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알8봉 3일에 뽀개기] 무모한 도전 나섰다가 산 앞에 겸손해지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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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차 고헌산
미친 듯이 올랐다가 현타 온 사연

영알8봉 고헌산 정상 파노라마. 영알8봉 고헌산 정상 파노라마.

"메달이 크고 좋더라. 순은이라 카데." "어머니가 가고 싶어 하셔서 같이 오르고 있어요." 장안의 화제 영남알프스 8봉 챌린지 이야기다. 울산 울주군이 주관하는 '영남알프스 완등 도전'이 산꾼뿐만 아니라 산행 초보자에게도 도전 정신을 불어넣고 있었다. 가까운 부산에 살아서, 고향이 밀양이라서 어릴 적부터 영남알프스 곳곳을 찾아다녀 새롭지 않은 데다가, 수년 전 낙동정맥을 하면서 또 여기 산줄기를 탔기에 이 이상한 이벤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처음엔.


이벤트 첫 해 '울주 9봉'이라 명명한 이 챌린지에 내친김에 동참한다고 서너 봉우리를 올랐다가 완등은 하지 못했다. 12월 말일 쯤인가 '아직 기회가 남았습니다. 나머지 산을 오르고 인증사진을 보내주세요'라는 SNS를 받았지만, 끝내 달성하지 못했다. 그때도 은메달을 줬는데 제법 묵직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해를 거듭하더니, 모바일 기기의 앱을 이용해 정상에서 요상한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되고, 정상 근처만 가도 인증된다기에 다시 휴대전화에 앱을 깔았다. 울주9봉은 주변 지자체의 건의가 있었던지 어느새 영남알프스 완등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래도 여전히 주최는 울주군.


영남알프스 완등 앱 홍보 플래카드. 영남알프스 완등 앱 홍보 플래카드.

어느 해에는 기념 메달이 인기가 많아 준비했던 물량이 동이 나 완등을 한 이들이 제때 받지 못하자 원성이 있었다. 올해부터는 선착순 3만 명에게만 지급하는 기념품. 8년 동안 매해 다른 산의 메달을 만들어 지급한다니 작년에 달성한 사람을 올해 또 부르는 효과는 있다. 잘 만든 앱이 지자체엔 효자가 된 셈. 소문이 전국적으로 나자 이런 챌린지 행사를 벤치마킹 하려는 지자체도 있는 모양이다.

'해마다 다른 8개의 메달'은 산꾼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급기야 올 초 문제가 발생했다. 9봉 중 하나인 문복산은 봄철 산불조심기간 인증과 관련해 가급적 5월 이후 산행을 권장했으나 오히려 1월 등산객이 급증했다고 한다. 1월 1일 방문객만 2434명이라니.

급기야 울주군은 문복산을 제외하는 결단을 내렸다. 메달도 8개로 줄었다. 문복산을 제외한 것은 최단 코스의 하나인 경주 산내면 대현리 주민들의 소음·주차 민원도 한몫했다. 우여곡절 끝에 8봉으로 줄었지만, 영알8봉 완등 도전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최근 만난 한 산악회 회원들은 아예 올해 첫 산행의 목표지를 영남알프스로 정하고 4월도 되기 전에 벌써 완등을 마쳤다는 것.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메달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고, 또 하나 사람들은 어떻게 영알8봉을 오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펀부산 '산&길' 콘텐츠도 마련할 겸, 영알8봉을 완등하고 싶으나 아직 시작하지 않은 사람의 길잡이 역할도 할 겸, ‘8봉 뽀개기’를 시작했다. 취재를 준비하다 보니 살짝 마음이 급해져 '1일 3산 등정만 인증'이라는 울주군의 완등 원칙에 따라 1일 차 3개 산, 2일 차 3개 산, 3일 차 2개 산을 오르기로 했다.

물론 연달아 3일 만에 오른 것은 아니다. 메달이 꼭 필요한 사람이거나, 도전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면 3일의 연휴나 휴가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실제 수도권의 산악인들은 그렇게 하기도 한단다. 또 어떤 곳은 관광회사에서 영알 메달 획득 산행팀을 모집하는 '메달 산행 상품'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서설이 길었다. 이제 산으로 가자. 이번 취재는 자가용으로 가서 원점회귀 산행 코스를 잡았다. 아무래도 대중교통은 택시 말고는 어렵기에 자기 차로 가서 등정을 마치고 차량을 회수하기 편한 코스를 잡았다.

1일 차/ 고헌산, 천황산, 재약산

2일 차/ 영축산, 신불산, 간월산

3일 차/가지산, 운문산

순전히 기자가 몇 차례 영남알프스를 다녀본 경험을 바탕으로 잡은 코스다. 영남알프스 관련 저술을 한 황계복 부산시민등산아카데미 강사에게 코스 자문을 요청했더니 잘 마련했다면서도 가지산 운문산을 한 데 묶은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우려를 표했다.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취재기는 산행 별로 나눠 소개한다. 이번에 소개할 코스는 1일 차 제1봉 고헌산 코스다.


