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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그냥 쉬는’ 청년 세대
중국의 Z세대 뤄화중(駱華忠)은 초경쟁 사회에서 ‘번아웃’됐다고 느꼈다. 31세이던 2021년 4월 회사를 그만 두고 ‘탕핑’(躺平)주의 선언을 블로그에 올렸다. 탕핑은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신조어다. 뤄화중은 쓰촨(四川)성에서 티베트까지 2000㎞가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2년이 넘도록 직업이 없어 놀고 있지만 잘못됐다는 생각은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미국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탕핑이 정의다”(Lying flat is justice)라고 말한 뒤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탕핑족은 중국의 청년 세대에 주어진 극도의 경쟁 환경에 대한 반발감에서 생겨났다. ‘996’으로 대표되는 과로 사회를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중국 회사들은 법정 근무 시간을 어긴 채 오전 9시~오후 9시, 주 6일 근무제를 강요하는 게 예사다. 이런 가혹한 직장 문화와 함께 21%가 넘는 높은 청년 실업률이 젊은이들의 미래를 짓누르고 있다. 모진 사회경제적 조건이 강요되고 있으니 MZ세대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다. 성공에 대한 강박을 거부하고, 최소한의 안분지족, 즉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오는 것이다. 탕핑은 단순히 구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사회의 압박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발전했다.
졸업 후 취업을 통해 기성 사회로 편입되는 전통 경로를 벗어나는 현상은 중국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영미권의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일본의 ‘사토리 세대’(悟り世代)는 직장에서 희망을 추구하지 않는다. 한국의 ‘N포 세대’와 유사하다. 한데, 최근 고용 통계에서 청년 세대의 ‘쉬었음’ 비중이 역대 최고를 기록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취준’도 아닌 자발적인 ‘백수’ 상태의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사회 현상이다. 해석과 대책이 필요한 대목이다.
■ 쉬는 청년 46만 명 역대 최고 수준
통계청의 8월 고용동향을 보면 15~29세 청년의 ‘쉬었음’ 인구는 지난해 8월(40만 4000명) 대비 13.8% 늘어난 46만 명이다. 또래 인구 집단의 5.3%를 차지하는,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규모다. 직전 6월 42만 6000명, 7월 44만 3000명과 비교해도 확연한 증가 추세다. 2016년 8월 24만 5000명에 비하면 무려 87.8% 폭증했다. 이후 2017년 8월 29만 6000명, 2019년 37만 8000명 등 증가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는 비대면, 휴업이 늘면서 비정상적인 폭증이 있었다. 2020년 8월 46만 7000명, 2021년 44만 5000명. 팬데믹 종료 후 ‘그냥 쉬는’ 청년 인구는 원상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내 반등세로 돌아서 역대 최고치 수준을 기록한 것은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통계청 고용 조사의 ‘쉬었음’ 항목은 질병이나 장애가 아닌 이유로 구직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쉬는 경우다. ‘쉬었음’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돼 실업률 통계에서 빠진다. 실업자로 분류되면 구직 활동을 하는 경우지만 ‘쉬었음’ 청년은 취준생조차 아닌 상황을 의미한다.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구직을 단념하고 고용시장 밖으로 이탈하려는 추세가 강화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8월 청년 고용률은 46.7%로 역대 최고치였다. 청년층 고용지표는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실상은 플랫폼 고용이나 단순 노무직 증가가 두드러진 결과다. 양질의 일자리가 늘었다고 보기 어렵고, 일자리 미스매치와 고용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그냥 쉰다’는 청년 증가세를 허투루 봐서는 안 된다.
■ ‘그냥 쉬는’ 세대 이해하기
영미권에서 Z세대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의미로 ‘눈송이’(snowflake)란 속어가 쓰인다. 회사에서 불평만 터뜨리는 젊은 세대가 눈송이처럼 연약하고 쉽게 바스러진다는 뜻이다. 나약하고, 예민하고 한심한 존재라는 의미의 비아냥이다. <꼰대들은 우리를 눈송이라고 부른다>의 저자 해나 주얼 미국 워싱턴포스트 비디오저널리스트는 눈송이 세대가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부당한 지시에 항의하고,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하고,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주저 없이 사표를 던진다.
직업에 대한 가치관이 기성세대와 현저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 2일 지역노동사회연구소 주최 ‘지역 청년 일자리 및 유출 현황과 과제’ 세미나에서 2030세대 815명 중 51.5%가 ‘프리터’(freeter)가 될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설문 조사가 발표됐다. 프리터는 고정된 직장을 갖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면서 생계를 잇는 사람을 말한다. 학업과 취업의 과도한 경쟁주의에 대한 저항감이 위험 수위에 다다른 결과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라이프 사이클에서 젊은 세대의 이탈이 시작됐다고 봐야 된다.
■ 변화 받아들이고 사회도 바뀌어야
탕핑의 기수 뤄화중은 기성세대가 정해 놓은 규칙을 박차고 나가자고 선언했다. 아마도 그전에 무수히 많은 문제 제기를 했으나 기성세대는 귀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대한 절망이 결국 사회 밖으로의 탈주로 나타났으리라.
뤄화중이 비판하는 ‘숨막히는 경쟁과 위계 사회’에서 한국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국 청년 세대의 ‘쉬었음’ 급증 현상을 한국판 탕핑으로 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이유다. 개인적인 나약함이나 부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규직, 대기업에 높은 임금이면 야근이나 주말 근무, 위계나 부당한 관행이 강요되는 직장 문화가 당연시되는 시절이 있었다. 지금 세대는 차라리 ‘쉬었음’을 선택한다. 학업을 마칠 때까지 수평적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기성세대에 거슬리는 언행을 할 가능성도 높다. 이들을 별종 인간으로 취급해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해결책에 다가갈 수 있다.
쉬는 청년들을 사회에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결책은 기성세대가 쥐고 있다. ‘눈송이’라고 비꼬거나 낙오자로 취급하는 대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요구를 들어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쉬었음’을 선택하면서 무언의 외침을 하고 있다. 이들을 고독과 은둔의 세상에 방치하면 세대 간 괴리가 커지고, 사회 불안 요인으로 이어진다.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걸린 문제다. 그들이 사회로 나올 수 있는 통로를 열어야 한다. 책임은 기성세대에 있다.
2024-10-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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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일궈온 ‘문화도시 영도’ 헛되게 하지 마라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2019년 부산 영도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제1차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됐다. 지난해 9월 7~10일 영도구는 전국문화도시 의장도시 자격으로 봉래동 물양장에서 ‘2023 전국문화도시 박람회 & 국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김기재 영도구청장은 “영도 문화도시 사업이 종료되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갈 조직과 공간 구축을 계획하고 있다”며 “이는 자발성에 기반한 문화도시 사업의 발전 가능성을 체감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영도구청은 내년부터 이 사업을 주관한 영도문화도시센터 예산을 편성하지 않겠다고 밝혀 ‘문화도시 영도 사업’이 종료 위기에 처했다. 만약 김 구청장이 언급한 조직과 공간이 혹여 ‘영도문화도시재단’ 설립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재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기에 문화도시 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문화 지속성의 관점에서 영도 문화도시 사업을 절대 일몰(종료)해서는 안 된다. 사업 종료만이 능사가 아니다.
■문화도시 영도 5년간의 성과
영도구는 법정문화도시에 선정되면서 2020년부터 5년간(내년 2월 종료) 총사업비 160억 원(실제 집행은 140억 8000여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이 예산은 국비 50%와 시비 및 구비 각각 25%로 구성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영도문화도시센터는 구민을 주요 문화 주체로 삼아 문화 자생력을 키우고, '예술과 도시의 섬, 영도'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고령화, 청년 감소, 환경오염 문제를 문화 프로젝트로 해결하고, 지역 이미지 개선을 위한 브랜딩 사업을 통해 주민들에게 영도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고자 했다.
지역 예술가들이 문화도시 사업을 계기로 협업하고, 어르신들은 산복도로, 깡깡이마을, 흰여울마을, 동삼동 등지에서 글쓰기, 그림 그리기, 도자기 만들기, 노래 부르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센터에서 주도한 각종 문화 사업은 지역 주민들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중요한 마중물이 됐다.
이전에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영도구 대평동 일대에 문화 예술을 입힌 깡깡이 예술마을 프로젝트 등 일련의 문화사업이 있었지만, 5년간의 법정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는 놀라웠다. 영도구의 특성을 살린 시각 브랜딩과 글자체(영도체) 개발로 국내 최초 세계디자인어워드 4관왕에 올랐고, 방문 예술활동·예술치유 공간 운영으로 외로움 완화에 기여해 문체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영도 기획자 학교를 운영하며 매년 30건 이상의 문화 창업 지원, 영도 문화유산 자료를 담은 아카이브 개설, 어린이 문화활동 거점 공간 조성, 깡깡이 예술마을 투어 프로그램 운영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3월에는 전국 24개 문화도시 중 ‘최우수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업을 주관한 영도문화도시센터에 대한 평가도 놀랍다. 첫해인 2020년 미흡(3등급)에서 2023년 최우수(1등급)로 평가가 상승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는 주요 도시 지표로도 확인됐다. 문화 분야 사업체 수와 거주 예술인 수가 크게 증가했으며, 2023년 부산사회조사에서는 구민의 문화여가시설 및 여가 활동 만족도가 원도심 중 1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많은 지역 주민이 “문화도시 사업 덕분에 영도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만족도가 높았다.
이처럼 문화도시 사업으로 지역 이미지를 향상하고 주민 삶을 개선하는 성과를 냈음에도 사업 종료 결정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사업은 종료하면서, 재단은 만들겠다고
지난달 20일 열린 ‘2024년 영도문화도시 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영도구는 문화도시 사업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추진위원들은 사업의 지속성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영도구는 “내년부터 정부 지원 예산이 없다. 문화도시 사업을 계속하려면 자체 예산을 투입해야 하지만 재정 여건 등의 현실적인 어려움이 일몰의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김태만 추진위원장은 “사전 논의 없이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전했다.
영도구는 연간 30억 원의 예산 중 7억 5000만 원을 분담해왔으나, 이마저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영도구의 재정자립도가 9.3%로 열악한 점은 이해할 수 있지만, 9개월 전에는 영도문화도시재단을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만큼, 단순히 예산 문제로 지원을 중단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도문화도시재단 설립의 취지는 좋지만, 초기 비용과 운영비가 더 많이 드는 재단 설립이 오히려 센터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한다. 이쯤 되면 구청의 예산난은 단순히 핑계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이 든다. 향후 재단을 설립하더라도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를 고려했을 때 영도문화도시센터는 지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재단으로 흡수·전환되는 게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문화는 지속성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문화도시 사업은 첫 5년이 끝난 후 지자체가 예산과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이를 알고 있는 영도구가 지난 5년간 후속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영도의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와 기여를 무시하는 것은 부당하다. 지역 주민과 문화 활동가들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역 문화 발전이 저해될 수 있다. 문화도시 사업이 종료되면 그동안 쌓아온 유·무형의 성과가 사라질 위험이 있다. 주민들과의 관계를 형성해온 만큼, 종료 결정은 지역 사회의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주민들은 사업 종료 소식에 반발하고 있다. 김지영 영도구 의원은 “문화도시 사업을 계속할 의지가 있다면 일몰을 선언할 것이 아니라 지방 소멸 대응 기금을 활용한다든지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 게 맞다”고 얘기한다. 부산문화재단과 부산시도 영도 문화도시 사업 활성화에 관심이 있어 얼마든지 연계도 가능하다.
■영도문화도시센터 가치 인정받아야
도시는 에너지가 넘칠 때 매력적이다. 도시는 사람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이에 부합하는 매력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도시의 고유한 역사와 환경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예술 콘텐츠를 생산할 때, 도시는 활력이 넘친다. 영도문화도시센터는 영도의 역사와 자연을 활용해 지속 가능한 문화유산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센터는 이를 통해 영도를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변화시켰다. 앞서 언급했던 성과가 이를 말해 준다.
