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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요리] 예언, 합리적 전망일까 사기일까
예언 전성시대다. 대지진, 3차 세계대전, 대홍수, 핵전쟁 등 대재앙을 불러올 사안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는 한 만화가의 예언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언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말하는 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전망이나 예측에 가깝다. 전망이나 예측은 주식 등을 거래하는 자본시장이나 국제 관계 등에서는 이미 일상화된 범주다. 흔히 말하는 통상적인 예언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비합리적 근거를 통해 미래 상황을 확정적으로 예단하는 것을 일컫는다.
비과학적, 반지성적인 것으로 의심되는 각종 예언의 사기성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인류가 현재까지 구축한 지식 체계로는 예언의 근거인 꿈이나 직감, 종교적 해석 등이 완전히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완전히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언의 핵심 기저인 ‘운명론’도 같은 이유로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으로 분류되는 상황이다. 특히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을 경우 교묘한 말바꾸기 등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도 많다보니 이런 경우엔 사기 여부를 둘러싼 논란만 가열될 뿐이다. 예언은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파고든다. 난세일수록 다양한 예언이 속출, 사회적인 피해를 유발하는 사례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등장한 수많은 예언 중 일부라도 적중했다면 인류가 현재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 꿈에서 본 7월 일본 대지진 예언
일본 만화가 타츠키 료가 발간한 ‘내가 본 미래’에는 올 7월 5일 새벽 4시 18분 동일본 대지진의 3배에 달하는 거대 쓰나미가 발생한다는 예언이 나온다. 1999년 처음 출간된 ‘내가 본 미래’는 타츠키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꾼 꿈을 기록한 일기 형태의 만화다. 그는 1998년 인도 여행 중에 일본 대지진과 관련한 예지몽을 꾸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열도의 남쪽 태평양 부근이 '펑'하고 솟아오르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번 예언이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은 해당 만화에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을 예견하는 장면이 묘사돼 큰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 정부는 지난해 시즈오카현 앞바다에서 규슈 앞바다까지 800㎞에 이르는 난카이 해구에서 수십 년 내 대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또 일본 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해 꾸린 태스크포스는 지난 1월 “30년 내 이 지역에서 규모 8~9의 대지진이 발생할 확률이 80%”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7월 5일을 전후해 규슈 가고시마현 남쪽 해상의 유인도 7개, 무인도 5개로 이뤄진 도카라 열도에선 소규모 지진도 장기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일본 대지진설’까지 퍼지면서 불안감은 갈수록 증폭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7월 5일 우려했던 대지진은 발생하지 않았다. 예언이 현실화하지 않은 것과 관련, 이 작가는 당시 7월 5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한 것은 출판사의 의향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는 다소 알쏭달쏭한 해명을 내놨다. 그러면서도 ‘2025년 7월’에 중대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계속 이어갔다. 이에 따라 그의 예언의 진위 여부는 7월이 지난 뒤에야 판가름 날 전망이다.
일본 정부와 기상청은 이 예언에 대해 허위 정보라며 일축하고 있다. 일본기상청 장관은 지난달 기자회견을 통해 “지진은 날짜·장소·규모를 특정해 예측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소동 전락한 실패한 예언의 역사
1992년 한국은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목사의 휴거 예언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휴거는 예수가 재림했을 때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가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7년 동안 환란을 겪다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인 셈이다. 이 목사는 당시 1992년 10월 28일 자정이 되면 전 세계 10억 명이 들려 올라갈 것이라며 정확한 시간까지 예언했다. 다미선교회 신도는 10만 명으로 추산됐다. 신도 중 상당수는 머리에 헬멧을 쓰고 휴거를 기다렸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발생한다고 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휴거론자들은 이 날짜를 추출하기 위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요한계시록을 차용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의사 겸 예언가로 1999년 지구 멸망을 예언한 인물로 유명하지만 이 예언도 맞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휴거론자들은 요한계시록 종말 부분에 ‘7년간의 짐승의 지배기’에 대한 언급이 있는 점을 감안,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멸망 시점에서 7년 앞인 1992년에 휴거가 와야 한다는 앞뒤가 맞지 않은 논리를 펼쳤다. 휴거 날짜 추출 근거가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당시 휴거 예언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사들이 취재 경쟁을 벌인 데 이어 외신 기자들까지 몰려와 취재 경쟁에 합류했다. 하지만 휴거는 없었다. 휴거 예언은 결국 휴거 소동으로 막을 내렸다.
미국에서는 1954년 12월 21일 자정에 대홍수로 종말을 맞는다는 이른바 ‘사난다 대홍수 예언’이 있었다. 가정주부와 대학교수 등이 대홍수를 예언한 편지를 받았는데 구원을 받으려면 ‘사난다 신’을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이들은 사난다 신을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어 종말론을 알리며 포교에 나섰다. 신도들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종말을 준비했다. 하지만 종말의 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들은 신이 자신들의 열성적인 기도에 감응해 홍수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바바 반가(1911~1996)라는 불가리아 예언가의 예언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갖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체적인 날짜나 지역을 명시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표현을 사용해 예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수많은 이들이 울고 바다가 육지를 삼킬 것이다’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거대한 국가가 조각날 것이다’라는 그의 예언이 1989년 소련 붕괴를 예견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2010년 유럽 인구 멸종, 2014년 핵전쟁 발발, 2016년 유럽의 이슬람화, 2018년 중국의 세계 지배 등 연도를 지정한 그의 예언은 연이어 빗나갔다. 인도의 점성술사 쿠샬 쿠마르도 행성 정렬 등을 근거로 2024년 6월 18일 또는 29일에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고 예언했으나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인류의 역사는 예언의 역사라고 할만큼 각 시대마다 다양한 예언들이 난무했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인 정감록이 있다. 정감록의 핵심은 ‘진인 정 도령이 나타나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것. 하지만 이는 실제 역사와 괴리를 보였다. 이와 관련,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의 영역에서는 예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신약성경 테살로니카 전후서와 베드로 전후서 등의 서간문, 요한계시록(요한묵시록) 등에서도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종말론 등에 기반한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예언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자세
예언은 대체적으로 어떤 목적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상당수 예언은 자신의 존재 부각, 모종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등의 감춰진 의도를 갖고 있다. 다미선교회처럼 종교적 정체성 구축이나 신도 확보 등을 위해 예언을 활용하는 사례도 많다. 이밖에 예언을 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이나 장애로 인해 망상을 실제 현실이라고 믿는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 특히 예언은 그 시대상과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거나 이용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예를 들어 정감록은 당시 무능한 지배권력의 폭정에 지친 민중들이 꿈꾸던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다미선교회 휴거 사태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향하는 시점에 대중들이 느끼는 세기말적 불안감을 교세 확장의 동력으로 삼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류는 현재 인터넷과 SNS 등으로 모두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촌 82억 명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뉴스와 가치관 등을 공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인해 개인과 국가의 빈익빈 부익부 등 경제 양극화 현상은 한층 이 시대 민중들의 삶을 한층 고단하게 만든다. 신냉전 체제가 갈수록 공고해지면서 국가 간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이란의 대치 등 자칫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는 상황들도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지구촌 국가들이 보유한 핵탄두가 지난 1월 기준 1만 2241개에 달한다. 인류는 핵전쟁으로 인한 멸절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기후 위기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초대형 산불과 가뭄, 폭염 등이 발생하면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런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각종 예언은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언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더욱이 요즘은 가짜뉴스 등 고의적으로 왜곡한 정보들이 온라인을 통해 무분별하게 유통되는 데다 개인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편식하는 경향도 무척 강해졌다. 특히 자기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틀린 사실조차 진실이라고 자기합리화하려는 경향성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즉, 우리 사회엔 인지부조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객관적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예언일지라도 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우려가 무척 커진 것이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건강한 ‘생각 근육’을 키우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세대를 이어가며 지적 체계를 한걸음씩 발전시켜왔다. 인류가 구축한 인문학적인 지적 체계들은 수많은 시간 동안 관찰과 실험, 가설 구축, 검증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확보한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이 지적 체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통해 ‘속여도 속지 않는 지적인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진의 경우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예측 불가능한 돌발적·즉각적 영역에 속한다. 또 일본에서 진도 1 이상 지진이 해마다 2000회 정도 발생하고 많을 때는 6500회까지 일어나는 데다 수십 년을 주기로 대형 지진도 반복된다는 과학적 사실을 안다면 이번 대지진 예언에 대한 다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가 일본 지진과 관련된 예언을 한다면 우연히 적중할 확률이 높다는 점도 알게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왜곡된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인지부조화 현상을 겪을 우려가 있다. 특히 지진과 같이 경험칙에 기반한 예언은 인간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 또는 SNS 접촉을 중단하고 공신력을 가진 정보 매체를 이용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5-07-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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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러브버그’ 공습, 부산은 안전하나?