영알8봉 고헌산 정상석. 이 비석이 많은 이들의 사진에 반드시 남는다. 영알8봉 고헌산 정상석. 이 비석이 많은 이들의 사진에 반드시 남는다.

고헌산에 성큼 올랐다

고헌산은 와항재에서 많이 오른다. 영알8봉 완등 도전! 산행 이벤트 이후 가장 많은 검색어가 아마 '최단 코스'가 아닐까? 고헌산 최단코스와 연관된 검색 결과는 대체로 와항재에서 오르라고 돼 있다. 그렇지만 와항재는 경주 경계 쪽인 소호리에 있어 부산에서는 궁근정리에 있는 고헌사로 가는 것이 오히려 최단 코스다.

몇 차례 지도를 펼쳐 놓고 검색을 한 끝에 고헌사~고헌산 정상~고헌사 원점회귀 코스를 택했다. 어차피 최단 코스라면 같던 길을 되돌아오더라도 무슨 상관이랴. 시인도 '올라갈 때 못 본 꽃, 내려올 때 보았네'라고 노래하지 않았나.

궁근정리는 고즈넉했다. 언양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작은 공장과 전원주택도 많이 들어와 있다. 고헌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등산로 입구 안내판을 따라 오른다. 오후에 비 예보가 있어 마음이 살짝 급했다.

등산로 입구에 '영남알프스 정상 인증은 어플로 간단하게 하자'라는 플래카드가 있다. 그 위에 누군가 매직 글씨로 정상 2.5km(1시간 30분)라고 써 놓았다. 가지산이나 운문산을 천황·재약산과 짝지어도 되지만, 굳이 고헌산을 묶은 것은 부산에서 접근하는 동선을 고려해서이다. 나중에 고헌산을 다른 산과 묶으면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누군가의 매직 글씨는 정보가 달랐다. 기자의 핸드폰에 있는 등산GPS 앱으로 하산 편도 기록만 쟀더니 이동거리는 고작 1.66km였다. 하산 시간도 43분. 거리는 왕복으로 해도 3.32km다. 올라갈 때 기록을 체크했다. 올라갈 때는 1시간 3분이 걸렸다. 완만한 오름길이 한 번 정도 있었고 내내 오르막이었는데 이런 기록이 나오다니 신기하다.

이유가 있었다. 조급했다. 올라갈 때 비슷하게 출발했던 부부 산꾼을 중간쯤에 추월했고, 정상에서 인증샷을 찍고 내려올 때 만났으니 설쳐도 너무 설친 것이다.

오후 5시부터 비가 온다고 돼 있었고, 애초 하루 3산을 오를 계획을 세웠으니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진 것이다. 처음엔 백두대간 종주로 단련돼 등산 실력이 좋아진 것으로 착각했는데 아니었다. 산행 후유증으로 허벅지 통증이 3일이나 지속됐으니깐.


고헌산에서 만난 야생화 큰으아리꽃. 고헌산에서 만난 야생화 큰으아리꽃.

그래도 산은 산이다

등산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울창한 숲이 시작된다. 활엽수인 굴참나무와 침엽수인 소나무가 잘 어울려 있는 숲이다. 하늘이 좀 어두웠는데, 어느새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린다. 고헌사 주차장에 막 도착하자 출발하던 부부 산꾼의 인기척이 들린다. 산행하면서, 추월당한 적은 있어도 추월한 적은 극히 드문데 걸음이 좀 빨랐던 모양이다. 앞서가던 분들이 자리를 내준다. 더 빨리 오른다.

큰으아리꽃(시계꽃) 한 떨기가 피어 있다. 원래 덩굴로 자라는 식물인데 꽃 한 송이만 피었으니 예쁘기도 하지만, 애처롭다. 더구나 등산로 한 가운데 피어 있어 그 운명을 보장할 수 없다. 고헌산은 산행 코스가 짧아 단독으로는 잘 오르지 않는 산이다. 낙동정맥 종주를 하는 사람은 필수 코스이지만, 고헌사에서 오르는 산객은 많지 않았는데 이번에 보니 등산로도 많이 패여 있었다. 영알8봉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겠다.

1시간 남짓 끝없이 오르는 길이다. 기록을 보니 해발 374m에서 시작해 1026m까지 내리막 한 번 없이 오른다. 고헌산의 공식 해발 고도는 1034m이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두어 군데 경사가 다소 평탄한 길도 있다.

119가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해 출동할 수 있는 국가지점번호가 등산로 주요 지점마다 설치돼 혼자 산행해도 다소 안심이 된다. 1000고지 산의 위용은 역시 대단했다. 오를수록 식생의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 출발지점은 신록이 우거진 초여름이었는데, 정상에 다가갈수록 초봄 분위기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작은 동물이 있다. 다람쥐인가 봤더니 쥐같이 생겼다. '땅굴쥐'인지 주변에 작은 굴들이 널려 있다. 연분홍 산철쭉이 활짝 피었다가 통꽃이 떨어졌다. 사뿐히 즈려밟고 오른다. 아직 잎이 작은 참나무 군락 아래 사초가 모를 심은 듯 푸르다. 눈의 시원해지는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떡갈나무 새잎이 아기손 마냥 앙증맞다. 추운지 솜털이 보슬보슬 살아있다. 문득 고개 드니 잘생긴 돌탑이다. 어느새 고헌산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푸른 사초 군락이 펼쳐졌다. 모를 낸 논 같았다. 정상에 가까워지자 푸른 사초 군락이 펼쳐졌다. 모를 낸 논 같았다.