영도 문화도시 사업은 전국적으로도 우수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주민 80%가 정책 지속을 원하고 있다. 김지영 의원은 이 사업이 영도와 같은 소멸 도시에서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업 진행 중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영도는 새로운 문화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 플랫폼과 인적 자원을 구축했다. 지난 5년간의 성과가 모두 사라질 경우, 문화정책의 특성상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지난 5년의 문화도시 사업으로 도시·문화적 자본이 축적됐다”며 “이 자본을 어떻게 활용할지 이제 고민할 때”라고 얘기한다.
문화 정책은 장기적 비전과 일관성이 필요하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주민과 문화 단체에 혼란을 주고 안정적인 문화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영도 문화도시 사업은 지역소멸 등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서도 지속되어야 한다. 센터는 영도 문화도시 사업을 지속가능하게 해 준 ‘중심 앵커’였다. 5년간 지역 문화에 기여한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전국적으로도 우수 사례로 손꼽히는 영도 문화도시 사업이 단지 재정적 이유로 중단된다면 이를 지속시키기 위한 재원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이를테면 지역 기업과의 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자금을 유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주민 참여 기금 조성이나, 영화 촬영 장소 제공과 같은 수익형 사업도 고민해 볼 수 있다.
국비 지원이 사라진 상황에서 영도문화도시가 어떻게 성과를 이어갈지 부산 시민들은 주시한다. 아직 여지는 있다. 일몰 결정이 나도 12월까지 예산을 수립하면 지속 가능하다.
그동안 영도구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만들어온 문화도시 사업의 성과가 이어지도록 영도구청의 정책 변화와 함께 예산 배정을 촉구한다. 문화는 도시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 주는 주요한 요소다. 또 도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활기차게 미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요한 매개체이자 가치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고 활기차게 하는 힘은 바로 문화에서 나온다. 영도구청의 사려 깊은 결정을 기다린다.
2024-10-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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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로또 당첨금 ‘얼마면 되니’
로또의 상징성은 ‘인생 역전’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비루한 일상과 불안한 미래를 한 방에 반전시킬 수 있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 로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로또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로또에 당첨됐는데 집 한 채도 살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다. 최근 1등 당첨자가 무더기로 쏟아져 당첨금이 3억 원 남짓에 불과하자 이게 무슨 ‘인생 대박’이냐는 볼멘소리까지 들린다. 결국 정부가 로또 당첨금 규모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에 나선다고 한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에 따르면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생각함 홈페이지를 통해 ‘로또복권 1등 당첨금 규모 변경,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는 제목의 설문조사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국내 로또 발생 초기 사행성 논란
로또(lotto)는 이탈리아어로 행운을 의미하는데 ‘제비뽑기’를 뜻하는 라틴어 롯(lot)에서 유래했다. 복권을 뜻하는 영어 로터리(lottery)도 이 말에서 나왔다. 1530년 이탈리아 제노바공화국에서는 90명의 정치가 중 추첨을 통해 5명의 대표의원을 선출했는데, 이를 본떠 피렌체 지방에서 90개의 숫자 중 5개를 추첨하는 ‘5/90 로또 게임’이 생겨났다. 당시 도시국가였던 피렌체는 공공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번호추첨식 복권인 ‘피렌체 로또’를 발생했는데 이게 근대적 의미의 복권 시초다.
우리나라에서 로또가 처음 발행된 것은 2002년 12월 2일의 일이다. 당시 로또 가격은 게임당 2000원이었다. 1등 평균 당첨금이 35억 원을 웃돌았고 무제한 이월 규정으로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수백억까지 손에 쥘 수 있었다. 2003년 4월 12일, 당첨금 이월로 1등 당첨자 한 명이 사상 최대인 407억 2000만 원을 차지하면서 그야말로 ‘로또 광풍’이 불었다. 정부는 사행성 논란이 거세지자 로또 당첨금 이월 횟수를 제한하고 2004년 8월 한 게임당 가격을 2000원에서 1000원으로 내렸다.
∎인생 역전 퇴색된 우리나라 로또
로또는 사실 정해진 확률 게임이다. 우리나라 ‘로또 6/45’는 1부터 45까지의 숫자 중 6개를 고르는 방식이다. 1등 당첨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이다. 1만 6000년 동안 빠지지 않고 매주 10장씩 구입해야 1등에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이다.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는데 내가 당첨될 확률이 거의 없지 거의 매회 당첨자는 나온다. 현재 로또는 회당 약 1억 1000만 건이 판매돼 1등 당첨자는 평균 12명, 1인당 1등 당첨 금액은 평균 21억 원 수준이다. 당첨자가 무더기로 나오면 당첨금은 크게 줄어든다. 7월 13일 제1228회에는 1등 당첨자가 무려 63명이 나왔다. 1등 당첨금은 4억 1993만 원(실수령액 3억 1435만 원)에 불과했다. 인생을 바꾸기에는 턱없는 수준이다. 로또 발행 20년 동안 3억 원이던 서울의 평균 집값은 13억 원으로 4배가량 뛰었다.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자산 가격은 크게 올랐는데 로또 당첨금은 제자리걸음이니 대박의 꿈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미국 로또인 파워볼의 경우 조 단위 당첨자 탄생으로 화제가 되곤 한다. 파워볼은 1부터 69가 적힌 흰색 공에서 5개, 1부터 26이 적힌 붉은색 공에서 1개를 선택하는데 이를 모두 맞히면 1등이다. 파워볼 잭팟 확률은 2억 9220만 1338분의 1이다. 우리 로또보다 36배나 어렵고 이월 제한이 없다 보니 당첨자 없이 상금이 이월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조 단위 당첨금도 가능하다. 결국 확률 게임이다.
∎ 명당론·번호 예측 과학적 근거 없다
로또 무더기 당첨이 나올 때마다 조작설이나 음모론이 확산하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다. 로또를 구입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굴절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위 ‘로또 명당’도 마찬가지다. 로또 추첨일이 가까워질수록 전국의 로또 명당에는 긴 줄이 이어진다. 그러나 로또 명당도 구매자 비율에 따른 상대적 확률일 뿐 크게 유의미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전국의 로또 명당을 표본 분석한 결과 전체 매출액과 당첨자 비율에 있어 일반적 로또 판매점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로또 명당 주인이 로또 맞았다는 말이 맞는 셈이다.
독특한 알고리즘으로 당첨번호를 맞출 수 있다며 로또 마니아들을 유혹하는 예측 업체도 마찬가지다. 2022년 6월 있었던 1019회차 로또 1등 당첨자 가운데 42명이 수동으로 번호를 맞췄는데 당첨번호 예측 업체에서 1등 당첨번호의 6개 숫자를 분석해 내놓은 번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출연 빈도를 이용한 로또 번호 예측은 이미 로또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상식이 된 이야기지만 이 또한 검증되지 않았다. 출현 횟수가 상위에 속하는 숫자와 그렇지 않은 숫자의 출현 빈도 차이가 유의미할 정도로 크지 않다. 로또 당첨번호는 애초에 정보가 없는 수열에 불과할 뿐이다.
∎당첨 확률 낮추거나 게임비를 올리거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복권 당첨금에 대한 여론 수렴에 들어간 만큼 어떤 방향으로 개편안이 나올지 주목된다. 로또 당첨금 개편은 당첨 확률을 낮추거나 게임비를 올리는 방안이 대안으로 이야기된다. 서울대 통계연구소는 1~45에서 6개의 번호를 고르는 것에서 1~70에서 6개의 번호를 고르는 것으로 바꾸면 1등 당첨 확률이 1억 3111만 5985분의 1로 약 16배 낮아져 당첨금이 높아지는 효과로 이어질 것이라 했다. 조세재정연구원은 게임당 가격을 1000원에서 2000원으로 상향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세금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3억 원까지 22%, 3억 원을 초과하면 33%의 세금을 부과하는데 이를 낮출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24% 세율로 원천 징수하고 추가로 주정부가 별도 세금을 가져간다. 반면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캐나다 호주 일본 등 국가에서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꿈에는 세금이 없다’는 말인데 로또 마니아들은 퇴색한 인생 역전의 의미를 보완할 현실적 대안으로 주장한다.
복권위는 다음 달 25일까지 설문조사 결과와 전문가 의견을 취합해 당첨구조를 손질한다는 계획이다. 기재부 내에서는 현 당첨금 수준이 적정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으로 알려져 개편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사행성 조장이나 근로 의욕 감퇴 등 부정적 여론도 부담이다. 하지만 로또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해 개편 목소리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로또는 사는 순간 절반을 손해 보는 게임이다. 이런 수학적 명징성에도 불구하고 로또의 효용 가치는 서민의 빈 주머니를 따뜻하게 해주는 소박한 환상에 있는지도 모른다. 로또의 효용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구조개편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2024-09-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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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쇠퇴의 길로 접어든 ‘전통 추석’
추석 명절이 낀 제법 긴 연휴가 지났다. 추석이 되면 으레 ‘민족 최대의 명절’, ‘오곡백과가 풍성한 한가위’ 같은 상투어가 등장하지만 요즘은 딱히 가슴에 와닿지 않는 느낌이다. 추석이 되어도 고향길 대신 개인 여행을 떠나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느는 추세다. 추석은 이제 ‘전통 명절’이라기 보다 사실상 ‘여행 또는 휴가철’로 더 효용 가치를 지니는 듯 여겨진다.
■ 갈수록 사라지는 명절 분위기
근래 수년간 전통 명절 추석의 퇴보는 두드러지고 있지만 올해의 경우 이런 경향은 더 짙어졌다. 특히 추석이 있는 9월 중순은 절기상 가을인데도 오히려 8월보다 더한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계절적으로도 과연 앞으로 전통적인 개념의 추석이 지속될 수 있을지 많은 사람이 의구심을 갖게 됐다. 더구나 폭염이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는 예측은 이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추석 아침에 차례를 올리는 경우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경제적 부담이 만만찮은 데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추석에 평소 잘 먹지도 않은 음식으로 차례를 올리는 것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젊은 층의 거부감은 훨씬 더하다. 그러니 아예 추석 당일 차례를 올리지 않는 게 큰 흐름으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봐도 작년까지는 차례를 올렸지만 올해부턴 이를 생략하는 집이 무척 많아졌다. 한국리서치가 추석을 앞두고 18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9%가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답했다. 다른 기관의 조사 결과도 거의 60% 정도로 이와 비슷했다.
대신 벌초나 성묘가 차례나 제사를 대체하는 분위기다. 대행업체에 맡기거나 아니면 친지나 가족들과 현장에서 만나 함께 벌초나 성묘를 하는 것으로 추석 행사를 갈음한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추석 차례 장면은 아마 쉽게 보기 어려운 모습이 될 것 같다.
■ 여행·휴가 등 개인 활동 더 선호
추석 때 흔히 언급되는 ‘민족 대이동’이라는 말도 그 의미가 변했다. 집을 나서는 사람들의 행선지는 이제 고향이 아닐 경우가 더 많다. 장년 이후의 세대라고 해도 지금의 고향은 더는 예전 어린 시절의 고향 모습이 아니다. 또 고향에 가더라도 뵐 수 있는 친지나 동네 어른들도 많이 없다. 젊은 층은 대체로 도시에서 태어나 고향이라는 의식 자체가 희미하다. 이런 고향을 굳이 도로가 북적이는 시기에 찾을 간절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도 이런 경향은 뚜렷하다. SK텔레콤이 AI 기반 설문 서비스인 ‘돈 버는 설문’을 통해 변화된 추석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를 지난 17일 공개했는데, 1021명의 응답자 중 추석 연휴에 고향이나 가족·친지 방문 계획이 있다고 답한 경우는 42.7%에 그쳤다. 나머지는 대부분 휴식이나 여행 등 개인 여가 활용을 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추석 문화 자체가 편의성 위주로 급변하는 모습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대세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차례나 고향·친지 방문 등 추석 명절을 상징하던 전통적인 관습이나 의례는 이제 추석의 주류가 아니다. 그런데 젊은 층은 물론 예전의 전통적인 추석 문화에 익숙한 장년층 이상 세대들도 이런 추세를 어색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달라진 사회경제적인 여건과 함께 변화하는 세태를 감안하면 전통적인 추석 풍습 등 문화를 이제 더는 고수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일부에선 여전히 이런 변화를 걱정하는 시각이 있기는 하다. 전통적인 추석의 본질은 외면하고 개인적인 편의성만 추구한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추석과 관련한 전통 풍습은 현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고, 점점 희미해지는 추석 명절의 분위기를 되살리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아무리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문화라고 해도 시대와 세태의 변화로 인한 영고성쇠는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4-09-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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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콘크리트 묘지? ‘장묘 문화’ 어디로…
10년 전쯤이었나. 전남 지역의 한 야산에 시멘트 묘지가 등장해 화제가 된 적 있다. 그런데 지금도 형태는 다르지만 콘크리트 묘지는 심심찮게 보인다. 고령화 사회가 깊어지고 벌초가 갈수록 힘들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장묘 문화 전환기의 상징적 모습,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까.