최근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여름 불청객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가 집단 출몰하면서 시민 불편이 커지는 상황이다. 러브버그는 도심과 주택가, 산림을 가리지 않고 무리 지어 나타나 차량과 사람에 달라붙거나 시야를 가리면서 불쾌감을 주고 야외 활동에 지장을 준다. 러브버그를 두고 “유해 곤충이니 당장 퇴치해야 한다”는 의견과 “생태계에 유익한 익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수도권과는 달리 부산에서는 러브버그의 대량 출몰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수도권은 ‘러브버그’와의 전쟁
러브버그는 그동안 은평·서대문·마포구 등 서울 서북부 지역에서 주로 목격됐다. 그러나 최근엔 서울 전역에서 출몰하고 있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러브버그 관련 민원은 매년 증가했다. 2022년 4418건이던 신고 건수는 2023년 5600건, 지난해 9296건에 달했다. 올해도 상반기에만 이미 4695건이 접수됐다. 러브버그 급증 현상은 시민 생활 전반에 걸쳐 불편과 위협이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러브버그는 두 마리가 붙어 떼로 몰려다니며 인간에게 달라붙어 혐오·불쾌감을 유발한다. 자동차 유리에 붙어 안전 문제를 불러오기도 하고, 사체가 쌓이면 산성을 띤 내장이 건축물과 자동차 등을 부식시킨다. 식당, 카페, 편의점 등 업장에 피해를 주어 매출 감소 같은 경제적인 피해로 이어진다. 최근 인천 계양산 일대에서는 벌레 사체가 등산로에 10cm 이상 쌓인 모습을 포착한 사진과 영상이 잇따라 SNS를 중심으로 올라온다.
■ ‘러브버그’ 부산은 괜찮은가?
러브버그가 수도권을 뒤덮은 데 비해 부산 지역 16개 구·군에는 아직 관련 신고나 민원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정확한 원인을 단정할 순 없으나, 이동 범위가 좁은 러브버그 습성과 수도권에 비해 불리한 성장 환경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러브버그 성체는 일주일 안팎 활동하는데, 러브버그의 비행은 이동이 아닌 짝짓기에 목적이 있다. 번식 장소에서 다시 번식하기에 다른 장소로 확산하는 확률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공주대 생명과학과 도윤호 교수는 “2015년 처음 인천에서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수도권 주위로만 출몰하고 있다”며 “자동차에 붙어서 이동하는 ‘인위적 이주’ 등을 제외하면 수도권에 주로 출몰하는 러브버그가 부산권역까지 갑작스레 확산할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또 러브버그 유충은 낙엽이 많이 쌓여 있고, 토양 유기물이 풍부한 곳에서 성장한다. 이에 수도권처럼 활엽수림이 많이 분포한 지역에서 성장하기 유리하다고 한다. 반면 부산은 소나무 같은 침엽수림의 비중이 비교적 높아 성장이 불리하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한 시민이 부산에 러브버그 20마리를 채집통에 담아 숲에 풀었다는 소식이 온라인에 확산하면서 논란이 됐다. 이를 통해 러브버그가 부산에 확산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박현철 부산대 생명환경화학과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능성이 작다고 전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외래종이 확산하기 위해서는 교미해서 알을 낳을 수 있는 적절한 번식 환경이 필요한데 이를 찾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유기물이 많은 장소에 갖다 놓지 않는 이상, 그냥 풀어놓고 날린다고 해서 확산할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반면 김현우 낙동강에코센터 전시기획팀 곤충 모니터링 담당자는 “기후변화로 어떤 곤충이 국내에 대량 출몰할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곤충의 종류도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상황의 변화가 발생했을 때 시의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에서 부산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종 해충인 유리알락하늘소가 몇 년 전 부산 삼락생태공원 등 낙동강 수변 지역에서 번식해 버드나무 서식지를 파괴하기도 했다”며 “물류 이동이 많은 부산항의 특성을 고려할 때 외래 곤충 유입 가능성에 대해 더욱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연구원은 ‘서울시 유행성 도시해충 대응을 위한 통합관리 방안’ 정책리포트에서 현재와 같은 추세로 기온 상승이 지속될 경우 2070년에는 한반도 전역에 러브버그의 확산이 예측된다고 분석했다.
■ 러브버그는 어떤 곤충
러브버그는 중앙아메리카와 미국 남동부 해안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약 1㎝ 크기 파리과 곤충이다. 공식 명칭은 ‘붉은등우단털파리’(학명 플리시아 니악티카)다. 짝짓기를 하거나 날아다닐 때도 암수가 쌍으로 다녀 ‘러브버그’로 불린다. 이 곤충은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 ‘익충’이다. 토양 환경을 정화하고 꽃의 수분을 도우며, 어류·새·곤충의 주요 먹이가 된다. 이슬이나 꽃의 꿀을 먹고 사는데, 독성이 없고 사람을 물진 않는다. 밝은 불빛을 좋아해 도심에 특히 많이 발생한다.
러브버그는 초여름인 6~7월에 개체 수가 급증한다. 수컷은 3~4일 만에 죽고, 암컷은 약 1주일 동안 살면서 습한 땅에 수백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 그동안 대규모로 나타난 뒤 2주가량이 지나면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한다. 전문가들은 7월 중순쯤엔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 국내 유입은 언제 됐나
외래종인 러브버그는 2015년 인천에서 처음으로 알이 발견됐다. 이후 2022년 서울시 은평구, 경기 고양시 등 서북부 지역에서 대량 발생하다가 지금은 서울시 25개 모든 자치구와 인근 경기 지역에서 보고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원래 중국 동남부·대만·일본 류큐 제도 등 북위 33도 이남 아열대 지역에 분포했는데, 기후변화와 함께 북상하다가 한반도까지 넘어왔다. 국립생물자연관이 중국과 대만, 일본 등지에 있는 러브버그 표본을 확보해 유전자 분석한 결과, 국내에서 발생하는 러브버그는 중국 산둥반도의 칭다오 지역에서 물류 교역 과정을 통해 인천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기후 위기와 산악 지역 주변의 도시 개발 등으로 이 벌레가 북쪽으로 확장한 것으로 본다. 러브버그는 LED 불빛을 좋아하며, 도심 열섬 효과에 강하다고 한다. 서울대 연구팀이 국내에서 채집된 러브버그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이들이 도시에 살기 적합한 살충제 저항성과 열 스트레스 적응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러브버그는 대개 민가와 가까운 공원이나 아파트 주변 등에서 많이 나타난다. 유충은 유기물이 많은 토양에서 잘 자란다. 도심의 정원, 가로수 아래, 쓰레기나 퇴비 등이 좋은 서식지가 된다.
■ 천적이 없는 이유
러브버그는 특별한 천적이 없다. 새, 개구리, 두꺼비 같은 대표적인 포식자들도 이 곤충을 잘 먹지 않는다. 신맛이 나고 끈적한 체액을 지녀 대부분의 새가 먹이로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껍질도 단단해 개구리와 같은 양서류들도 먹기를 꺼린다. 이런 천국 같은 서식 환경이 대발생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원래 해외에서 새로운 생물이 유입되면 기존 생물들이 이들을 먹이로 인식하고 잡아먹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엔 천적이 없어서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조절되는 경우가 많다. 까치, 참새 같은 새들과 거미류, 사마귀와 같은 생물들이 러브버그를 잡아먹는 광경이 종종 목격된다고 한다.
■ 대처 요령과 방역 가능성은
전문가들은 러브버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밝은색 옷을 피하고 어두운색 옷을 입을 것을 권한다. 러브버그가 밝은 색을 꽃으로 착각해 달려들기 때문이다. 야외 활동 시 피부 노출을 최소화하고, 창문이나 출입구 방충망의 틈새를 꼼꼼히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러브버그는 오래 비행하지 못하고 날개가 약하고 물을 싫어한다. 유리창이나 차에 붙은 러브버그는 물을 뿌려서 제거하면 된다. 또 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발생 기간에는 생활 조명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실내에 러브버그가 들어왔을 땐 분무기를 이용해 물을 뿌리고 휴지로 치우면 된다고 한다.
러브버그는 유충 시기 유기물을 분해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익충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법적으로 병해충 방제 대상이 아니다. 현재 국내 법령상 직접적인 방역·관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등은 질병 매개 곤충에 대한 관리만 규정하고 있다. 자치구 차원 방역도 모기·바퀴벌레 등 위생 해충에 집중돼 있다. 살충제를 이용한 전면적 방제도 쉽지 않다. 러브버그가 전통적 해충이 아니며, 무분별한 화학 방역은 생태계 균형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러브버그가 질병을 매개하지 않더라도 개체 수가 급증해 시민의 일상에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유해성 도시 해충’으로 지정해 관리 대상의 폭을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구온난화와 도시열섬 현상으로 제2, 제3의 러브버그 출현 가능성이 높아 보다 적극적인 방제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당분간 러브버그 관리 방안에 대한 갑론을박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2025-07-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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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스피릿, 일본 보리소주 되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일본에서 한국어를 일상에서 쓰는 곳이 있다. 도모다치(友達·친구) 대신 한국어 발음 그대로 ‘チング(친구)’로 쓰고, 친구끼리 놀자고 부를 때도 ‘(같이) ノラ(노라)’라고 한다. 바지는 ‘팟치(パッチ)’로, 밥과 배(선박), 아가씨는 아예 발음까지 같다. ‘도망갔다’를 통째로 음차한 ‘도망캇다’(トーマンカッタ)는 야반도주를 의미한다. 부산에서 50㎞ 떨어진 쓰시마(対馬), 여기서 30㎞ 남쪽에 위치한 이키(壱岐) 이야기다.