'올라갈 때 못 본 꽃'

평일 오전인 데도 두어 사람이 이미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있다. 한 사람은 외항재에서 오른 모양이다. 고헌산을 마지막으로 8봉을 다 마친 사람이 있었다. '이제 첫 봉인데 벌써 8봉을 마쳤다니…' 살짝 걱정했다. 메달이 동나면 어떡하냐고.

한 분은 아직 3봉이 남았다고 했다. 앱을 작동시켜 셀카를 찍었다. 인증사진 안 찍느냐고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건네 사진 좀 찍어주십사 부탁했다. 인증사진을 이미 혼자 찍었기에 굳이 앱은 작동할 필요가 없어 껐는데, 왜 인증을 안 받느냐며 의아해하면서 멋진 정상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거듭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직 2봉이 남았기에 마음이 급했다. 또 저기서 정상을 향해 오는 팀들이 있다. 고헌산 360도 파노라마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서둘러 하산한다.

그런데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들었다. 늦게 도착한 팀이 먼저 와 있던 다른 이에게 인증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사람의 답은 "저 바로 내려가 봐야 해서 죄송하지만, 못 찍어 드려요"였다.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떠난 터라 뜨금했다. 다행히 그분은 재차 부탁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 주고 있었다.

쫓기듯 정상에서 내려오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든다. 도심의 찌든 삶을 떨쳐버리고, 대자연의 품에서 느긋하게 힐링해야 하는데, 그놈의 완등 인증에 붙잡혀 안달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올라갈 때는 못 본 꽃 내려올 때는 보인다는데, 꽃은 안 보이고 홀딱벗고새(검은등뻐꾸기)의 조롱 같은 노랫소리만 메아리친다. '홀~딱~벗~고~~' 발가벗고 쫓기는 기분으로 1봉을 완등했다.



영알8봉 고헌산 등산로. 네이버지도 캡처 영알8봉 고헌산 등산로. 네이버지도 캡처

▲고헌산 산행 팁

와항재 코스도 원만하고 대형 버스도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어 많이 찾는다. 왕복 5km이고 2시간~2시간 30분이면 산행할 수 있다. 비 오는 날 가도 될 정도로 길이 평탄하다니 도전해 볼 만하다. 단, 비가 오면 진흙이 생기니 미끄러운 부분은 감수해야 한다.

하루 느긋하게 산행한다면 와항재로 올랐다가 삽재로 하산하거나, 반대로 해도 반나절 산행은 되니 오를 만하다. 고헌사 코스로 오르면 와항재로 하산할 경우 원점회귀가 힘들다. 차량 지원하는 이가 없다면 고헌사 코스는 단일 최단 코스로 만족해야 한다.

고헌산은 예로부터 언양의 진산이라고 한다.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최고의 산으로 인정받았다. 언양의 옛 지명이 헌양인데 고헌산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산이 높아 정상 조망이 무척 좋다. 가을이면 억새 군락도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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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상북면 궁근정리 고헌사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울주군 상북면 궁근정리 고헌사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등산로 입구 이정표를 따라 오른다. 첫 갈림길에서 우측을 선택해야 편하다. 등산로 입구 이정표를 따라 오른다. 첫 갈림길에서 우측을 선택해야 편하다.


등로 곳곳에 국가지정 이정표가 있어 안심이다. 등로 곳곳에 국가지정 이정표가 있어 안심이다.

오르다가 땅굴쥐를 보았다. 이런 굴이 인근에 즐비했다. 오르다가 땅굴쥐를 보았다. 이런 굴이 인근에 즐비했다.

산 아래쪽은 녹음이 짙다. 신록의 잔치가 시작됐다. 산 아래쪽은 녹음이 짙다. 신록의 잔치가 시작됐다.

산철쭉꽃을 즈려밟고 오른다. 정상 부근에는 이제 만개했다. 산철쭉꽃을 즈려밟고 오른다. 정상 부근에는 이제 만개했다.

고헌산 정상 부근에 이제 막 싹을 내민 떡갈나무. 새잎이 귀엽고 앙증맞다. 고헌산 정상 부근에 이제 막 싹을 내민 떡갈나무. 새잎이 귀엽고 앙증맞다.

고헌산 정상에 휘날리는 다녀간 이의 흔적들. 고헌산 정상에 휘날리는 다녀간 이의 흔적들.

내려오는 길에 만난 아름드리 나무. 내려오는 길에 만난 아름드리 나무.

하산 후 고헌사 산신각 앞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 산줄기. 멀리 신불산과 영축산 줄기가 보인다. 하산 후 고헌사 산신각 앞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 산줄기. 멀리 신불산과 영축산 줄기가 보인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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