■ 관리 힘들어 시멘트로…
시멘트 묘지는 10여 년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장묘 양식이다. 2013년 전남 지역의 어느 문중에서 선산 묘지 일대를 시멘트로 두른 모습이 여러 매체에 뉴스로 보도된 바 있다. 멧돼지 등 산짐승으로부터 훼손을 막는다는 취지였다. 당시 봉분에 잔디를 심고 주변은 시멘트나 인조 잔디로 포장한 묘지가 적지 않았다. 또 다른 농촌 지역에서는 묘 주변 바닥을 시멘트로 덮은 뒤 초록색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봉분까지 아예 인조 잔디를 올리거나 페인트로 도색한 경우도 있었다.
시멘트 묘지의 등장은 묘지 관리의 어려움을 웅변하는 현상이다. 묘지 벌초가 고된 작업인 데다 멧돼지 등 산짐승에 의한 무덤 훼손도 심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매장보다는 화장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깔려 있다.
최근에는 또 다른 형태의 콘크리트 묘가 등장해 이목이 쏠렸다. 유골함을 땅에 묻은 평장묘인데, 묘 주변 바닥을 콘크리트로 타설하고 위에 쇄석(잘게 부순 돌)을 깔았다. 봉분도 없고 주변엔 잡초도 자라지 않아 묘역이 깔끔한 게 특징이다. 10여 년 전 시작된 시멘트 묘지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자 새롭게 나온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석재 업계에 따르면, 이런 형태는 어느 정도 대중화돼 있는 상태라고 한다.
■ “예의 아니다” “현실 수용을”
시멘트 묘지. 여기에 대해서는 “조상에 대한 예가 아니다” “관리 고충 생각하면 이해된다” 등 여러 견해들이 교차한다.
유림계는 당연히 콘크리트 타설을 반대한다. 흙은 뭇 생명을 품는 대지의 상징이다. 그래서 땅의 기운은 예로부터 신앙처럼 여겨졌다. 사람이 죽은 뒤에 흙에 묻히는 것도 본래의 자연으로 다시 돌아감을 의미한다. 묘지는 떠난 자와 남은 자를 잇는 역할을 한다. 조상의 묘를 섬기고 찾는 일의 소중한 뜻이 여기에 있다. 흙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 삭막한 시멘트 묘가 망혼에 대한 예의일 수 없다는 한탄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풍수지리 쪽에서도 시멘트가 지기(地氣)를 망쳐 후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본다.
하지만 묘지 관리가 쉬운 방식으로 세태가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농촌의 노령화, 벌초를 비롯한 선산 관리, 산짐승 출몰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다. 후손들은 대부분 외지에 있고 묘지를 지켜온 사람은 고령이 되어 간다. 관리가 지속되기 힘든 건 당연하다. 1년에 여러 차례 벌초를 해야 하는데 일꾼 구하기도 어렵다. 콘크리트 묘는 집안끼리 의논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상충된 입장과는 별개로 콘크리트 묘가 환경 훼손으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시멘트나 페인트·석재·인조 잔디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환경이나 미관 문제와 관련된 또 다른 갈등이 빚어질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 바람직한 장묘 문화는
묘지 관리 문제는 한국의 전통적 봉분 매장 중심의 장묘 문화에서 비롯한다. 변화하는 장묘 문화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예가 콘크리트 묘다. 전통적 가치는 지켜내고 싶은데 벌초는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 그 가운데 나타난 전환기의 장묘 방식이란 뜻이다.
지금은 화장 문화가 대세다. 전국 화장률은 지난해 기준으로 91.9%에 이른다. 장례 유형도 마찬가지다. 2023년 통계를 보면, 화장 후 봉안이 35.2%, 화장 후 자연장(수목·화초·잔디에 묻는 장례)이 33.2%, 화장 후 산분장(산·강·바다에 뿌리는 장례)이 22.6%, 매장이 8.5% 순이다. 매장 사례가 가장 적음을 알 수 있다.
장례와 장묘 문화는 앞으로 더 거센 변화의 바람을 맞을 것이다. 한때 매장 중심의 장례가 주류였다면 이제는 자연에 가까운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조상을 기리는 소중한 전통을 계승하되 후손들이 거부감 없이 흐름을 이어갈 방법은 없을까. 환경도 살리고 추모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문화의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이 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2024-09-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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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비엔날레 더부살이 이제 그만!
여전히 더부살이는 계속되고 있다. 부산비엔날레 얘기다. 지난 8월 16일 개막식과 함께 시작된 2024 부산비엔날레가 오는 10월 20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을 비롯해 부산근현대역사관, 한성1918, 초량재 등 지역 4곳의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다. 2002년부터 부산비엔날레라는 명칭을 사용한 이후,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는 단 한 번도 비엔날레 전용관을 보유한 적이 없다. 2002년부터 2016년까지는 부산시립미술관을 중심으로, 2018년부터 현재까지는 부산현대미술관 등에서 더부살이 전시를 하는 실정이다. 부산현대미술관을 지을 당시에는 비엔날레 전용관으로 활용될 예정이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부산현대미술관은 비엔날레 메인 전시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용관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부산비엔날레의 역사는 더부살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부산비엔날레조직위 사무실도 부산시청에서 동래구 사직동(아시아드주경기장 내), 그리고 동구 초량동으로 이전을 거듭하며 더부살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부산시가 퐁피두센터 분관 부산 유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지역 문화에 대한 중요성과 가치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거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새로운 것만 추구하거나 외국의 문화나 명성에만 기대는 것은 올바른 문화 행정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제 부산시는 부산비엔날레의 더부살이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좌표를 살피고 나아갈 길을 점검해야 한다.
■ 비엔날레 전용관 왜 필요한가
부산비엔날레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 미술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 행사는 국내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지역 문화 발전을 선도해 왔다. 특히 국제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양한 미술적 시도를 통해 지역의 문화적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광주비엔날레와 함께 국내 양대 비엔날레로 자리매김했다. 2022년에는 영국 현대미술 전문지 프리즈(Frieze)로부터 세계 10대 전시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다.
부산비엔날레는 그동안 부산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부산문화회관, F1963, 부산항 제1부두 등 지역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해 왔다. 이에 따라 시민들은 다양한 장소에서 세계 미술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관람객 입장에선 장소의 신선함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보다는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 예술가들은 매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불편함이 발생한다. 비엔날레의 일관된 정체성과 지속 가능한 운영이 어려울 수 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전용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비엔날레가 운영되다 보니 자칫 전문성이 축적되지 않고 휘발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관람객 입장에서도 매번 다른 장소에서 전시를 관람해야 해 일관된 예술적 경험을 얻기 어렵고, 교통 편의성 문제도 존재한다. 특히 비엔날레 주 전시장인 부산현대미술관은 접근성이 떨어지고 다른 전시 공간과의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비엔날레는 흥행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데 교통 불편과 흥행은 대척점이다. 관람객의 편의성, 흥행성을 기반으로 한 전용관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전용관의 파급 효과는
미술계에서는 비엔날레 전용관이 지역 문화와의 연계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 예술 작품을 통해 주민과의 소통을 증진하고, 지역 문화 자산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용관은 또 지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도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전용관을 통해 비엔날레 기간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작가 레지던시(창작 스튜디오), 작가 교류, 시민 소통 또는 교육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전용관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비엔날레 기간에 현대미술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산비엔날레의 일부 전시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면서, 미술관은 비엔날레 준비 기간을 포함해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5~6개월 비엔날레 측에 임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전용 공간 확보가 비엔날레 행사 운영의 안정성을 높이고,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전용관은 부산비엔날레의 정체성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비엔날레의 질적 향상을 가져올 수 있어서다. 전용관이 마련되면 상시적인 작업 공간이 확보돼 비엔날레 행사 때보다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일 수도 있다. 여하튼 전용관의 건립은 비엔날레의 안정적 운영 기반 조성, 세계적 수준의 부산비엔날레 이미지 구축, 전시행사 이외 다양한 비엔날레 행사 개최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부산비엔날레는 단순히 문화관광 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을 넘어, 이제는 문화예술 생태계의 발원지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행사 기간만 반짝하는 비엔날레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 국내외 전용관 활용 사례
성공적인 비엔날레들은 어떻게 전용 공간을 활용하고 있을까. 12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1895년부터 지아르디니와 아르세날레 두 전시 공간에서 전시를 이어오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아르세날레는 역사적인 조선소를 개조한 공간이며, 지아르디니에는 각국의 국가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고정된 전시 공간 덕분에 지
속적인 인프라 투자와 효율적인 운영도 가능했다.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도 1951년 이후 이비라푸에라 공원 내 시시리오 마타라조 파빌리온에서 꾸준히 전시를 이어오며 예술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1932년 시작된 미국의 휘트니 비엔날레 역시 고정된 공간에서 비엔날레를 개최함으로써 그 위상을 꾸준히 높여왔다. 이들 비엔날레는 세계 3대 비엔날레로 꼽히며, 전용 공간이 안정적인 운영과 미술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비엔날레와 함께 인지도를 자랑하는 광주비엔날레도 1995년 첫 시작부터 전용관을 갖고 출범했다. 최근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습도와 온도에 민감한 작품을 수용하지 못하게 되자, 광주비엔날레 측은 2027년 완공 예정인 새 전용관을 현재의 비엔날레 전시관 주차장 위치에 건설 중이다. 광주는 전용관에서 주요 작품을 소개하고, 인근 광주시립미술관과 대인시장, 광주극장, 무각사 등 광주의 특징적인 장소에도 전시를 배치했다.
■ 다시 전용관 진지하게 고민할 때
부산비엔날레는 이제 전용관을 확보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전용관을 새로 짓자는 것이 아니라,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착실히 준비하자는 것이다.
전용관을 새로 짓는 대신, 2022 부산비엔날레에서 사용된 북항 1부두 창고와 같은 지역의 옛 창고 건물을 재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부산에는 교통 편의성도 뛰어나고 비엔날레의 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적합한 장소가 제법 있다.
부산비엔날레는 이제 전용관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예술가의 참여를 유도하고, 부산비엔날레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나가야 한다. 전용관을 통한 지속 가능한 미래 구축은 부산을 넘어 국내는 물론, 국제 미술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부산비엔날레를 베네치아 비엔날레나 휘트니 비엔날레처럼 세계적인 행사로 성장시키려는 꿈이 있다면, 부산시는 비엔날레의 더부살이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화 도시를 꿈꾸면서 부산비엔날레에 전용관 하나 없는 현실은 치명적이다. 앞으로 30년, 100년을 내다보는 문화 정책, 문화 행정을 기대한다. 아울러 부산시의 문화 행정이 퐁피두센터 분관과 같은 외형적 화려함만 좇지 않기를 바란다.
2024-09-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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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한국은 해리스와 트럼프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할까
11월 5일, 불과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을 전 세계가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7월 13일 암살 미수 사건 직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듯한 분위기가 원점으로 돌아온 상황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후보로 지명한 이후 한 달 사이에 판세에 큰 변화가 생겼다. 해리스 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근소한 우위를 보이는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어떤 반전 드라마가 펼쳐질지 예측불허의 상황이다. 극심한 양극화와 포퓰리즘, 감정싸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 대선의 주요 쟁점은 '팍스 아메리카'에 입각한 대외 정책보다는 범죄율, 이민, 인플레이션, 낙태, 교육, 성소수자 정책 등이 핵심이다.