■ 한반도 교류 영향 ‘친구’ 상표 소주까지
이키는 일본 보리소주의 발상지로 독특한 맛과 향으로 인기가 높아 일본 전역으로 유통된다. 특이한 소주가 있는데, 상표가 ‘친구(ちんぐ)’다. 이 술을 만든 오모야(重家)주조는 ‘친구’를 상표로 등록한 이유를 한일 교류의 상징성과 지역 정체성을 담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외래어 표기 때는 가타가나(チング)를 쓰는 게 원칙인데, 자국어와 같은 히라가나로 쓴 점에서 이 지역 사람들이 ‘한국 친구’를 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키섬은 경남 거제도의 3분의 1 크기에 인구 2만 5000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보리소주 양조장은 7곳이나 되고, 양조장 투어까지 인기다. 이 보리소주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증류 기술에서 유래했다고 일본 국세청은 공식 문서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에서 증류 소주의 자리를 희석식 소주가 대체하며 주류로 떠오른 사이 일본은 우리에게서 배운 증류 문화를 발전시켜 오늘날 위스키 선진국 반열에까지 올랐다.
부산에서 이키섬으로 가는 뱃길이 코로나19 때 끊긴 여파가 길어지다 올봄 연결 배편이 취항하면서 다시 문호가 열렸다. 갓 볶은 보리에서 나는 구수함에다 왠지 낯선 산미까지 갖춘 이키 보리소주를 들이켜면서 조선의 ‘스피릿(spirit·증류주)’이 남긴 길고 긴 잔향을 음미했다.
■ 한국 소주(燒酒) vs. 일본 소주(燒酎)
맥주, 와인, 청주 등 발효주에 열을 가해 기화가 빠른 알코올만 추출한 뒤 향미를 더해 숙성한 것이 스피릿, 즉 증류주다. 보리 농사가 잘 된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보리 발효주(즉, 맥주)를 즐기다 증류 기술을 알게 되면서 탄생한 것이 위스키(즉, 스카치)다. 벼 재배 지역에서 청주(한국), 사케(일본)를 즐겼고 이 발효주가 증류 소주로 발전한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니혼슈(日本酒)로 부르는 사케는 쌀 발효주인데, 어원이 우리말 ‘삭히다’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술은 문명 교류와 얽혀 있다.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몽고군이 갖고 온 소줏고리(증류기)를 통해 스피릿 제조술을 배웠다. 조선 왕조가 무역과 외교 목적으로 쓰시마와 이키에 소주를 하사하면서 증류 기술이 대한해협을 넘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시대의 소주는 귀하디 귀한 존재였다. 쌀 1㎏으로 45도 안동소주 기준 720mL 1병을 겨우 얻을 수 있다. 단순한 음용 목적으로 쓸 수는 없고 제의나 외교에 쓰인 이유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임금은 쓰시마에 한 번에 많게는 몇십 병씩 하사했다. 식량 부족으로 수시로 금주령이 내려지던 시절이었으니 지나친 감이 든다. 국경 관리와 무역 경유지로 중요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데, 산지가 많고 농지가 부족한 쓰시마는 곡물이 부족해 소주가 뿌리내리지 못한 반면 이키는 쌀과 보리 농사가 적합한 평야라 증류 문화가 꽃피게 된다.
소주는 ‘불사를 소(燒)’와 ‘술 주(酒)’로 쓴다. ‘끓여 만든 술’이라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증류 소주가 심화 발전하면서 표기까지 달라졌다. ‘술 주(酒)’ 대신 ‘진한 술’, 즉 ‘주(酎)’를 써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발효주에는 ‘酒’, 소주는 ‘燒酎’로 써서 구분한다.
■ 구연산 가득한 보리소주
조선 시대에도 맥주가 있었다. 15세기 어의 전순의가 저술한 ‘산가요록’에는 ‘맥주’ 레시피가 서술되어 있다. 멥쌀 한 말로 밑술을 만든 뒤 곱게 찧은 보리쌀 네 말로 덧술을 하라고 되어 있다. 곡물 비율로 보면 쌀 20%, 보리 80%다. 보리로 만든 술이지만, 오늘날의 맥주와는 다르고 ‘보리 막걸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한때 보리술 명맥이 끊겼지만, 최근 전남 강진, 제주도 등 보리 재배지에서 과거의 보리소주를 재현한 상품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키의 보리소주도 쌀로 1차 담금하고 2차 발효 때 보리를 추가한다. 곡물 비중은 쌀 3분의 1, 보리 3분의 2. 조선 맥주와 주재료의 비중은 엇비슷하다. 완성된 발효주는 증류를 거쳐 탱크나 오크통에 1년 이상 숙성한다. 숙성 기간과 용기에 따라 풍미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한데, 이키 보리소주의 맛과 향은 특별한 비법 덕분에 다른 지역 소주와 확연히 구별된다.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타피오카로 발효한 주정(알코올 100%)에 물을 섞어 도수를 낮춘 희석식 소주가 각광을 받았다. 저렴한 데다 무색, 무취, 무미의 특성이 한국의 맵고 짠 음식과 궁합이 맞았다. 일본 소주는 쌀, 보리, 고구마, 메밀 4종류 곡물로 만드는데 제각각 원재료의 풍미가 개성적으로 드러나는 게 특징이다. 고구마소주를 머금으면 고구마 빼때기의 향이 생기발랄해서 강렬한 인상이 남는다. 쌀소주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강점이다. 메밀소주는 메밀 특유의 고소하고 담백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이키 보리소주 맛을 보기 위해 양조장을 찾아 나섰는데, 이키노쿠라(壱岐の蔵)주조, 켄카이(玄海)주조는 무료 견학 프로그램, 자료관, 시음장을 갖추고 있어 친철한 설명과 함께 비교 음미할 수 있었다. 한데, 통상의 구수한 맛을 넘어서는 청량함과 신맛이 도드라진 점은 낯설었다. 익숙치 않은 소주 맛의 비결은 백국균이었다. 사케 제조 때 쓰이는 당화제 역할의 백국균을 이곳 이키에서만 전통적으로 사용한 결과, 맛의 차별화가 이뤄진 것이다. 백국균은 사케 맛의 특징인 구연산을 다량 생성하는데, 그 때문에 소주에서 경쾌한 산미를 느끼는 대목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친구’ 소주와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오모야(重家)주조는 코로나19 이후 견학 프로그램을 중단한 상태라 5월말 방문 당시 관람객을 받고 있지 않았다. 코로나19의 시간을 기다려 멀리 부산에서 ‘친구’가 찾아왔다고 하자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 이키를 떠나며 한일 양국의 친교를 상징하는 ‘친구’ 양조장 견학이 재개되기를 기원했다.
■ 지리적 표시 인증으로 전통 보존
전통주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 조건이라는 테루아(terroir)와 함께 지역의 문화가 어우러진 결과다.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생산된 특정 방식의 발포성 와인만을 ‘샴페인’으로 부르는 이유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의한 ‘지리적 표시(Geographical Indication, GI)’ 인증제는 지역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제도다. 그 조건은 해당 지역의 농산물로, 지역 고유의 제법으로 빚은 술에 한정되고 인증을 받으면 저작권으로 인정돼 법적 보호를 받는다.
일본은 소주의 향토성을 보호하기 위해 일찌기 GI 인증을 통해 보호, 육성하고 있다. ‘이키 소주’라는 명칭은 이키에서 생산된 쌀과 보리, 물을 사용하고, 백국균 투입 등 전통적인 제조법을 고수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고구마소주로 유명한 가고시마 지역도 ‘사츠마 소주’라는 GI 인증으로 보호받고 있다. 지역의 주력 산업인 농업과 직접 연계되는데다, 향토성과 지역 문화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지역 사회의 자부심을 이룬다.
일본의 소주 기술이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증류주 문화가 단절을 겪으면서 지체된 건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최근 전국 각지에서 증류주 신제품이 도전장을 내고 있는 상황은 반갑다. 쌀소주가 먼저 포문을 열었고, 그 뒤를 잇는 보리소주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병영, 황금보리소주, 백제보리소주, 가파도 청보리, 진한 블랙, 모리, 번트보리25, 사락, 애 등 전국적으로 다수의 보리소주가 출시되고 있다. 또 고창 복분자주, 진도 홍주, 서천 한산소곡주 등은 GI 인증을 받았다.
이키를 떠나오면서 ‘부산의 향토성’이라는 화두가 머리를 맴돌았다. 고구마 시배지였던 데에 착안한 ‘영도 고구마소주’나, 낙동강 하류 평야 논농사 지역인 점을 살린 ‘강서 쌀소주’는 가능하지 않을까?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술만큼 흡입력이 강한 관광 자원은 없다. 금정산성막걸리가 있지만, 지역 특산물과 향토성이 어우러져 스토리텔링까지 가능한 지역의 명품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 이키 가는 길 = 대아고속해운의 씨플라워호가 3월 쓰시마 항로에 본격 재취항하면서 부산항~이즈하라항 뱃길이 열렸다. 편도 2시간 30분. 온라인 예약 가능. 이즈하라항에서 이키 아시베항까지는 고속선 비너스호를 타야 한다. 편도 1시간 5분. ‘규슈 유센(九州郵船)’ 한글 사이트에서 예약 가능.
