가 오를 땐 쉽게 오르지만 일단 오르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우리나라의 특징이다. 정부가 효율적인 물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선 이런 물가구조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다.
정부가 다른 품목보다 좀 더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공공요금 관리도 물가 대책의 핵심 포인트 중 하나다. 정부가 지금은 과일 등 생활물가에 치중하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근래 물가 폭등의 주범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무분별한 공공요금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내외적 요인으로 물가가 인상 압박을 받으면 통상적으로 공공요금 안정을 통해 물가 압박을 낮춰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근래 전방위적으로 공공요금 인상을 주도했다. 그 결과 버스비 등 교통 요금은 물론이고 전기료, 난방비, 수도요금까지 급등했다. 인상이 불가피했다손 치더라도 그 시기와 속도, 강도가 문제였다. 실제 지난 1년간 공공요금 상승률은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크게 웃돌았다. 고물가 국면에서 단기간에 공공요금 전반을 인상해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전적으로 정부 책임
근래 물가 폭등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에 석유·가스 등 에너지 가격 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를 잡아야 하는 정부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조삼모사식 대책으론 작금의 물가 폭등을 진정시킬 수 없다. 근본 성찰을 통한 중장기 대책이 있어야 가능하다.
정부는 물가 폭등의 원인을 기업 등 외부에서 찾으며 감시와 단속, 대대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그렇게 하는 건 일시적인 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일각에선 정부의 이런 행보가 오는 총선을 겨냥한 ‘단기적인 보여주기 행정’이라는 의심의 시선을 보낸다. 그동안 정부에 의해 억눌렸던 물가 상승 요인들이 총선 후 한꺼번에 폭발할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8일 “정부는 장바구니 물가를 내릴 수 있도록 농산물을 중심으로 특단의 조치를 즉각 실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 시점에서 특단의 조치는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특단’보다 ‘근본’ 대책과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이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대선후보 당시 ‘물가 상승은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취지로 언급한 바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방법이 없다”거나 “할 만큼 하고 있다”는 건 정부가 할 소리가 아니다. 국민은 지금 당장 죽을 판이다. 물가를 잡지 못하면 그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