■싱거운 승리 & 숨 막히는 접전
트럼프의 승리로 싱겁게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대선은 최근 롤러코스터 모양새다. TV토론 바이든 참패(6월 27일)→암살 시도로 피 흘리면서도 주먹 불끈 쥔 트럼프(7월 13일)→트럼프의 귀환을 선언한 공화당 전당대회(7월 15~18일)→바이든의 대선 후보직 전격 사퇴(7월 21일)→해리스 후보 선포와 민주당 전당대회(8월 19~22일)로 급변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전국적으로 해리스와 트럼프 지지가 각각 46%, 45%로 해리스가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다. 7개 경합주 중에서 선벨트(Sun Belt) 경합주에서는 2 대 2 동률을 이루고, 3개 러스트벨트(Rust Belt) 경합주에서는 해리스가 우세한 모양새다. 선거 판세의 주요 지표인 선거자금부터 변화가 감지된다. 민주당은 해리스 부통령으로 교체된 지 불과 3주 사이에 5억 달러가 넘는 선거자금이 모였다. 그중 60% 이상이 경합주에서 그것도 신규 기부자들로부터 쏱아졌다고 한다. 해리스 부통령이 후보로 나서며 여성과 젊은 층, 유색인종의 결집이 두드러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23~2024년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에서 연구년을 보낸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안상욱 교수는 “지금은 해리스가 따라잡는 듯 보이지만, 트럼프가 예전 선거에서 모두의 예상을 꺾고 힐러리를 이겼듯이 투표함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안 교수는 “첫 번째 TV토론 이후의 민심 향방, 해리스에 대한 집중적 공격, 지지층 결집 등이 향후 대선을 판가름하게 된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 188년 동안 미국 대선에서 현직 부통령이 승리한 경우는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일부에서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판독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이민·에너지’ 이슈에서 민주당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 과연 해리스가 우위를 차지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갑자기 등장한 해리스에 대해 트럼프 진영과 언론의 끈질긴 검증으로 약점이 드러날 경우 지지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상 초유의 인플레이션과 서민 경제난
미국 대선의 핵심 이슈는 고물가이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5.7%를 기록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때는 연평균 1.9%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해리스 부통령을 공격하는 핵심 포인트가 ‘바이든 정부에서 물가가 살인적으로 올랐다’였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파괴적인 인플레이션 위기를 즉각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대형유통점 코스트코에는 저렴한 기름을 넣기 위해 아침부터 차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생활물가와 임대료 상승으로 서민들의 가처분소득이 줄어들면서 미국 한인 교포들은 “외식 가격이 너무 올라 식당에서 밥 한 끼 사 먹기가 두려울 정도”라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에 대응해 물가를 잡겠다며 지난 16일 “연방정부 차원에서 식료품 바가지를 제재하겠다”는 경제 대책을 내놓을 정도다.
■반이민 정책 강화될 듯
두 후보 모두 불법 이민에 대한 강경한 입장은 비슷하다. 대처 방법의 강도에 차이가 날 뿐이다. 친이민 성향의 민주당도 합법 이민 기회를 유지하거나 일부 확대하자는 정도이지, 불법 이민자를 관용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 러스트벨트를 중심으로 불법 이주자들이 원주민의 일자리를 빼앗고, 범죄를 저질러 미국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여론이 드센 탓이다. 미국 내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6%가 더 높은 수준의 국경 강화 정책을 원한다고 대답했을 정도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의 국경 및 이민 정책이 완전히 재앙이라면서 재집권 시 국경 강화는 물론, 불법 이민자 수색 및 대량 추방, 대형 수용소 건설을 공언하고 있다. 또한, 해리스를 '국경 차르(czar·황제·최고 책임자)'였다면서 이민 정책의 실패를 공격하고 있다.
■“차에 물건을 두고 내리지 마세요!”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에서도 경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정책 때문에 차량을 깨고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 노상 방뇨 등 경범죄가 횡행하면서 주민은 물론이고 관광객들마저 불안해하고 있다. 대부분 민주당 텃밭인 캘리포니아, 뉴욕 등 대도시가 많은 주에서 범죄율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마약 관련 범죄도 심각하게 증가해 미국 LA 도심의 6차선 도로에서 마약에 취한 사람이 좀비처럼 도로를 막고 서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LA 다운타운에서조차 한 블록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는 것이 위험할 정도라고 한다. 공화당은 경범죄자들은 처벌하지 않는 민주당 정책을 비판하면서, 처벌을 강화하고 강력범죄 교도소 신설, 범죄 소탕에 주방위군 동원을 주장하고 있다.
■“저 사람들 이상하잖아요, 안 그래요?”
해리스 부통령이 선정한 부통령 후보 팀 월즈와 트럼프가 선정한 JD 밴스 부통령 후보의 싸움도 관전 포인트다. 미네소타 주지사인 월즈는 흙수저 출신으로 주 방위군에서 복무한 뒤 교사와 풋볼코치 등을 거쳤다. ‘따뜻한 이웃 아저씨’라는 이미지를 가진 월즈는 전당대회에서 프롬프트를 보지 않고 연설할 정도로 말솜씨가 뛰어나다. 풋볼코치로 휴식시간에 선수들의 사기를 올리는 즉흥연설을 하면서 닦은 실력이라는 중평이다. 이에 비해 오하이오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같은 흙수저이지만, 아이비리그 출신 변호사로 실리콘밸리에서 부를 쌓은 밴스의 경우 권력지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트럼프 반대파로 정치적으로 성장한 뒤, 권력을 위해 친 트럼프로 돌아섰다는 지적이다.
월즈 주지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을 두고 한 말이 미국 정치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발언으로 ‘해리스, 월즈, 민주당=정상’ ‘트럼프, 밴스, 공화당=비정상’이란 프레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해리스도 여성의 낙태권을 공격하는 트럼프와 밴스를 여성혐오론자나 성차별주의자라고 공격하는 대신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불렀다. 상식과 비상식의 구도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중국과의 패권 전쟁은 강경해질 듯
트럼프와 해리스 두 후보 모두 ‘중국 억제’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부보좌관을 역임한 매트 포틴저는 포린어페어스 기고문 ‘대체할 수 없는 승리’에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며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것”이라면서 “미국과 중국은 이미 냉전 상태에 돌입했고, 명확한 목표는 중국 정부가 미국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끔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로버트 오브라이언도 ‘힘을 통한 평화의 귀환’ 기고문에서 “중국을 군사적·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적”으로 규정했다. 정당과 관계없이 누가 당선되더라도 중국산 수입품 관세 부과, 첨단 기술 수출 통제 등 기술 패권과 무역 전쟁이 불가피할 조짐이다.
■경제 불확실성 더 커져
대선 여부에 따라 주식시장이 출렁이고 있다. 트럼프는 바이든 정부의 핵심 정책인 전기차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축소 및 폐기를 예고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도입한 IRA를 폐기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2030년까지 미국 승용차량 판매의 50%를 전기차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연방 보조금이 철회되거나 감소해 인센티브가 없어지게 되면, 대미 투자를 결정한 한국 자동차업체와 배터리 회사들도 투자 전략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
■동맹정책, 외교 롤러코스터 타나
미국의 정권교체는 대외정책의 가장 큰 불확실성이다.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되면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기조가 대체로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 해리스는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해외에서 미국의 안보와 가치를 확고히 증진하겠다"면서 바이든의 바통을 이어받겠다는 기조를 밝혔다. 해리스가 집권하면 각종 문제를 점진적으로 해소하는 정책을 추진하겠지만, 트럼프가 당선되면 국제정치가 예측불허의 전장으로 변하게 된다.
트럼프는 일방적, 예측불가능한 형태로 대외정책을 처리할 위험성이 높다. 주한미군 분담금 인상 요구, 주한미군의 역할 조정, 독자적 미북 협상 추진 등이 우려된다. 트럼프는 관세 인상과 보호무역정책, 다자주의에서 양자주의로 전환, 고립주의로 바뀌는 추세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내세워 이념과 가치, 동맹과 신뢰를 추구했던 것에서, 이익 추구가 전면으로 나서게 된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임석준 교수는 “한국의 입장으로서는 예측 가능한 해리스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면서 “현재 바이든 행정부에서 주창했던 다자주의동맹 등 국제 관계를 이어가야 한국도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이번 대선의 결과에 따라 향방이 엇갈릴 전망이다.
■한국의 고민은 깊어지고
해리스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혹은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국제 정세가 요동칠까. 11월 5일 선거 결과에 따라 많은 국가와 기업, 사람들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다. 확실한 사실은 어느 정당이라도 대중국 압박과 미국 중심주의는 한층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인 한국이 어떤 스텝을 밟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안상욱 교수는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한국의 해외 원자력발전소 건립 사업 등 경제적 이해관계에서도 미국 정부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을 수 있다”면서 “대선 이전에 두 후보 진영과의 정책적 조율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2024-08-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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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건국절 논란은 왜 안 사그라질까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이후 불거진 ‘건국절 논란’과 관련해 대통령실은 정부가 건국절을 제정할 의사나 계획이 없었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하지만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 역사단체들은 대통령실의 말을 믿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김 관장 등의 지명을 철회하는 등 행동으로 진정성을 보이라고 한다. 건국절 논란이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뉴라이트가 촉발한 건국절 논란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확립된 건국의 날인 만큼 이를 기념하자”는 게 건국절 주장의 요체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는 곧 이승만 정부다. 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은 건국의 아버지’라는 논리로 연결된다.
건국절 주장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건 이명박 정부 때다. 2006년 <반일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씨 등 뉴라이트계(극우와 상당 부분 겹친다) 인사들이 언론 매체를 통해 건국절을 주장하자, 2007년 당시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는 국경일 개정 법안을 발의했고, 2008년 국무총리 산하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출범했다. 시민단체와 야권의 반발이 거세 유야무야됐지만 이후에도 건국절 주장은 이어졌다. 2014년 당시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이 건국절 제정 법안을 새로 발의했지만, 역시 흐지부지됐다.
건국절을 반대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1919년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지목한다. 이는 현행 헌법에 명확히 규정된 바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건국절 주장은 오히려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흔드는 꼴이 된다. 이들은 또 건국절을 수용하면 1919년 이후 우리 독립운동사가 모두 사라지고, 따라서 친일파도 없는 게 된다고 강조한다.
■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하지 않겠다고 직접 나서 단정적으로 말한 적도 없다. 건국절을 반대하는 이들은 그런 이유로 여러 정황을 살펴 윤 대통령에게 의구심을 나타낸다.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에 대한 윤 대통령의 태도가 그중 하나다.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추진은 건국절 논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안이다. 이는 박민식 전 국가보훈부 장관이 지난해 7월 19일 이 전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국부”라고 말한 데서 충분히 증명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에 건립 기금 500만 원을 기부하면서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의 성공을 응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독립운동과 광복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인식도 논쟁 대상이다. 2022년 취임 후 첫 광복절을 맞은 윤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우리의 독립운동은 끊임없는 자유 추구의 과정으로서 현재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경축사에는 ‘자유’가 무려 33번 언급됐다. 윤 대통령의 ‘자유’는 ‘반공’ 또는 ‘반북’으로 대체할 경우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실제로 이날 언급된 ‘자유 추구의 과정’은 ‘공산 세력에 맞서 자유국가를 건국하는 것’을 일컬음이었다.