2025-06-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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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가 풀어 본 6월 모의평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여기 전설의 문제가 하나 있다. 2019년 대입 수능 국어의 비문학 영역 31번 문제다. 문제를 이미 접한 이들도 많겠지만 50대 ‘아재’ 세대인 필자는 처음 접하게 된 문제다. 옛날 과학 시간에 보았을 법한 그림과 영어 기호, 어휘들이 마구 등장하는 이 문제를 처음 접하고는 이 문제가 국어 영역에서 나왔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아무튼 전문가들이 국어의 비문학 영역이라고 출제한 문제라고 하니 한 번 풀어보기로 했다. 국어 영역이니 매일 글 다루는 입장에서 그래도 문제를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한참을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순전히 글만으로 논리를 구성해 이해를 해 보려 해도 부피와 밀도, 질량, 거리 등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알지 않고서 저 문제를 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저런 분야에 관심을 갖고 기본지식이 있는 이과생에게 훨씬 유리한 문제이므로 국어 영역 평가 대상으로 부적절하지 않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이 문제는 킬러문항으로 꼽혔고 지나치게 난해한 출제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이 직접 송구스럽다며 사과를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다. 그 사이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3년 고교 교과과정을 벗어난 킬러문항 배제 등을 내세우자 수능을 손봐야 한다는 여론이 불붙은 적이 있다. 그해 말 있었던 수능에서 킬러문항이 사라지고 준킬러문항으로 대체됐다는 식의 소식이 전해졌다. 교육 당국은 이 같은 변화를 두고 그동안 출제를 놓고 온갖 시비에 휩싸였던 수능이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자평했다. 과연 그렇게 됐을까.
이달 초 마무리된 조기대선은 그 치열함과는 대조적으로 수능을 비롯한 대입 수험생들의 진학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나오지 않았다. 수시와 정시로 굳어진 대입체계가 해를 거듭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으로 봤거나 고등학생이나 수험생들의 현실까지 들여다 볼 여유가 없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시를 위한 각종 준비에서 과도한 스펙 쌓기에 시달리는 와중에 내신을 위한 교내 시험 준비에다 고교 교과서와는 별개 시험에 가까운 수능을 준비하느라 살인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이 모든 일들을 학생 스스로 다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가 궁금할 정도다. 자신들도 수험생 시절이 있었다면서 학생들에게 마냥 공부하기만 강요하는 기성세대들은 학생들이 치르는 모의평가라도 한 번 들여다 본 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래서 지난 4일 치러진 6월 모의평가를 한 번 직접 들여다 보기로 했다.
■50대 논설위원이 풀어본 국어
수험생들에게 '1교시의 악몽'으로 불린다는 국어에서부터 글을 주로 다루어 온 필자에게도 좌절감을 듬뿍 안기는 문제들이 즐비했다. 출제자가 교과서 내용 암기를 벗어나 상식선의 언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짐작되는 국어 10~14번 문제를 상식선의 언어 능력으로 풀어보기로 했다.
일단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지문이 길어 읽고 이해하는 데에만 한참 걸렸다. 그리고 곧장 좌절감이 몰려왔다. 청정 에너지인 수소의 운송 과정 장단점을 암모니아와 비교하고 수소연료전지의 친환경성을 강조하는 게 주요 내용이지만 상세한 화학적 원리 부분은 화학 공부를 손 놓은 지 오래돼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교 과정에서는 이와 관련한 학습이 이뤄지는지 몰라도 글 내용만 가지고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문제는 화학적 원리에 대한 이해를 묻기 시작했다. 다시 지문과 보기를 오가며 읽어봤지만 결국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했고 한 지문에 딸린 4개의 문제를 푼 결과 2개나 틀리고 말았다. 화학 원리를 빼고 글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 10번과 어휘를 묻는 13번은 맞췄다는 걸로 위안을 삼기엔 이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험생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이에 대해 EBS 측은 수능특강 독서 249~252쪽 지문과 연계돼 있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풀 수 있는 문제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 지문조차도 그게 왜 국어의 독서 분야에 나와야 하는 것인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EBS 측은 수능 연계교재 지문 내용을 학습한 수험생이라면 저 문제 푸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왜 국어 공부를 하면서 저런 지문의 내용까지 학습을 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저런 지문은 당연히 기존의 문과생에겐 화학 공부를 별도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다. 국어는 그야말로 언어 이해를 다뤄야 하는 영역이 아니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수학이나 탐구 영역은 공부를 놓은 지도 오래된 데다 별도의 학습이 필요하므로 관련 분야에 조예가 깊은 분들에게 분석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수학이 문이과 통합으로 바뀐 뒤 많은 영역이 교과과정에서 빠지고 이에 따라 미분과 극한을 극도로 꼬아 만든 문제들만 새로운 경향이라고 출제되면서 그런 경향을 익히지 못한 수험생들을 수포자로 내몬다는 얘기들이 있으나 개인적인 능력으로는 확인이 어려운 듯해서다.
■공교육을 누가 망치고 있나
아무튼 모의평가를 일부나마 들여다 본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런 시험이 공교육을 망치는 주범이 아닐까’였다. 학교 수업과의 상관 관계보다는 차라리 지능검사나 적성검사에 가까운 시험이라는 게 개인적인 인상비평이다. 수능이 처음 등장할 때에도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학에서 수학하는 데 필요한 적성을 검사해 대학이 참고하도록 하겠다던 게 첫 설계자들의 포부였다. 그런 포부에 비춰 본다면 교과 과정을 벗어나 온갖 적성과 지능을 검사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아들 딸들이 그런 지능검사 같은 평가를 통해 진학할 대학이 달라진다고 한다면 거기에 동의할 학부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 많은 학부모들은 지금도 학교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자신의 아들 딸들이 수능 시험 잘 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대입 체계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수능은 끝내 지금처럼 교과서와 교과과정을 벗어난 길을 계속 갈 것이다. 그렇게 그 해 수험생들만 해마다 고통을 짊어지고 나면 끝나는 폭탄 돌림이 계속되는 사이 공교육 정상화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능 점수 기반으로 뽑는 정시 모집이 전체의 30%가 되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자위하기엔 비루하다. 어차피 대학별 최저 등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저런 류의 시험에 정력을 쏟아야 하는 건 학생들에게 변하지 않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이 모르는 사이 수능은 창의력과 응용력, 융합적 사고 따위 화려한 미사여구를 앞세우며 학교 교육과 점점 멀어지면서 국어 영역에서 화학 공부를 해야 하는 식이 돼 버렸다. 담당 과목 교사들도 풀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사교육 없이 학생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돼 버린 이 수능을 정상화하지 않고서는 공교육 정상화는 영원한 구두선으로만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2025-06-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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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BTS는 다녀왔다, 제도는 변했는가?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드디어 군 복무를 모두 마치고 팬들 곁으로 돌아온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복무해 온 슈가가 오는 21일 소집해제하면 진, 슈가, 제이홉, RM, 지민, 뷔, 정국, BTS 모든 멤버가 군 복무를 마치게 된다. 구성원 모두 복무를 성실히 수행해 병역 의무 이행의 공정성을 직접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수년간 세계 무대에서 K팝의 위상을 높인 그들이었지만, 국방의 의무 앞에서는 단 한 명도 예외가 없었다. 이제 불과 일주일 뒤면 다시 7인 완전체로 돌아와 마이크를 잡을 준비를 마친다. 하지만 이들의 군 복무는 단순히 의무 이행을 넘어 우리 사회에 깊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병역특례는 누구를 위해 제도인가?” 그리고 “지금의 이 제도는 과연 공정한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BTS도 다녀왔는데, 왜 또 이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다녀온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다녀왔음에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군대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대한민국 병역특례제도의 모순이다.
■ 병역특례, 왜 만들어졌나?
병역특례제도는 병역 의무의 일부 또는 전부를 대체 복무로 전환해주는 제도다. 1973년 국위 선양과 문화 창달에 기여한 예술 및 특기자에게 군 복무가 아닌 체육·예술요원으로 복무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대체 복무지만 실질적으로 군 면제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례 대상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국제콩쿠르 등 대회에서 입상한 체육·예술요원’ ‘국가 산업발전 목적의 전문연구·산업기능요원’ ‘공공의료 분야에서 복무하는 공중보건의사’ 등으로 나뉘지만, 현재는 대부분 체육·예술 분야 중심으로 운영된다. 체육인은 올림픽 3위 이내, 아시안게임 1위 입상 시 특례가 적용된다. 예술인은 국제예술경연대회 2위 이내, 국내 대회 1위 수상자, 또는 중요 국가무형문화재 전수 교육 이수자가 대상이다. 이들은 4주간의 기초 군사훈련과 544시간의 사회공헌활동을 수행하면 병역을 이수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이 제도의 타당성과 공정성에 대한 비판이 있어 왔다.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이 참가국이 8개국뿐인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병역 혜택을 받자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여론이 거셌다. 아시안게임 종목에 e스포츠, 바둑, 브레이킹댄스 등이 포함되며 “이게 과연 스포츠냐”는 논란도 이어졌다. 문제는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점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 2006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4강 진출 시에도 예외적으로 특례를 부여한 사례가 있어 제도가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이 많았다.
■ BTS의 병역 의무 완료의 의미
BTS는 단 한 번도 병역 특례를 요구한 적이 없다. 영향력과 성취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특례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그 논의에서 한발 물러났다. BTS는 ‘국가 브랜드’로서 K팝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 빌보드 핫 100 정상, 전 세계 스타디움을 매진시키는 투어, UN 총회 연단에서 전한 세대의 목소리. 이는 기존 병역 특례 대상인 올림픽 메달리스트나 국제 콩쿠르 수상자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문화의 파급력과 세계적 인지도 측면에서 더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회와 여론은 수년간 BTS를 포함한 대중문화예술인의 병역 특례 확대에 대한 논의를 반복해 왔다. 그럼에도 BTS는 침묵했고, 조용히 입대해 복무를 성실히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다. 이들의 병역 이행은 단지 아이돌 그룹의 군 복무를 넘어, 우리 사회가 병역특례제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오늘날 MZ세대는 공정성과 다양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투명성, 결과의 납득 가능성이라는 기준을 통해 사회의 제도와 관행을 끊임없이 점검한다. 단순히 “다 같이 고생하자”보다는 “각자의 상황에 맞는 공정한 잣대가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맥락에서 BTS의 선택은 하나의 ‘공정성 실험’처럼 작용했다. 그들이 특례를 받지 않았기에 오히려 ‘왜 이들은 특례 대상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BTS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기존 병역특례제도의 정당성과 공정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 병역특례, 지금 그대로 공정한가
현행 병역특례제도는 특히 K팝 아티스트는 명시적으로 배제돼 있다. 이 기준은 심각한 시대착오성을 드러낸다. 문화의 중심이 명백히 이동했다. 전통 예술과 아마추어 스포츠만이 국가 이미지를 대표하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BTS의 월드투어가 수십만 관객을 동원하고,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전 세계를 사로잡는 시대다. 이들이 쌓아 올린 문화적·경제적 가치와 국가 브랜드 제고 효과는 기존 특례 대상 분야의 성과와 비교해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더 널리, 더 깊게, 더 즉각적으로 한국을 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제도는 여전히 전통 문화 중심의 낡은 프레임에 갇혀 움직이지 않는다. 문화적 영향력의 판도가 바뀌었음에도 기준은 그대로 정지돼 있다.
BTS의 존재는 이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UN 연단에 섰고, 빌보드 1위를 기록했으며,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병역 제도는 이들을 ‘국위 선양’의 자격을 갖춘 인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인기’에 기반한 문화 산업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관계자의 답변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다. 문제는 이 같은 특례 제도가 더 이상 “공정한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많은 국민이 체감하는 바와 같이, 어떤 분야의 인재는 병역 면제 혹은 대체 복무로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반면, 다른 분야의 인재는 오히려 병역이 경력 단절의 고통으로 작용한다. 특히 대중문화 분야의 세계적 성과는 정작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BTS는 UN 연설, 빌보드 1위, 미국 백악관 초청, 각종 국제 시상식 수상 등으로 국가 이미지를 드높였지만, 이 같은 성과는 병역특례 기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클래식은 되고, K팝은 안 되는’ 이 기준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 모두가 BTS처럼 할 수 있는가
BTS가 비교적 원활하게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던 건 몇 가지 특수한 요건 덕분이었다. 이들이 보여준 성숙한 시민 의식도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세계적 성공을 이룬 ‘성장 완료형’ 그룹이었다. 데뷔 10년을 넘긴 그룹으로 탄탄한 팬덤과 뚜렷한 음악적 정체성도 공백을 감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전 세계 팬덤 ‘아미(ARMY)’의 흔들림 없는 지지와 소속사의 전략적 대응도 주효했다. 솔로 활동을 통한 존재감 유지, 입대 시점 분산, 복귀 준비 등 체계적인 관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K팝 산업은 훨씬 치열하다. 신인 그룹들이 쏟아지고, 데뷔와 동시에 글로벌 경쟁에 뛰어든다. 쉼 없이 콘텐츠를 생산하고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되는 구조다. 이런 환경에서 1년 반의 공백은 대부분의 그룹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BTS의 선택이 모두에게 공정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실질적 공정성은 단순한 형식적 평등과는 다르다. 병역 의무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이행 방식은 개인의 조건과 기여도에 따라 더 유연하게 설계될 필요가 있다. 이는 병역특례 혜택을 무조건 확대하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BTS의 군 복무 사례는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현행 제도는 K팝과 현대 대중문화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공정성은 모두 똑같이 입대하는 것인가, 아니면 분야별 특수성과 기여 방식을 고려해 실질적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가?”
■ 병역특례 새 기준 수립할 시점
병역은 국민 모두에게 부과된 의무이자, 공동체에 대한 헌신의 상징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예외는 신중하고 공정하게 설정돼야 한다. 다만 공정이 형식적 평등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정한 공정은 기여에 대한 정당한 인정에서 출발한다. BTS의 모범적인 병역 이행은 우리 사회가 병역 의무와 예외 제도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병역특례제도를 재검토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병역특례제도는 공정성 논란 속에 여러 차례 개편 논의가 있었지만, 특혜 시비와 형평성 문제로 번번이 무산됐다. 그러나 공정이란 ‘누가 혜택을 받는가’뿐만 아니라,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함께 따져야 한다. 클래식은 되고 K팝은 안 되며, 스포츠는 인정되지만 한류 문화는 배제된다면, 그 기준은 분명 낡았다.
전문가들은 병역특례제도를 비공식적으로 운영하기보다 투명한 기준과 국민 공감대 속에서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성취’를 기준으로, 공개 심사를 통해 특례 대상을 선정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논의의 핵심은 단순한 ‘혜택 조정’이 아니라 국가가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와 공정성의 기준을 새롭게 설정하는 일이다. 더 많은 청년이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를 빛낼 수 있는 시대, 우리는 그들에게 구시대적 장벽이 아닌 합리적 인정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제는 국가가, 사회가 답할 차례다.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BTS의 이 한 마디가 병역특례제도 개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
2025-06-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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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요리] 부울경의 미래 ‘반구천 암각화’
선사 문화의 정수를 담은 울산 울주군 반구천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전망이다. 반구천 암각화는 국보로 지정된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등 2종의 바위그림 유적을 일컫는다. 1971년과 1970년에 각각 발견된 이 암각화 유적들은 국보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선사인들이 남긴 인류 최고의 걸작이지만 많은 국보 중의 하나로 취급 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심지어 반구대 암각화는 아직까지 언제 또 물에 잠길지 모르는 서러운 세월을 감내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너무 뒤늦은 감은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됐다는 소식은 정말 환영할 일이다.
반구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반구천 암각화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부터 서둘러 수립해야 한다. 반구천 암각화는 울산에 자리하고 있지만 부산, 경남 등 동남권 전체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시킬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 암반에 새겨진 바위그림들의 미학적 가치와 그 안에 담긴 웅장한 선사 해양 문화 스토리를 세계에 제대로 알리는 것은 물론 동남권 곳곳에 산재한 선사 유적을 하나로 묶어 글로벌 선사유적 관광벨트로 조성해야 한다. 세계유산에 걸맞은 종합적인 보전 대책과 스토리텔링, 세밀한 관광자원화 작업도 시급하다. 또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제2의 반구대 암각화를 찾는 작업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선사인들이 남긴 걸작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것은 인류에게도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반구천 암각화 중에서도 반구대 암각화는 동남권이 신석기시대 강력한 해양문화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동남권이 해양을 매개로 활발하게 교류하던 초광역 생활권역이었다는 점도 알려준다. 반구대 암각화는 동남권 800만 시민들에게 역사적 동질성과 메가시티화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귀중한 선물인 셈이다. 반구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사실상 등재를 계기로 동남권을 진정한 메가시티로 발돋움 시키는 논의도 다시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인류 최고 걸작…너무 뒤늦은 가치 인정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세계유산 분야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는 한국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반구천의 암각화에 대해 지난달 등재 권고 판단을 내렸다. 이코모스는 유산을 조사한 뒤 등재, 보류, 반려, 등재 불가 등 4가지로 분류해 세계유산센터에 권고한다. 등재는 최고 수준 권고에 해당한다. 등재 권고를 한 유산은 이변이 없는 한 오는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이번 등재 권고로 반구천의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된 셈이다.
반구천의 암각화는 세계유산 사실상 등재 이전에도 인류 최고의 유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2010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이후 벌써 15년이 흘렀다. 오죽하면 ‘비운의 세계유산’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이것은 반구천 암각화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수몰 악순환 우려에 노출된 반구대 암각화의 참담한 현실은 또 어떤가. 늦깎이 등재는 우리 스스로가 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푸대접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지 않을까. 오는 7월 정식 등재를 통해 반구대 암각화의 위대한 진면목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길 기대하는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울주군 대곡천(옛 이름은 반구천)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는 높이 약 5m, 너비 약 8m인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 암반에 다양한 고래, 고래잡이 모습, 거북 등 296점의 그림이 새겨진 선사 유적이다. 반구대 암각화가 조성된 시기는 3500~7000여 년 전 신석기시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 유적으로 평가 받는다. 즉, 인류 포경 문화를 알려주는 최초의 유산인 것이다.