윤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일관된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고 독립운동을 정의했고,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한반도 전체에 자유 민주 통일 국가가 만들어지는 그날, 비로소 완전한 광복이 실현되는 것”이라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공산 세력’ ‘자유 추구’ ‘건국 운동’ 등은 건국절을 주장하는 뉴라이트계 인사들이 흔하게 동원하는 단어들이다. 윤 대통령은 비록 건국절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런 정황이 이명박 정부 시절 건국절 추진 움직임이 재연될 수 있다는 의구심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뉴라이트 성향 윤 대통령의 사람들
윤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온전히 혼자만의 것일까. 관련해 주목할 만한 일이 있었다.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지난 19일 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주위에 역사에 대한 이상한 견해를 부추기는 이들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 것. 아닌 게 아니라 윤 대통령 주변에 뉴라이트 성향, 특히 이명박 정부 때 인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실제로 윤 대통령 집권 후 요직에 기용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그 지적이 그리 틀린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 뉴라이트를 이끌던 핵심 인물들을 국가안보실장, 국정상황실장, 방송통신위원장,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에 앉혔고, 이런 경향은 역사·교육 관련 국책 기관의 수장 임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장, 국가교육위원장, 국사편찬위원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한국학중앙연구원장 등이 죄다 편향된 역사 인식을 가진 뉴라이트 계열의 인물들이다. 이번 광복절에 파란을 일으킨 독립기념관장도, 본인 주장과는 무관하게, 뉴라이트 성향 인사로 분류된다.
■반국가세력 vs 일진회 같은 인사들
윤 대통령이 지금껏 보인 역사 인식이 윤 대통령 개인을 넘어 그의 주변에 포진해 있는 집단의 인식에 연유한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실이 “있지도 않은 건국절 계획” “억지 주장” 운운하고 심지어 “엄정 대응할 생각”이라고 을러대도, 윤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이런 인물 배경이 바뀌지 않는 한 건국절 논란은 사그라질 수 없는다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건국절 논란이 먹고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한 것으로 지난 13일 알려졌다. “국민 민생과는 동떨어진 불필요한 이념 논쟁이라는 취지”라고 대통령실은 해명했지만, 뉘앙스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윤 대통령의 과거 발언 때문이다.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2월 윤 대통령은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 왜 필요한지 모른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혹 “건국절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국민은 먹고사는 데나 신경 써라”는 뜻은 아니었는지….
‘두 쪽 난 광복절’ 사태에도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철회하지 않는 것을 보면, 윤 대통령은 자신 주위에 포진한 뉴라이트계 인사를 내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아니, 이전보다 더 강고한 태도를 보인다. 지난 19일 국무회의에서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강조한 게 그렇다. 이날 ‘을지 자유의 방패’ 연습을 계기로 열린 국무회의였다고는 하지만, 가슴 한편에 섬찟함이 가시지 않는다. 반국가세력은 누구를 지칭하며, 항전 의지는 또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뜻인가.
이종찬 광복회장이 지난 20일 “대통령 주변 옛날 일진회 같은 인사들을 말끔히 청산하라”고 요구했다. 일진회는 구한말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 정책에 적극 호응한 대표적인 친일단체다. 묻게 된다. 윤 대통령이 말한 반국가세력이 문제인가, 이 회장이 언급한 일진회 같은 인사들이 문제인가. 어느 쪽이 실체인가.
2024-08-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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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새만금 잼버리 1년, 파행은 끝나지 않았다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대회’가 폐막 1년을 맞았다. 지난해 8월 1일부터 12일까지 전북 부안군 새만금에서 열렸던 대회는 총체적 준비 부실로 ‘역대 최악의 국제 행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밖으로는 국제적 망신, 안으로는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도 파행의 여파는 계속되고 있다. 책임 소재 규명은 하세월이고 ‘네 탓’ 공방만 난무한다. 무슨 까닭일까.
■ 악몽의 12일
6년 준비 끝에 열린 2023 새만금 잼버리 대회는 전 세계적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158개국에서 4만 3000명이 참여할 정도로 규모도 컸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드넓은 간척지 야영장에 햇볕을 피할 그늘이나 더위를 식힐 샤워장이 없었고 급수 시설도 태부족했다. 첫날부터 온열 질환자 400여 명이 속출했다. 영국이 조기 퇴영을 결정했고 미국과 싱가포르 등 다른 나라도 뒤를 따랐다. 개최 시기 8월이라면 충분히 예견된 일인데, 어째서 아무런 대비가 없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쏟아지는 비판에 정부가 대회 조직위원회를 대신해 직접 나섰으나 사태는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온열 질환자만 하루 1000명이 넘어가고 태풍 카눈까지 북상했다. 정부는 결국 대회 시작 일주일 만에 야영지 조기 철수라는 결정을 내렸다. 부랴부랴 대회 장소를 전국 곳곳으로 옮기고 K팝 콘서트와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프로그램으로 참가자들을 위로했지만 '실패한 대회'라는 평가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 총체적 실패
무려 1171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새만금 잼버리는 기대한 만큼의 막대한 경제효과를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국가와 도시 이미지만 먹칠하고 말았다. 세계스카우트연맹은 파행 원인으로 조직위의 미숙한 운영을 지적했다. 안전, 보안, 청소년 보호, 의료지원, 위생, 현장 이동, 날씨 대응 등에서 상당한 결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간척지가 어떻게 대회 부지로 선정됐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드넓은 평야라는 장점은 있지만 배수가 원활하지 않고 뙤약볕을 피하기 힘들다는 약점이 더 커서 야영지로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잼버리 대회 종료 이후 수백억 원을 들여 설치한 샤워장과 급수대, 상하수도 등 야영 관련 시설은 채 열흘도 쓰지도 못하고 철거됐다. 잼버리 부지는 원래 ‘관광 레저’로 묶여 있다가 농업용지로 전환된 땅이다. 막대한 사업 재원을 농지 기금의 투입으로 해결하기 위해 용도를 변경했던 터라 대회 종료 뒤에는 야영장이 아닌 농경지로 다시 원상 복구해야 했다. 그런데 시설 철거에도 다시 수십억 원의 돈이 들어갔다.
결국 전북도가 새만금 SOC(사회기반시설) 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위해 잼버리 대회를 활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배경에는 이런저런 사정들이 숨어 있었다.
■ 뒤처리도 파행
최근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잼버리 대회에 쓰겠다고 했던 건물이 얼마 전 완공됐다. 이름하여 ‘글로벌 청소년 리더센터’. 429억 원을 들여 당초 스카우트 박물관, 야영장 등 부대시설에 교육·숙박 시설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기획한 곳이다. 그런데 폐막하고 10개월이 흐른 지난 6월에야 완성된 것이다. 대회 메인 시설을 다 짓지도 못한 채 국제행사를 치른 셈이니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금도 쓰임새조차 확정되지 않은 이 건물에 매년 20여억 원의 운영비가 들어간다고 한다.
부실 논란의 당사자인 잼버리 조직위는 폐막 11개월 만인 지난달 12일에 해산했다. 해산 직전까지 올해 조직위 예산으로 약 17억 원이 넘게 편성됐는데, 사무총장 등에게 과도한 급여가 지급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달 초에는 잼버리 조직위가 200억 원에 가까운 예비비를 긴급 편성했으나 47억 원의 잔액이 남아 예산 집행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요지의 국회예산처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세계스카우트연맹 역시 재정 투입을 통한 한국 정부의 개입을 문제 삼은 바 있다. 지난 4월 ‘제25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관련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공개해 막대한 재정 지원이 사실상 대회를 좌지우지했고 연맹 고유의 기획과 운영을 소외시켰다고 주장했다.
■ 늦어지는 책임 규명
1년이 지났지만 파행 책임을 놓고 지루한 ‘네 탓’ 공방만 벌어지고 있다. 특히 여야 정치권은 서로에 대한 책임 전가에 여념이 없다. 국민의힘은 ‘문재인 정부 시절 5년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조직위와 전북도가 대회를 성공시킬 역량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가장 중요한 마지막 1년은 윤석열 정부 시기였다’고 반박한다. 총사업비 1171억 원 중 문 정부가 집행한 예산은 156억 원에 불과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마당에 감사원 감사는 무한정 지체되고 있다. 감사 대상 기관은 여성가족부, 조직위, 전북도 등 11곳인데, 지난해 9월 시작된 감사가 11개월째 감감무소식이다. 아직 중간 단계인 ‘보고서 작성’ 수준에 머물러 있는 데다 감사 결과 최종 발표 시기조차 미정이다. 잼버리 사태는 아무도 책임을 지는 이 없이 망각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 제2, 제3의 새만금 안 나오려면
새만금 잼버리 파행을 살피는 일은 또 다른 지자체의 여러 국제 행사들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2010년 이후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각 지자체의 국제 행사 유치 움직임은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긍정적 효과를 거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행사 시설의 사후 활용 방안을 제대로 세우지 않은 채 무턱대고 개최만 하고 본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부실한 계획으로 인한 예산 초과 투입 등 부작용도 만만찮다. 현재 개최를 앞두고 있거나 추진 중인 국제 행사들이 상당수인데 지금이라도 운영 상황 전반을 철저히 다시 따져봐야 한다. 나아가 실효성 있는 사후 평가 제도가 필요하다. 지자체의 차기 국제 행사 유치 때 행사의 질을 높이고 예산 낭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개선되도록 유도하는 게 핵심이다.
부산은 지난해 월드엑스포 유치에 실패했지만 다양한 국제 행사를 치른 경험이 있고 향후에도 더 많은 국제 행사를 치를 게 분명하다. 이번 잼버리 사태를 강 건너 불 보듯 할 일이 아니라 실패로부터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새만금 잼버리는 올림픽과 월드컵 등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우리의 자부심에 큰 생채기를 남겼다. 제2, 제3의 새만금 잼버리 사태가 안 나오려면 파행의 실체와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필수다. 이와 함께 재발 방지책 마련과 제도 개선 노력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진영논리에 좌우되거나 유야무야되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선 안 된다.
2024-08-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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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사도광산, 1만 곳 이상 더 있다
일본 니가타(新潟)현 사도(佐渡)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강제’ 노역 표기 누락이 한국 정부의 용인 속에 이뤄진 것으로 드러나 비판 여론이 거세다. 한국 외교부가 ‘강제’ 표현을 요구했으나 일본 측이 거부했고 결국 인근 아이카와(相川) 향토 박물관에 징용 조선인 전시를 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박물관 안내판에는 한반도에서도 징용제가 실시됐고,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더 힘든 일에 내몰렸다는 서술이 있으나 결국 강제성이 표시되지는 않았다. 군함도에 이은 역사 인식의 후퇴를 한국 정부가 자초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투입된 곳은 군함도와 사도광산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 강제 동원된 곳은 탄광뿐만 아니라 공사장, 농장, 항만, 군수 공장 등 모두 1만 1500곳에 달한다. 현지 동포와 일본 양심 세력은 조선인 징용을 ‘강제 연행’과 ‘강제 노역’으로 규정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시설을 만들고 지키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후세에 알리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 과정은 일본 우익 세력의 집요한 공격에 맞서는 신산의 고비고비였다. 우경화가 급속히 진행된 일본에서는 지금도 ‘강제’ 표현을 없애려는 우익 단체의 집요한 공격이 이어지고 이에 맞서는 동포와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의 저항이 진행 중이다. 만약 ‘강제’가 아니었다면 식민 지배가 정당화되는 것이고, 이것을 우익 세력이 바라기 때문에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강제’ 표현을 스스로 포기했다. 민간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기억의 전쟁’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역사 왜곡에 가담한 꼴이 됐다. 어처구니없는 이 장면을 후손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기록할지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 양심적 시민·동포 “아픈 상처 전하자!”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게이센마치(桂川町)의 주택가 쌈지 공원. 추모비와 석비가 없었다면 이곳이 과거 탄광 밀집지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가한 풍경이다.
‘이곳은 1909년부터 60년간 탄광이 있었던 곳으로… 8000여 명이 생활… 전쟁이 격화될수록 노동자가 부족하게 되고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와 갱내에서 위험한 일에 종사됐다.’
추모비는 옛 요시쿠마(吉隈)탄광에서 갱내 화재로 숨진 조선인 25명과 일본인 4명 등 모두 29명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폐광 뒤 대단지 주택가로 조성되자 과거가 잊혀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주민들이 탄광 회사에 추모 시설을 요구한 덕분에 추모비가 건립돼 아픈 상처를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됐다. 추모비 옆 석비 뒷면에 적힌 조선인 사망자 명부를 읽어 내려가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부분 20대 초반이고 가장 어린 희생자는 19세. 식민지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꽃다운 청춘들이 여기서 스러졌다.