특히 한반도가 접한 북태평양 연안의 독특한 해양 어로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욱이 작살 맞은 고래, 어린 새끼를 데리고 있는 어미 고래 등 암각된 다양한 바위그림들의 아름다움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형상을 단순화하면서도 특징을 세밀하게 포착한 절제된 미학의 세계는 선사 시대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암반을 빼곡하게 메운 바위그림들은 당시 대곡천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가축을 기르고 바다로 나가 고래 등을 집단 사냥했던 신석기인들의 강인한 생활상을 세세하게 알려준다. 수천 년에 걸친 자신들의 삶을 문자가 아닌 바위그림으로 보여주는 반구대 암각화의 장엄함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선사 시대에 온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700m 정도 떨어진 대곡천 상류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 약 2.7m, 너비 9.8m 바위 면에 각종 도형과 글, 그림 등 620여 점이 새겨져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새겨진 암각화 군락인 셈이다.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시기에 왕과 왕비의 행차를 묘사한 글도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인위적으로 다듬은 듯한 바위면은 아래를 향하여 약 15도 각도로 절묘하게 기울어져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 이런 조건 때문에 자연적인 풍화 과정을 비교적 잘 피해 현재까지 보전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에 접한 하천 바위 곳곳은 천전리공룡발자국화석을 간직한 유적지다. 공룡발자국화석은 대곡천 암각화를 한층 특별한 유적으로 자리매김시킨다.
■ ‘제2 반구대 암각화’ 찾아야 한다
반구대 암각화가 자리한 반구대 골짜기의 맑은 물은 대곡천을 따라 태화강에 합류, 동해로 흘러나간다. 강물이 동해와 맞닿는 지점 왼쪽에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가 자리한 울산 동구 방어진이, 오른쪽에는 남구 장생포가 위치해있다. 장생포는 근대 포경산업의 중심지였다. 장생포 앞바다는 예로부터 밍크고래와 참고래 등 다양한 고래들이 회유하는 장소였다. 특히 이 일대는 귀신고래가 많이 유영하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귀신고래회유해면’이라는 이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신석기 시대의 지형은 현재와 달랐다. 울산 내륙에 자리한 대곡천이 현재보다 바다에 훨씬 인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으로 고래를 사냥할 만큼 강력한 해양문화를 가졌던 대곡천 신석기인들이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 그림 58점을 새긴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반구대 암각화 유적지가 과연 한곳에 그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답은 현재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곡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에 발맞춰 이제는 한층 정밀한 추가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실제로 1965년 사연댐 준공으로 반구대 암각화가 수몰되기 전에 다른 바위그림을 봤다는 이야기들이 지금도 전해진다. 특히 현재 반구대 암각화가 바위면을 사실상 거의 빽빽하게 채운 점으로 미뤄볼 때 다른 장소의 바위면에 암각화를 추가로 새겼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더욱이 암각화가 한 세대에 걸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세대를 거쳐 조성된 데다 당시엔 종교적인 목적을 띤 점 등을 감안할 때 이런 추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당시 대곡천 신석기인 집단은 배를 타고 나가 함께 고래를 사냥할 정도로 인원 수도 많고 강력한 데다 식량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뤄 여러 곳에 암각화를 남길 충분한 여력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먼저 대곡천 일원의 물을 빼는 게 시급하다. 사연댐 건설 이후 수몰을 반복하는 반구대 암각화부터 구한 뒤 대곡천과 주변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사연댐 물을 일시적으로 줄이거나 잠수 전문가를 동원해 수중 조사를 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제2 반구대 암각화 발견 소식은 그 자체로 인류에 대한 큰 선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함께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영구적인 보전 대책을 서두르는 등 반구천 암각화에 대한 대대적인 기반 확충 사업도 추진되어야 한다. 반구천 암각화의 진면목에 걸맞은 대우가 절실한 상황이다.
■ 동남권이 함께 꾸는 꿈…세계적 바위그림 관광벨트
인류의 소중한 보물인 두 개의 바위그림 유적을 품은 대곡천 일원은 그 자체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예전부터 신라 시대 화랑들을 비롯해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많은 사회 지도층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들은 이곳의 수려한 풍광을 시와 글에 담았다. 반구대 일원엔 포은 정몽주를 기리는 모은정을 비롯해 반구서원, 집청정 등 다양한 역사 유적들도 공존한다. 또 반구대 초입에서 암각화에 이르는 오솔길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이미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에 가까운 정취를 선물한다. 더욱이 울산엔 반구대 입구에 조성된 암각화박물관, 고래문화특구인 장생포의 고래박물관과 고래체험관 등 대곡천의 암각화와 관련된 문화 인프라가 상당수 조성됐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 암각화 소재지인 울산뿐만 아니라 부산, 경남 등 동남권 3개 지자체가 함께 나서야 한다. 세계유산인 반구천의 암각화를 단순히 울산 지역의 유적으로 한정 짓는 것은 너무도 좁은 안목이다. 협소한 안목으로는 인류 최고의 유산인 반구천 암각화의 진면목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없다. 억지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사실상 동남권은 선사 시대부터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즉, 세계유산 등재 의미를 반구천 암각화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선사 시대 동남권의 초광역적 생활 문화, 탁월한 문화적 가치 등을 포괄하는 쪽으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반구천의 암각화 이외에도 다양한 선사 유적들이 동남권 곳곳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 유적들의 정점인 반구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는 동남권이 보유한 선사 유적들의 가치까지 함께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역사의 시계를 기원전 1만여 년부터 부족국가가 생겨난 청동기시대 전까지로 돌려보면 신석기시대의 부산, 울산, 경남은 해양을 매개로 한 초광역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사슴 그림과 부산 동삼동 패총 토기에 그려진 사슴 그림이 양식상 동일하다고 한다. 울산 대곡천 거주 집단이 반구대에 고래 사냥 장면을 담은 암각화를 새긴 것과 관련해 동삼동 패총 신석기 문화층위에서도 다양한 고래 뼈들이 대량 출토됐다. 이 사슴 그림과 고래 뼈 등을 감안할 때 부울경은 신석기시대부터 같은 문화를 공유한 동일 생활권역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동남권은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해 부산 복천동 고분 출토 암각화, 경남 함안 도항리 유적, 밀양 살내 유적과 의령 마쌍리 유적 출토 암각화, 사천 본촌리 유적 출토 암각화, 남해 양아리 서불과차 암각문 유적 등 풍부한 암각화 유산을 갖고 있다. 패총 등 선사 유적도 많다. 반구천 암각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화석은 부산과 경남 곳곳에서도 다수 발견됐다. 반구대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동남권 전체를 세계적인 바위그림 유적 문화권, 해양선사 유적 문화권으로 묶어 초광역권 문화 관광 벨트를 조성해야 마땅할 것이다. 즉, 바위그림과 공룡 등 선사유적을 핵심 콘텐츠로 삼으면서 부산, 울산, 경남의 기존 관광 자원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동남권 글로벌 관광메카화를 꾀해야 한다. 이와 관련,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탈리아 발카모니카 암각화,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에 남겨진 선사 시대 후기의 암각화와 벽화군 등은 이미 세계적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동남권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서둘러 반구천 암각화를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선사 유적 관광 로드맵과 스토리텔링 추진, 캐릭터 등 관광 상품 고안, 글로벌 관광객 유치 전략 구축, 세계적인 암각화 도시와의 교류, 글로벌 학술 세미나, 반구천 암각화에 대한 세계사적 관점의 정밀한 추가 연구 등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초광역권 관광 벨트를 매개로 한 컨벤션 산업 등의 활성화를 위한 장기적인 계획 수립도 시급하다.
특히 반구천 암각화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동남권 주민들의 자각도 시급하다. 반구천 암각화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유산이자 이 땅에 살았던 선사인들이 후대에 전하는 뜻깊은 선물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진정한 ‘K문화’의 정수인 것이다. 반구천 암각화가 글로벌 관광 수요를 촉발시키는 등 동남권 경제를 지탱하는 미래 동력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 것도 이런 이유다. 동남권은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반구천의 암각화 등 선사유적을 보기 위해 울산과 부산, 경남으로 몰려오는 꿈을 꿔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남권에 머무르고, 개발된 암각화 마스코트 등 관광 상품을 앞다퉈 구매하는 그런 날을 만들어야 한다.
더욱이 2029년 동남권 관문공항인 가덕신공항이 개항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제 곧장 동남권을 찾을 수 있다. 신공항을 계기로 부산과 울산, 경남 3개 도시의 교통 인프라도 대거 확충된다. 1시간 내외면 어디든지 도착할 수 있는 동일 생활권역으로 발돋움한다. 동남권이 반구천의 암각화를 매개로 함께 같은 꿈을 꾸고, 그 미래를 현실화할 시기가 드디어 도래했다는 생각이다.