이 지역에서 ‘강제 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을 30년 이끌며 추모비 건립에 앞장섰던 오노 세츠코 여사는 92세이던 2018년 <서일본신문> 인터뷰에서 징용 조선인이 겪은 고초를 전했다. “잊히지 않는 이는 경북 출신의 17세 정청정 군입니다. 강제 연행되어 탄광에 온 뒤 가혹한 노동을 못 견뎌서 결국 6개월도 안돼 탈주를 감행했죠. 장시간 과로에 시달렸기 때문이지요. 식사도 충분치 않았고 폭력은 일상적이었어요.”
기자가 예전에 일본 규슈 지역을 취재할 때면 일부러 한반도 관련 유적을 찾았는데, 개중에는 조선인 징용의 흔적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규슈 지역에 탄광이 많았고 탄광에 동원되는 경우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상도 출신이 다수였다.
이국 땅에 끌려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귀향하지 못한 영령을 위로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남긴 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동포와 양심적인 일본 시민이었다.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전하려 평생을 바친 이들을 만날 때면 고개가 숙여지곤 했다. 그중 잊히지 않는 곳이 사가(佐賀)현 히젠초(肥前町)의 사찰 고묘(光明)사. 주지 스님은 사찰에서 4㎞ 떨어진 탄광에서 숨진 조선인 영령을 반백 년이 넘게 돌보고 있었다. 사찰 뒤에는 영령 51위를 기리는 추모비까지 세웠다. “제법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밤만 되면 ‘아이고 아이고’ 하는 신음 소리가 사찰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주지 스님이 불귀의 객이 된 조선인들의 명단까지 새긴 석비를 세운 까닭이다.
후쿠오카현 오무타(大牢田)에는 과거 광업소 세 곳에 수천 명씩의 징용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에 투입됐다. 주택과 공원으로 변모한 폐광 부지에 동포들이 추모비를 세웠다. ‘우리는 과거 역사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며 후대들에게 전하여 갈 것이다.’ 동포들이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희생자를 기리는 비석을 세운 것은 아픈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남기기 위함이었다.
■ “‘강제’는 없었다!” 우익의 반격
후쿠오카현 이즈카(飯塚)시 시립묘지에 있는 조선인 무연고자 납골당 ‘무궁화당’은 우익 세력의 공격 좌표가 되고 있다. 이 납골당은 과거 지쿠호(筑豊) 지역 탄광에서 숨진 징용 조선인 중 무연고자 117위를 모신 곳. 동포와 일본 시민들이 시에 끈질기게 요구해 2000년 시립묘지 내에 ‘무궁화당’을 세우고 해마다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일본 사회의 급격한 우경화에 따라 2015년 갑자기 우익 단체가 등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문에 ‘수많은 조선인이 일본 각지로 연행돼… 지쿠호 탄광에서만 15만 명 이상이 가혹한 강제 노동에 투입돼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고 쓰여 있는데, 이 ‘강제’ 표현을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우익 단체는 “강제 연행의 실태와 숫자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더구나 정부의 견해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 시설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데도 시립 시설이 무상 제공되고 있다면서 시 의회를 통해 시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무궁화당 측은 “강제 연행 등 비문 (근거)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 납골당 시설은 시와 협의해서 설치 허가를 받았다”고 일축했다. 우익 세력의 집요한 공격 탓에 납골과 연례 추모제가 위축될 우려가 제기됐으나 시민과 동포들은 꿋꿋이 버텼다. 추모제도 코로나19 기간 중단됐을 뿐 2023년 10월 재개됐다.
일본의 과거사 지우기 흐름 속에 식민 지배의 ‘강제성’을 삭제하려는 역사 공세가 강화되자 양심 세력은 힘겹게 진실을 지키고 있다. 이는 비단 무궁화당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전역의 조선인 강제 동원 역사·추모 시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즉, 윤석열 정부가 ‘강제’를 포기한 것은 사도광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우경화 세력의 논리에 보조를 맞춤으로써 일제 지배 정당화 논리에 들러리를 선 것인데, 이는 역사의 교훈을 후대에 전하려던 양심 세력의 장기간에 걸친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 조선인 29.7% 강제동원 피해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 인구는 2636만 1401명. 이 중 징병·징용·군무원·위안부로 강제동원된 이는 782만 7328명(29.7%)에 달한다. 인구 10명 중 3명이 일제에 강제로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인류사에 보기 드문 가혹한 식민 지배다. 이 때문에 2010년 ‘강제동원지원특별법’이 시행되고 2015년 부산 남구 대연동에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개관했다. 부산이 역사관 입지로 정해진 것은 규슈 탄광의 노무자 동원이 경상도에서 상당수가 이뤄졌고, 부산항이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관 전시물 중 징용 조선인들이 혹사당했던 탄광 모형이 있는데, 입구에 증언록을 전시하고 있다.
“(오전) 7시에 시작하고 (오후) 7시까지 12시간 일 해야 돼. 굴을 비우지 않고 3교대로 돌아가면서 그렇게 일을 해요. 나올 때 성한 사람은 몇 명 안돼. 다리가 잘렸다, 손이 잘렸다, 어디가 깨졌다…. 부상자가 3분의 2는 돼.”
이런 가혹한 노역이 이뤄진 곳은 규슈의 탄광 지대를 비롯해 아시아 전역의 공장, 농장, 공사장 등 1만 1500곳에 달한다. 군함도와 사도광산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광산 두 곳에서 ‘강제’를 감춘다고 해서 감춰질 수가 없다는 뜻이다.
■ 윤 대통령, 부산 강제동원역사관 방문해야
일제 강점기 시절 인도주의에 반하는 과거사에 대한 인정과 반성은 1995년 당시 일본 총리가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로 요약된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지금 일본 정부는 반성과 사죄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를 외면한 채 과거사에 대해 모르쇠 전략으로 일관한다. 그 연장선에 군함도가 있고 사도광산이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무라야마 담화 준수를 요구하는 것이 마땅한데, 되레 일본 역사 왜곡의 길을 터주는 모양새를 자초했다. 한마디로 외교 참사다.
광복절을 코앞에 두고 정부가 임명한 독립기념관장에 대해 광복회가 뉴라이트 계열이라며 부적절성을 주장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사 인식은 국민 눈높이를 벗어났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래서, 79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통령께 간곡히 제안 드린다.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방문해서 징용 피해자들의 증언과 기록물을 살펴 보시라. 4층 상설 전시실 마지막 코너의 제목은 ‘끝나지 않은 일제 강제동원’이다. 왜 강제동원이 아직 현재 진행형인지 곱씹어 보시길 부탁 드린다. 일본 우경화 세력에 동조화되는 대일 외교 행보에 대해 언짢음을 느끼는 국민들이 왜 많은지 해답을 찾으시길 기원한다.
2024-08-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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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역대 최대 해파리 습격, 바다 안전 어쩌나
여름 피서철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데 전국 해수욕장은 해파리 습격으로 피서객 안전에 비상이 걸렸다. 해파리는 해양생태계 파괴와 해마다 높아지는 수온 등으로 최근 몇 년 사이 강도를 더해 가며 우리나라 전 해역으로 확산 중이다. 이 때문에 독성이 강한 해파리가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것은 물론이고 양식장과 근해 어업 피해로도 이어지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은 해파리 종별 유입에 따라 주의보와 경보를 발령하며 피서객과 어민의 주의를 당부하고 있지만 근본적 해결 방안을 찾기는 힘든 상황이다.
∎제주·부산 이어 동해까지 확산
국립수산과학원에 따르면 올해 국내 해역의 해파리 밀도는 ㏊당 108개체로 전년도의 0.3개체에 비해 폭증했다. 이는 국내 해역에서 해파리 모니터링을 시작한 이래 역대 최대다. 이 때문에 피서철을 맞은 전국 해수욕장마다 해파리 쏘임 사고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올해 부산의 7개 주요 해수욕장에서 발생한 해파리 쏘임 구급 활동은 모두 195건인데 지난달 28일 하루에만 39명이 응급 처치를 받았다. 지난해 비슷한 기간 6건밖에 발생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늘어난 수치다. 부산·경남 해역에는 지난달 12일부터 노무라입깃해파리 ‘주의’ 특보가 발령된 상황이다.
국내 해역의 해파리 밀도가 높아지면서 부산·경남과 제주는 물론이고 동해로도 해파리 피해가 확산했다. 독성이 강한 노무라입깃해파리는 중국 연안에서 발생해 해류를 타고 국내 해역으로 유입되는데 제주, 경남, 부산에 이어 동해로까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에 따르면 올여름 동해안 6개 시군에서 집계된 해파리 쏘임 사고는 모두 500건에 달한다. 최근 일조량 증가와 연안 해역의 급격한 수온 상승으로 동해안으로 해파리 출몰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서객 쏘임에 어업 피해도 속출
국내 연안에서는 2010년 이후 해파리 출현이 잦아지기 시작해 해마다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 연도별 편차는 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더 길게 더 많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수욕장 피서객 쏘임 사고는 물론이고 어업 피해도 속출한다. 해파리에 쏘일 경우 사람마다 증상이 다르지만 통증과 붓기가 발생하고 알레르기 반응으로 설사, 복통이 생기기도 하는데 심할 경우 혈압 저하, 호흡 곤란 증상을 보이고 쇼크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까지 있어 방심할 수 없다. 2012년 인천 을왕리해수욕장에서 물놀이하던 8세 여아가 해파리에 쏘여 인하대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다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연근해 어민 피해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특히 올해는 고수온과 해파리 밀도 증가로 어민 피해가 속출하고 있어 해양수산부와 지자체가 피해 실태 조사 등 대응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 최대 200㎏에 육박하는 해파리가 그물에 걸리면 그물이 찢어지고 어획량 감소로 이어진다. 또 해파리에 의해 물고기가 폐사하거나 훼손돼 상품성도 떨어진다. 연근해 어민들에 따르면 7~8월 극성을 부리다 10월이면 사라지는데 이제는 11월에도 나와 골치라고 한다.
∎해양생태계 파괴와 해파리 증식
인류보다 먼저 지구상에 나타난 해파리는 엄청난 진화 과정을 겪으면서 생존력을 길러 왔다. 환경에 철저하게 적응하며 살아남았고 환경 변화에 따라 이동하며 적응한 것이다. 우리 수역의 해파리 증가도 해수 온도 상승과 함께 동물성 플랑크톤이 증가하면서 먹이를 따라 자연스레 유입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세계적으로 해파리 개체 수 증가를 둘러싸고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원인을 특정하기 어렵고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워낙 종이 다양하고 종마다 생태적 특성도 다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함께 남획으로 인해 쥐치와 거북이 등 천적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해파리 개체 수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최근에는 연안의 인공구조물이 많아지면서 해파리 서식지가 확장해 개체 수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는 연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해파리 같은 자포동물의 부착유생인 폴립이 인공구조물에 부착돼 다량으로 번식한다는 것이다. 새만금방조제 축조 후 서해안에 해파리 밀도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어민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인간에 의한 해양생태계 파괴가 해파리의 이상 증식과 공습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지자체마다 해파리 퇴치 안간힘
해파리는 유해조류로 인명과 어업 피해는 물론이고 대량 증식의 경우 해양생태계 균형에도 치명적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국립수산과학원은 2010년부터 모니터링을 통해 주의보와 경보 등을 발령하고 있다. 단계별로 해파리 특보가 발령되면 각 지자체는 해당 수역에서 그물에 칼날을 달아 해파리 퇴치 작업을 벌인다. 또 해파리 수매사업을 통해 개체 수를 줄이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해양환경공단은 해파리 번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산란장을 찾아 폴립 제거 작업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해양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보니 근본적 퇴치는 어려운 상황이다.
국립수산과학원 김경연 연구사는 “국내 해역에서 강한 독성으로 문제가 되는 노무라입깃해파리의 경우도 중국 연안 개발에 따른 부영양화 등으로 개체 수가 늘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환경 조사에 어려움이 있다”며 “해파리가 국내 어업과 해양생태계 등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고 있는 만큼 연구와 인력 등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2024-08-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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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개 식용 종식법’ 시행, 남은 개들은 어쩌나…
지난 1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30여 동물보호단체가 결성한 ‘개 식용 종식을 촉구하는 국민행동’ 주최로 ‘2024 초복 문화제’가 열렸다. 이들은 이른바 ‘보신탕 문화’의 빠른 근절을 촉구하는 동시에 정부가 개들을 살리기 위한 대안을 시급히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 세간의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초복이었던 지난 15일 시중의 보신탕집을 찾는 발길이 예년보다 한산했다는 소식이다. 업주들은 ‘초복 특수’가 사라졌다고 울상이라는데, 사정은 지난 25일 중복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법은 시행되는데…
지난 2월 공포된 ‘개의 식용 목적의 사육·도살 및 유통 등 종식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 마침내 다음 달 7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보신탕 등으로 먹기 위한 개는 기르지도, 죽이지도, 팔지도 말라는 법이다. 이를 어기면 꽤 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식용 목적으로 개를 도살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다만 처벌 조항은 공포 후 3년 간의 유예기간을 둬 2027년 2월부터 적용된다. 개 식용을 둘러싼 오랜 논란을 해소하고 동물 복지와 생명 보호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분명 진일보한 성과라고 하겠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갈 길이 멀다. 개 농장 등 관련 업체가 특별법에 따라 전업 또는 폐업할 경우 정부가 어떻게 얼마나 보상·지원하느냐를 놓고 업체와 정부 사이 합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한육견협회 등은 이번 달까지 정부의 지원책이 확정되지 않으면 개 식용 종식을 전면 거부한다는 입장이다. 그런가 하면 일부 동물보호단체를 중심으로 “개 식용 사업은 그동안 불법으로 진행됐는데 왜 국민 혈세로 보상하고 지원해야 하냐”며 반발한다.
■50만 마리? 100만 마리?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다. 식용으로 길러졌다가 특별법 시행 후, 특히 처벌 조항이 적용되는 2027년 이후에도 남아 있을 개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농림축산식품부 등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7월 현재 국내 개 농장은 1500곳이 넘으며, 거기서 사육되는 식용 개는 50만 마리 이상으로 집계된다. 하지만 파악되지 않은 농장까지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실제로 동물보호단체들은 식용 개가 100만 마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육견협회는 200만 마리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처벌이 유예되는 2027년까지 육견업자들이 보상을 노리고 집중 번식에 나서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식용 개들의 개체 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뾰족한 수가 현재로선 없다. 육견업자들의 생업이 걸린 문제라 정부가 나서서 개체 수 제한을 강제하기도 어렵다.
■입양도 보호도 난감
향후 사회적 갈등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문제에 대해 정부는 물론 육견업계와 동물단체도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식용으로 사육 중인 개들에 대한 보호 대책이 없는 셈이다. 육견업자가 개를 버려둔 채 농장 문을 닫거나 살처분하면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육견업자들의 선택지는 세 가지뿐이다. 처벌 유예 기간 안에 개를 모두 출하하거나, 판매하거나, 입양시키는 것이다.
개를 출하한다는 건 보신탕집 등으로 유통시킨다는 뜻이다. 향후 2년여 동안 지금 있는 개들을 다 먹어 치운다? 실현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특별법 시행 취지에도 맞지 않는, 차마 못 할 짓이다. 판매와 관련해 육견업자들은 정부가 개들을 매입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수십만에서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개들을 예산을 들여 모두 매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육견업자들은 마리당 200만 원의 보상액을 제시했다는데, 식용 개의 개체수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하다. 설사 정부가 무리해서 매입한다고 해도 이후 그 개들의 처리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지자체나 민간단체의 동물보호소가 있지만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그 마저 이미 포화 상태라 식용 개들을 수용할 여력이 없다. 입양도 난감하다. 식용 개 대부분이 20kg 이상의 대형견이라 일반 가정에서는 입양을 꺼리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개들을 그대로 유기할 수도 없는 일. 결국 안락사밖에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많은 개들을 모두 안락사시킨다? 그 자체로 참극이다.
■법으로 강제한 대가!
이런 현실에 그동안 개 식용 금지를 주창해 온 동물보호단체들은 곤혹스럽다. 최선을 다해 개들을 보호·관리하겠다지만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번식하지 않게 하고 남은 개들을 인도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잘 준비해야 한다”는 식으로 제언할 따름이다. 정부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최근 농림축산식품부가 동물보호단체와 비공개 회의를 가졌는데 별다른 대안을 찾지는 못하고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말만 나왔다고 한다. 정부가 오는 9월까지 관련 기본계획을 수립한다지만 거기에 과연 획기적인 해법을 담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여하튼 앞뒤 고민 없이 법으로 개 식용 금지를 밀어붙인 대가를 우리 사회가 톡톡히 치르게 됐다. 반려견 문화 확산으로 개고기 먹는 인구가 갈수록 줄어드는 형편이라 가만히 놔둬도 자연스레 ‘보신탕 문화’는 사라질 터인데, 굳이 그렇게 했어야 옳았나 묻는 이들이 많다.
2024-07-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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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아르떼뮤지엄, 부산을 홀리려 왔다는데…
제주(2020년 9월), 전남 여수(2021년 8월), 강원 강릉(2021년 12월) 찍고 이젠 부산이다. 일단 지금까진 통(通)했다. 국내 누적 관람객 수는 650만 명, 해외까지 합치면 700만 명에 달한다.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K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 얘기다. 18일 국내 4번째로 부산서 개관해 19일 운영에 들어갔다. 그것도 영도 최고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복합문화공간 ‘피아크(P-ARK)’ 바로 옆이다. 해외에는 2022년 홍콩을 시작으로 중국 청두, 미국 라스베이거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문을 열었다. 2026년까지 전 세계 20곳 개관을 목표로 한다. 아르떼뮤지엄이 심상치 않은 속도로 그 무대를 넓히고 있다. 이번엔 부산을 매혹하러 왔다는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아르떼뮤지엄이 뭐지
아르떼뮤지엄은 일반인들에게 조금은 생소할 수 있다. “미술관인 건 알겠는데….” 그다음부터는 말문이 막힌다. 간혹 프랑스 퐁피두센터처럼 외국 미술관이냐고 되묻기도 한다.
아르떼뮤지엄은 디지털 디자인 회사인 디스트릭트(d'strict)가 운영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상설 전시관이다. 관람객이 마치 실제 작품 속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고 해서 흔히 몰입형이라고 한다. 예술과 기술이 만나 하나로 어우러진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오감을 자극하며,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미디어아트가 관람객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전시 공간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과 관람객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시각 예술 작품은 관람객이 수동적으로 바라만 보는 입장이었다면, 미디어아트는 영상과 소리는 물론이고 때로는 만져볼 수 있고 심지어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작품 자체에 빠르게 빨려 들어간다.
아르떼뮤지엄 부산은 제일그룹이 운영 중인 영도 선박 수리공장 부지에 있다. 전시관은 1700여 평 규모다. 그 옆에는 제일그룹이 2021년 5월 설립해 운영해 오고 있는 복합문화공간 피아크가 있다. 제일그룹은 부산 향토기업이면서 영도를 기반으로 하는 선박 수리 전문 기업이다. 지난해 1월 (주)디스트릭트코리아와 계약을 맺고 아르떼뮤지엄 부산을 유치했다. 아르떼뮤지엄 부산은 기존 조선 기계를 수리하던 공장의 외관을 유지하고 내부를 업사이클링(Upcycling) 했다.
■부산을 홀릴 수 있을까
최근 몇 년간 부산 영도는 다양한 문화공간과 카페들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 산업의 흔적과 현대적인 문화공간이 공존하는 영도는 관광객들에게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아르떼뮤지엄 부산의 개장은 이러한 영도의 매력을 더욱 확장시킬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히 하나의 문화공간이 추가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곳에서 펼쳐지는 미디어아트 전시는 전통적인 예술 전시와는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어 다양한 연령층의 관람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제일그룹 측은 연간 1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피아크와 아르떼뮤지엄 부산을 찾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부산의 또 다른 복합문화공간인 수영구 소재 F1963과 비교하면 분명 한계도 있다. 우선 공간의 다양성 측면에서 아직 F1963에 미치지 못한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의 접근성도 크게 떨어진다. 주변에는 문화를 적극적으로 누릴 수요도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미술계에서는 비슷한 주제로 펼쳐지는 미디어아트 공간이 전국에 네 군데나 있어 소위 장기간 ‘흥행’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차별성이 강하지 않으면 자칫 전시 매력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국의 미술관들도 최근 미디어아트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한다.
■지역 문화에 새 활력 기대
기업의 문화 참여라는 의미에서 제일그룹의 문화공간 확대는 바람직하고 긍정적이다. 핵심은 아르떼뮤지엄 부산이 피아크와 연계해 지역 문화 예술에 새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우선 두 공간의 시너지 효과는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탁 트인 바다 전망까지 갖췄으니 더할 나위 없다. 다만 지역 문화를 선도할 전진기지 역할을 하려면 주변 공간과의 연계, 지역 사회와의 지속적인 소통과 협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에 바다 문화 콘텐츠를 갖춘 인근 국립해양박물관과의 연계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까운 곳에 상승효과를 끌어낼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르떼뮤지엄 강릉은 참고할 만하다. 아르떼뮤지엄 강릉 주변에는 볼거리가 풍부하다. 전시관 근처에 조선 중기 문인 허균과 허난설헌을 기리는 기념 공원이 있다. 공원 내 허균·허난설헌기념관에는 두 사람의 작품과 자료가 전시돼 있어 그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인근에는 강릉의 대표 아이콘인 경포호가 있고, 호수 주변에는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경포호 근처에는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로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인 선교장(국가민속문화재)이 있다. 미디어아트를 경험한 뒤에도 문화를 누릴 콘텐츠나 기반 시설이 주변에 갖춰져 있다는 얘기다. 아르떼뮤지엄 강릉이 개관 1년 만에 100만 명의 관람객을 넘어설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주변 인프라도 큰 역할을 했다.
아르떼뮤지엄 부산이 지역 문화를 견인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반 확충 등 체계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참에 피아크와 아르떼뮤지엄 부산이 영도에 새로운 문화 활력을 불어넣고, 긍정적 변화를 끌어내는 지렛대가 되길 기대해 본다.
2024-07-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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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국가대표팀 감독 선정에 또 난장판 된 축구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 축구계가 국가대표팀 감독 선정 문제로 또 시끄럽다. 대한축구협회가 이달 7일 차기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홍명보 울산 HD 감독을 선임하자, 축구계 안팎에서 협회의 불통 행정 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끓고 있다.
축구협회는 지난 2월 국가대표팀 내 불화와 전술 부재로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을 경질할 때도 책임 떠넘기기와 무능 행정으로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는데,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서 팬들의 실망감만 깊어지고 있다. 이번 홍 감독 선임 역시 미리 대상자를 정해 놓은 채 충분한 협의도 없었다는 내부 폭로까지 나와 후폭풍이 거세다.
■ 또 불거진 협회의 불통 행정
많은 사람이 반대하던 클린스만 감독 선임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던 대한축구협회의 일 처리는 이번에도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협회 내 소통은 없었고 정상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는 내부 지적이 잇따른다.
협회는 클린스만 감독 경질 이후 무려 100명에 가까운 후보군을 놓고 저울질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돌고 돌아 현직 K리그 감독인 홍 감독을 선임했다. 이 과정에서 감독 선임 업무를 맡았던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이 돌연 사임했고 이임생 기술이사가 뒤를 이어 이 작업을 지휘했다.
그런데 그동안 누구와, 어떤 조건으로 협상했는지 충분한 내부 소통이 없었다고 한다. 100명이나 되는 많은 후보를 만났는데도 적임자를 찾지 못해 결국 K리그로 눈을 돌려야 했다면 협회의 인물 정보나 협상 능력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라는 실무 조직이 무시당한 것도 문제로 떠올랐다. 박주호 전력강화위원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홍 감독의 선임은 절차 안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라며 이미 내부 분위기는 국내 감독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 부분은 이임생 기술이사가 8일 브리핑에서 “개별적으로 5명의 강화위원에게 ‘내가 최종 결정을 해도 되느냐’는 동의를 얻고 결정했다”고 밝혀 사실상 단독 결정임을 인정했다.