■ 반구천 암각화와 동남권 메가시티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신석기 시대 한반도 남부는 동북지방, 서북지방, 중·서부지방, 중부 동해지방, 남해안지방 등 5개 권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남해안지방은 나머지 4개 권역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사회문화적 동질성을 지녔다. 바다에 접해 살았던 이곳의 거주민들은 농업보다는 바다를 생계 기반으로 삼으며 신석기시대 해양문화시대를 주도했다. 남해안지방은 현재로 보면 부산, 울산, 경남, 전남 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지를 비롯해 암남동, 영선동 다대포패총과 울산 신암리, 경남 진해 안골포, 통영 연대도와 욕지도, 하동 목도, 창녕 비봉리 등에서 발견되는 다수의 패총과 주거 유적 등은 신석기시대 남해안지방이라는 초광역권의 존재를 입증한다.
반구대 암각화와 동삼동 패총 등 신석기시대 다양한 유물들은 당시 한반도 남부와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해양문화 중심지가 남해안지방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미개한 원시인일 것이라는 일반의 오해와 달리 동삼동 패총 등을 남긴 신석기인들은 일본은 물론 한반도 서해안과 내륙 집단 등과 활발히 교류한 선진 해양문화인들이었다. 이들이 부울경에 남긴 조개 팔찌, 흑요석 등은 당시 한반도 남해안지방 거주 신석기인들이 먼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든 강력한 해양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창녕 비봉리 패총 유적지에서 출토된 8000년 전의 목선 유적 등은 당시 동남권 신석기인들의 첨단 기술과 문화를 엿보게 한다. 동남권의 신석기 시대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던 진정한 ‘해양문화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남권 선사 유적의 정점인 반구천 암각화 중에서도 반구대 암각화는 동남권의 정체성에 동질성을 부여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해 부울경에 산재한 수많은 선사 유적은 신석기시대의 부울경이 이미 해양을 매개로 한 초광역권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결국 신석기시대 동남권은 바다를 매개로 함께 교류하고, 동질적 문화를 향유했던 메가시티였다는 게 기자의 견해이기도 하다.
현재 삐걱거리고 있지만 부울경을 하나로 묶는 초광역권화 또는 메가시티화는 예정된 미래다. 메가시티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800만 명에 육박하는 동남권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동질성을 부여할 역사 스토리를 발굴하는 것이다. 메가시티화가 부울경 3개 도시의 혼인이라면, 사랑의 역사가 없는 형식적 결합은 파국을 맞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울경의 역사엔 크고 작은 애증이 교차한다. 신석기시대 이후 부족국가 등을 거친 이후에도 신라와 백제, 가야 등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다툼을 벌였다. 고려와 조선 때도 부울경 내에선 문화적 중심과 변방이라는 논리가 작용하면서 진정한 통합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현재 부울경 메가시티의 정체성을 신석기시대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 원조 메가시티에서 찾는 것은 어떨까.
반구천의 암각화는 신석기시대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원조 메가시티적 삶을 보여줌으로써 미래 동남권 메가시티가 단순한 행정적 결합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는 듯하다. 반구천 암각화를 중심으로 동남권 문화권을 하나로 엮어내는 고도의 역사 복원과 발굴, 스토리텔링 작업이 3개 도시 공동 주도로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 부울경의 잊힌 정체성을 되찾아 이제 진정한 동남권 메가시티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반구천 암각화의 주문에 귀를 기울이길 기대한다.
2025-06-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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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트럼프, 왜 하버드 때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아이비리그 명문대인 하버드대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2일(현지 시간) 하버드의 외국인 학생 등록 자격을 박탈하는 초강수를 뒀다. 하버드대가 ‘반(反)유대주의 근절’ 등 정부의 교육 정책 변경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도 “국토안보부의 외국인 학생 차단은 불법”이라며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세계 최강국 미국과 초일류 대학 하버드는 왜 전면전을 벌이는 걸까.
■ 트럼프, 하버드에 공세 강화
트럼프 행정부와 하버드대의 갈등은 2023년 10월 이후 미국 대학가를 휩쓴 ‘친(親)팔레스타인 시위’ 대처를 둘러싼 입장 차이에서 촉발했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달 캠퍼스 내 유대인 혐오 근절 등을 이유로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폐기를 비롯해 입학정책과 교수진 채용에 정부가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하버드대에 요구했다. 하버드대는 ‘학문의 자유’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연방 보조금 동결·삭감, 대학 면세 혜택 취소 등 돈줄을 옥죄기 시작했고 지난 22일(현지 시간)에는 외국인 학생 등록 자격인 ‘학생 및 교환 방문자 프로그램’(SEVP) 인증을 취소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하버드대는 다음 날 학생 비자 취소 등 정부의 조치 이행을 막아달라는 가처분소송을 냈고, 연방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단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6일(현지 시간) 소셜미디어에 “반유대주의적인 하버드대에서 30억 달러(약 4조 1000억 원)의 보조금을 회수해 미국 전역의 직업 학교들에 나눠주려 한다”며 ‘하버드 때리기’를 재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하버드대뿐 아니라 컬럼비아대, 펜실베이니아대, 코넬대 등 다른 유명 아이비리그 대학에 대해서도 연방 지원금을 철회하는 등 교육기관 전반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캠퍼스 내 반유대주의 단속’이라는 명분 이면에 이들 대학의 진보색과 불온성을 위축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 하버드는 왜 타깃이 됐나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시작과 함께 미국 명문 대학을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연방 지원금을 무기로 대학의 ‘진보적 색채 지우기’에 나섰는데, 이제 화력을 하버드에 집중하고 있다. 하버드가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연방정부를 상대로 법적 소송까지 제기한 첫 번째 대학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학이 펼쳐 온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이나 학내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빌미로 여러 대학을 탄압했다. 콜롬비아 대학 등 다른 명문대들은 일부 요구를 수용하고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하버드는 강경하게 맞섰다. 트럼프 행정부가 하버드를 ‘본보기’ 삼아 굴복시키거나 법적 분쟁에서 승리할 경우, 다른 대학들에도 강력한 선례와 압박 효과를 줄 수 있다.
원래 트럼프와 지지자들은 하버드를 비롯해 컬럼비아대, 코넬대, 프린스턴대 등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진보 엘리트주의의 상징’으로 규정한다. 그 가운데 하버드는 미국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부유하며 ‘좌파 엘리트’ 상징의 핵심 대학이다. 하버드가 반기를 들자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정부 요구를 거부하고 예일·스탠퍼드대 등이 연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 입장에선 하버드를 굴복시켜야 대학과의 대결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다.
미국 언론들도 “트럼프 행정부가 대학의 소수인종 우대 정책(2023년 폐지됨)과 진보적 편향성을 뜯어고치기 위한 광범위한 정치적·법적 전략의 일환으로 하버드를 비롯한 엘리트 학교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단순히 대학 내 반유대주의 척결이 아닌, 보수 정치 이념을 사회 전반적으로 강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하버드대를 집중 공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관세 정책의 부작용으로 지지율 하락을 겪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진보 엘리트를 향한 공세를 강화하던 중 하버드대가 타깃으로 떠오른 것이다.
■ 하버드, 진보 정책 브레인 센터
하버드는 1636년 설립된 미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미 건국보다 140년 앞선 역사를 자랑한다. 존 F 케네디, 버락 오바마 등 8명의 미 대통령을 배출한 최고 명문이다. 특히 진보 정책의 브레인 센터 역할을 맡아 ‘좌파의 본산’으로 불린다. 1960~1970년대 베트남 전쟁 때 반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하버드는 지난해 기준 532억 달러(약 76조 원) 기금을 보유한, 미국에서 가장 돈 많은 대학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로 면세 혜택이 박탈되면 수십억 달러 손실과 함께 부유층 기부까지 줄어드는 연쇄 타격을 피할 수 없다.
2024~2025학년도 기준 국제 오피스 통계에 따르면 하버드대에 재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은 전체 학생의 27.2%인 6793명이다. 한국인 유학생도 400여 명 재학 중이다. 하버드는 지난해 10월 유학생 출신 국가를 공개했다. 중국인 유학생이 가장 많았고, 이어 캐나다, 인도, 한국, 영국 순으로 나타났다.
■ 보수와 진보의 ‘문화 전쟁’
하버드를 향한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은 반유대주의 근절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실상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로 대표되는 진보적 노선의 폐기를 요구하는 ‘문화전쟁’의 성격이 짙다는 시각이 많다. 다른 주요 엘리트 대학이 갖는 위기감의 본질이기도 하다. DEI 정책은 인종·젠더·민족 등 정체성을 차별하지 않고 사회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반차별 정책의 성과다. DEI는 원래 차별 해소와 통합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구호였다.
DEI를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립은 치열하다.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첫날 DEI를 정책으로 채택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DEI는 민주당 정부를 거치며 정부와 대학을 중심으로 제도화됐다. 그 과정에서 절차의 일방성과 내용의 편향성에 보수층이 반발했고, 트럼프 정부가 이번에 전면 백지화에 나섰다. 트럼프와 지지층들은 DEI 정책이 인종·젠더·민족 정체성에 바탕을 둔 차별로 본다. 그들은 채용이나 입학 등에서 인종 등을 배려해, 능력 있는 백인이 오히려 차별당하는 게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4년 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이를 폐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이유다.