협회는 박 위원의 폭로에 ‘비밀유지 서약’을 어겼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지만 감독 선임 과정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이뤄지지 않은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영표 해설위원이 “(이임생 기술이사가) 강화위원들과 소통한 후 발표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됐다”고 말한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 홍 감독의 처신도 미스터리
홍 감독 스스로 자초한 논란도 있다. 홍 감독은 클린스만 감독 경질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차기 국가대표팀 감독엔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울산 팬들에는 “자신의 입장은 항상 같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거듭 말했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입장을 바꿨다. 대표팀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고려한 선택이라고 이해해도 울산 팬들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기다 홍 감독이 대표팀을 맡아 출전했던 2014년 브라질월드컵 당시 언행도 여전히 논란거리다. 선수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홍 감독은 브라질월드컵에선 이해할 수 없는 용병술로 적잖은 비판을 받았다. 아직도 회자하는 K리그 비하 발언과 ‘의리 축구’ 논란이 대표적이다.
당시 홍 감독은 유럽에 진출한 선수들에 비해 국내 K리그 출신 선수들의 ‘급’이 훨씬 떨어진다며 해외파 출신을 선호했다. 하지만 여기엔 일관성이 없었고 손흥민 선수를 제외하면 오히려 해외파보다 국내 리그 선수들의 활약상이 더 돋보였다. 이때 소속팀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겪던 해외파 선수의 기용을 고집해 의리 축구에 집착한다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대회 중 적절치 않은 음주·가무 회식과 선수들의 신구 조화 실패로 결국 1무 2패의 실망스러운 성적에 그쳤다.
■ 기로에 선 침체한 한국 축구
지금 축구계 분위기는 협회 행정에 대한 팬들의 불신과 올해 파리올림픽 출전 실패로 매우 뒤숭숭하다. 날씨로 치면 ‘매우 흐림’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2년 남은 2026년 북중미월드컵에서 국민 눈높이에 맞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축구협회는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할 수 있다.
협회의 계속되는 헛발질로 인한 팬들의 실망도 그렇지만 축구계 내부의 심각한 분열과 불신은 더 문제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장기 체제에 대한 축구계 내부의 불만과 이로 인한 소통 부재는 지난번 클린스만 감독에 이어 이번 홍명보 감독 선임 과정에서도 전혀 바뀌지 않은 채 똑같이 반복됐다. 이런 병폐는 당장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에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48장으로 늘어난 북중미월드컵 출전 티켓을 얻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팬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출전 자체는 당연하고 24강 진출 이상의 의미 있는 성적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불신과 냉소가 팽배한 상황이라면 될 일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이게 한국 축구와 대표팀을 바라보는 팬들의 걱정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4-07-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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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힙한 불교’와 ‘스님 주점’
승복 차림으로 셔플 댄스를 추며 ‘극락왕생’과 ‘부처핸섬’을 외치는 DJ ‘뉴진스님’(개그맨 윤성호)이 던진 파장이 적지 않다. 탈종교 시대에 종교의 가치와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까지 소환했다. ‘아무나 법복 입어도 되느냐’는 논쟁적 문제 제기도 나왔다. 하지만 한국 불교계는 뉴진스님으로 인한 불교 호감도 상승 효과를 반기는 분위기가 대세다. 엄숙주의 대신 일반인 눈높이로 접근한 것이 불교에서 멀어지는 젊은 층에 어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템플 스테이에 MZ 세대가 몰린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잊힌 불교를 일상의 화제로 불러냈기 때문에 “가뭄에 단비”라며 감격하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인 진우 스님은 ‘힙한 불교’를 전파한 공로로 뉴진스님에 디제잉 헤드셋까지 선물했다.
대만 공연을 거치며 상승세를 타던 뉴진스님은 말레이시아 공연 후 현지에서 ‘조롱’ 비판이 제기되고, 싱가포르 공연도 같은 이유로 불허됐다. 승려 복장 디제잉은 불경과 환호의 양극단으로 갈린다. 한국 불교의 개방성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뉴진스님 현상은 탈종교 시대의 유연한 변화상으로 봐야 그 의미가 읽힌다. 절로 향하는 발걸음이 줄고 특히 MZ 세대와 접점이 끊기면서 종단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끼던 차에 디제잉하는 스님이 나타났다. 종교가 사람들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일본도 종교 이탈 추세가 심각하다. 일본 종교연감에 따르면 불교계 신도는 1990년 9625만 명에서 2016년 8770만 명으로 1000만 명 가까이 줄었다. 존폐의 위기감을 느낀 사찰은 속세로 파고들었다. 찻집, 밥집은 물론 스님이 직접 운영하는 술집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6월 AP통신은 ‘유럽 교회에서 기도와 고해가 술과 춤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신자가 급감한 탓에 고색창연한 교회 건물이 식당, 나이트클럽, 호텔, 암벽 등반장으로 바뀌고 있다고 보도했다. 탈종교 현상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다.
탈종교 시대에 종교는 다양한 모습으로 시대와 조응한다. 해외 언론 보도에 소개된 사례를 살피면 추세가 읽힌다. 일본 사례는 후쿠오카에서 발행되는 <부산일보>의 자매지 <서일본신문> 기사를 인용한다.
■ 신도 급감, “모두 바꾼다”
‘신도 감소로 곤경에 처한 사찰이 생존을 위해 모두 바꾸고 있다.’
400년 넘은 명찰로 손꼽히는 도쿄 츠키지 혼간지(築地本原寺)의 변화상을 소개하는 기사 도입부는 시대 변화에 맞춰 지역 사회에서 역할을 계속 이어가려는 사찰의 혁신 노력을 강조한다. 사찰 내에 카페와 서점이 문을 열었고, 대학생과 공동으로 젊은 층을 겨냥한 식당도 운영한다. 특히 18가지 반찬을 내놓는 식당은 인스타그램에서 각광받는 명소다. ‘18찬 아침 밥상’이 인기를 끌면서 오전 8시 개점 전부터 대기 행렬로 장사진을 이룬다. 인적이 드물다시피 했던 사찰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사찰이 필사의 노력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까닭은 단가(檀家)의 급감 때문이다. 일본에서 단가 제도는 각 가정이 가족의 장례, 위패 봉안, 묘지 관리 일체를 사찰에 맡기는 대가로 시주를 하는 것이다. 시쳇말로 ‘사찰 구독제’다. 문제는 핵가족화와 저출생이 가속화되면서 단가를 매개로 한 관계는 급격히 와해되는 중이다. 2016년 ‘사찰의 미래’ 조사에서는 특정 사찰에 소속되어 단가를 유지하는 비율이 29%에 불과했다. 일본인 사이에 사찰은 점점 잊히는 존재가 되고 있다.
■ 승려가 운영하는 주점, ‘인생 상담’이 강점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번화가에 ‘매직 바 다쿠미’라는 상호의 이색 주점이 등장했다. 40대 이하 젊은 승려 4명이 차린 ‘스님 스나쿠’가 그 주인공. 스나쿠는 ‘스낵 바’의 일본식 준말로 종업원이 바를 사이에 두고 손님을 응대하는 방식의 주점이다. 중년 남성이 주 고객. 주점이긴 하지만 법당에 있는 듯한 느낌이 물씬 난다. 승복 차림의 스님들이 손님을 응대하고 바 위에는 목탁, 아미타여래상, 향로가 놓여 있어서다. 손님이 원하면 분향도 할 수 있다. 주 메뉴는 고민 상담, 부 메뉴는 칵테일이다. 주류 메뉴는 불경에서 따왔다. ‘윤회전생’은 보드카로 만드는 칵테일 ‘스크루 드라이버’다. ‘데킬라 선라이즈’에는 ‘극락정토’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정토종과 조동종 소속 승려들이 의기투합해 술집을 차린 이유는 불교 신자의 감소에 대한 대응 차원이다. 지역 사회와 사찰 사이에 접점이 상실되면서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사찰은 사람들이 와서 고민을 털어놓으면 들어주고 해결을 돕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절을 찾는 발걸음이 줄면서 고민 상담을 매개로 한 관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고민을 들어줄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주점을 열었습니다.”
취재 기자는 취기를 빌어 슬쩍 회사 선후배 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을 털어놨다. “인정 욕구가 너무 강한 게 아닐까요?” 무심결의 푸념이 인생 상담으로 이어졌다. 뒤늦게 입장한 손님들도 불교 장례 절차를 문의하거나 불교 용구 쓰임새를 놓고 대화를 이어간다. “관록이 묻어나는 스님 말투가 마음에 스민다”는 반응도 있다.
■ MZ 세대를 찾아 거리로 나간 불교
그윽한 조명의 카페 겸 바에서 승복 차림의 바텐더가 푸르고 흰빛을 띠는 칵테일을 만들고 있다. “아미타경의 ‘청색청광 적색적광 백색백광’ 구절을 이미지로 만든 칵테일입니다.”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번화가에 문을 연 ‘엥겔’은 ‘스님 카페 & 바’라는 콘셉트를 내걸었다. 젊은 세대와 만나기 위해 그들이 몰리는 거리 한가운데 들어간 경우다.
정토신종 혼간지파 소속 젊은 승려 8명은 ‘사찰종합연구회’를 통해 불교 이탈 현상을 극복하는 방안을 논의한 끝에 “지금까지 하지 않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지금 젊은 세대와 관계를 트지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이 끊길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MZ 세대가 몰리는 번화가를 택한 건 당연한 귀결이다.
간단한 칵테일은 내지만 고기나 생선 안주는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사찰 요리법을 적용한 채식 메뉴만 갖췄다. 가지와 토마토를 사용한 ‘정진(精進) 피자’, 토산 된장을 사용한 ‘된장국 피자’ 등이다. 상담이 주를 이루지만 염주 만들기 체험, 불경을 베껴 쓰는 사경 이벤트도 개최한다. 젊은 층에 친근한 불교 이미지로 다가가는 게 목표다.
■ 텅 빈 유럽 교회, 호텔·클럽 개조
2000년 동안 기독교 문화의 중심이었던 유럽은 이제 기독교인의 감소로 텅 빈 성당과 교회가 늘고 있다. 미국 AP통신의 지난해 6월 보도에 따르면 신도의 발걸음이 끊긴 성당과 교회가 카페, 콘서트장, 클럽, 호텔, 암벽 등반장으로 바뀌고 있다. 벨기에 메헬렌의 성심수녀회 교회는 신도가 없어 2년 문을 닫았다가 카페와 콘서트장으로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인근 프란치스코 교회는 고급 호텔로 재단장했다. 수도 브뤼셀의 파두아 성 안토니 교회는 2023년 암벽 등반 훈련장으로 바뀌었다. 교회가 문화, 레포츠, 접객 시설로 바뀌는 현상은 벨기에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전 유럽에 걸쳐 나타난다.
이와 달리 독보적인 콘셉트로 명소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도 있다. 맥주를 양조하던 수도원이 그 경우. 과거 순례자를 대접하는 한편 수도원 운영 경비 마련을 위한 맥주 양조가 지금은 지역 문화 자산으로 각광받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벨기에 베스트말레 수도원(Westmalle Abbey)이다. 이 수도원은 듀벨과 트리펠로 유명한 ‘트라피스트(수도원) 맥주’의 원조다.
수도원 입구의 레스토랑 ‘카페 트라피스텐’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곳에서 토산 음식과 수제 맥주를 맛볼 수 있는데 외딴 전원이라는 불편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항상 손님으로 붐빈다. 지역민의 생활과 문화에 밀착한 덕분일 것이다. 독특한 점은 요청이 있으면 푸드 트럭에 음식과 맥주를 싣고 어디든 간다는 점이다. 종교가 속세와 동떨어지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살아 숨 쉴 때 생명력이 배가되는 사례로 읽힌다.
종교는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를 추구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본연의 가치는 지키되 방편을 바꾸는 유연성도 필요하다. 뉴진스님이 던진 화두는 그 법명의 뜻 그대로 ‘어떻게 새롭게(New) 나아갈(進·진) 것인가’일 터. 탈종교 시대, 종교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를 모색할지 주목된다.
2024-07-06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