하버드가 DEI 격전지가 될 조짐은 2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대법원은 2023년 인종별 쿼터를 둔 하버드의 소수계 우대 입학 사정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당시 DEI 진영이 크게 반발했는데, 그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계기로 벌어진 반이스라엘 시위도 영향을 줬다. 시위대는 이스라엘의 전쟁을 인종차별의 연장선이라고 비난했다. 과격한 인종차별 구호가 난무하는데도 당시 클로딘 게이 총장이 미온적 반응을 보였고, 이에 보수층이 격앙했다.
■ 미 유학생 비자 인터뷰 중단 파장도
트럼프 행정부와 대학과의 전쟁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외국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27일(현지 시간) 비자 발급 인터뷰에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심사를 의무화하는 제도 도입을 위해 유학생 비자 인터뷰를 일시 중단할 것을 전 세계 공관에 지시했다. 미 정부가 반유대주의 척결, 테러리스트 차단을 명분으로 미국에 유학 오려는 학생을 대상으로 사실상 ‘사상 검증’ 논란이 제기된다. 미국에 가려는 각국의 유학 신청자들에 대한 SNS 심사의 실효성 문제와 함께 비자 발급에 장기간 소요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교칙 개정에 저항하는 하버드대 등에 재정적 타격을 주려는 의도로 유학생의 입국을 일시 차단하는 방안을 꺼내 들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폴리티코도 “행정부가 이 계획을 시행하면 학생 비자 처리 속도가 심각하게 느려질 수 있다”며 “또한 외국인 학생에 크게 의존해 재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는 많은 대학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짚었다. 미국 대학 가운데 외국 국적 학생이 가장 많은 학교는 뉴욕대(NYU)로 27만 2000명이 재학 중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어 노스이스턴대(21만 명), 컬럼비아대(20만 3000명), 애리조나주립대(18만 4000명), 서던캘리포니아대(USC·17만 5000명) 순이었다. 현재 미국 내 한국 유학생은 4만여 명에 달한다.
미국 교육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유학생 비자 인터뷰 일시 중지 조치가 대학에 미칠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미국 국제교육자협회(NAFSA)는 2023~2024학년도 100만 명이 넘는 유학생이 미국 경제에 약 440억 달러(61조 6000억 원)의 기여를 한 것으로 추정했다.
■ 트럼프발 ‘대학과의 전쟁’ 향방은?
그동안 초강대국 미국의 경쟁력 중의 하나는 자유롭고 혁신적인 대학이었다. 대학이 자율과 독립의 원칙에 따라 전 세계 인재가 모여들어 세상을 선도하는 혁신을 이뤄내면서 미국의 경쟁력을 높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과학·기술·수학(STEM) 분야에 집중된 유학생 유입은 미국의 기술 혁신과 경쟁력 유지에 핵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대학 길들이기를 위한 압박 조치가 오히려 자국의 성장 동력 저하와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독단적 정책이 미국 대학을 위기로 내모는 셈이다. 외국인 유학생 확보에 타격을 입고, 보조금 등 정부 의존도가 높은 대학들이 트럼프의 파상 공세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최고 권력과 최고 지성 간의 정면충돌의 향방이 미국과 세계의 미래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당분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2025-05-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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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밥맛 역전 가능할까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쌀은 단백질 함량이 적어야 맛있는데, 한국에서는 수확량을 늘리려 비료를 많이 쓰기 때문에 단백질 비중이 커집니다. 품질보다 양을 중요시하는 것이지요. 일본 쌀에 비해 질이 떨어집니다.’
21일 일본 포털 야후재팬에 배포된 ‘한국 쌀 인기 급등, 전문가 진단’ 기사는 재배법과 미질 차이에 따른 우위를 따졌다. 이 기사는 최근 일본 쌀값이 폭등하자 온라인에서 한국 쌀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한국에까지 와서 쌀을 구입하려는 일본인이 늘어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짐작되듯이 일본인은 미질에 민감하다. 스시(초밥)의 밥알은 풀어지듯 씹히면서도 쫀득해야 하고, 사케(일본 전통주) 재료 쌀은 전분 외의 잡성분이 적어야 된다. 일본에서 벼 종자 개량 기술이 발달한 이유다.
하지만, ‘한국산은 질보다 양’이라는 관념은 과거에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렸다. 일본계 벼 품종이 특유의 찰기와 윤기로 한국 시장에서 절대적 강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육종 기술이 역전되면서 벼 재배 면적 기준으로 일본계의 비중은 4%로 폭락했다. 한국 자체 개발 품종이 선전하면서 50년 간 한국인의 식탁을 점령했던 고시히카리, 아키바레(추청)는 퇴출 중이다. 왜냐고? 한국산 밥맛의 경쟁력이 월드 클래스급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한국 쌀은 퇴장했다. 쌀값 폭등 덕분에 일본이 마주한 한국 밥맛은 예상 밖의 진화를 거듭한 결과물인 것이다.
□ 한반도 전래 쌀 재배 기술 발전시킨 일본
“쌀은 대단히 위험한 음식이다!”
음식 만화 ‘맛의 달인’ 저자 가리야 데츠는 일본인들이 쌀에 집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온 국민이 쌀 중독증을 앓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밥이 너무 맛있기 때문”이란다. 밥을 너무 좋아해서, 맛있게 먹으려 반찬을 짜게 만드는 탓에 성인병까지 유발한다는 주장은 과장과 엄살이 섞였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도 있다.
일본은 미질에 진심이다. 일본 사케 양조장은 특정 벼 품종을 확보하려 직접 농사를 짓는 곳이 많다. 주조호적미(酒造好適米), 즉 술을 담그는 데 최적으로 개량된 품종만 100여 개가 넘는다. 쌀알이 큰 편인 야마다니시키, 고햐쿠만고쿠가 대표적이다. 술에 잡미를 유발하는 단백질과 지방 성분이 최소화되게끔 개량됐다. 탄수화물의 결정체인 심백(心白)이 많아야 깔끔한 사케의 맛을 낼 수 있다. 초밥용 쌀은 부드럽게 씹히되 점성이 느껴져야 하고, 초를 섞은 뒤 풀어지지 않아야 한다. 대표 품종이 고시히카리다.
일본 최초의 벼 재배지는 한반도 남부와 가까운 일본 사가현 요시노가리. 한반도 등에서 벼 재배 기술을 가진 세력이 기원전 3세기부터 건너가 농경 사회를 형성하고 정주 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이 문명 시대로 진입하는 혁명을 일으킨 셈이다. 근대 이후 일본은 쌀 재배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는 한반도로 역류했다. 20세기 초반 일본 농학자들은 쌀을 열대형인 인디카와 온대형인 자포니카로 나누는 등 전 세계 쌀 육종 기술을 선도하기에 이른다. 적어도 1960년대 한국이 일본을 뛰어넘는 육종 기술의 자립을 이루기 전까지 한국은 줄곧 일본의 그늘에 있었다.
□ 한국, 세계 최초 자포니카·인디카 교잡 성공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인구 증가로 쌀이 부족해지는데 미국 곡물 원조가 유상으로 바뀌자 쌀 증산에 정권의 명운을 걸게 된다. 맛의 자포니카, 양의 인디카.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두 품종의 장점을 고루 갖춘 교잡종에 욕심이 가는 건 당연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육종 선진국 일본도 일찌감치 포기한 터였다. 교잡종이 불임이라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불굴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중앙정보부 요원이 이집트에 잠입해 일본 품종으로 만든 열대성 자포니카 ‘나다’ 종자를 밀반출할 정도로 총력을 쏟아부었다.
획기적인 다수확 품종의 꿈은 결국 600여 차례 교배 실험 끝에 현실화된다. 1969년 허문회 박사가 불임이 아니면서도 인디카의 좋은 형질을 유지한 교잡종 IR667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훗날 통일벼로 명명된 이 신품종을 언론은 ‘벼 곱절 거둘 수 있다. 기적의 쌀 재배 성공’이라고 환호했다. 당시 국정 최대 현안이었던 보릿고개 극복과 극일 정서를 감안하면 국가적 쾌거다.
통일벼는 식량난에 처한 한국은 물론 저개발 국가에 복음이었다.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네팔, 베트남, 부탄에서 통일벼 계통을 받아들였고, 한국은 지금도 아프리카 국가들에 현지 기후와 토양에 맞는 개량종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인디카와 자포니카 교잡에 성공한 것은 과학기술의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벼와 벼농사에 대한 담론은 국가적 정체성과 맞물린다. 또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품종과 농업 기술을 강제로 받아들였던 한국이 일본도 포기한 육종에 성공한 것은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 행보를 걷는 계기가 됐다. 통일벼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농학자들이 1970년대 이후 한국 논을 점령한 일본계 품종 타도에 나선 것은 기술적 자부심의 발로였다.
□ 아키바레 등 일본 품종 50년 만에 퇴출
1970년대 한국에 들어온 아키바레는 단숨에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했다. 고슬고슬해서 식감이 좋고 식어도 밥맛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학계와 농업 당국은 이를 한국 육종 기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였다. 신품종이 속속 개발됐고, 농민과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1989년 국산 품종인 동진이 아키바레를 누르고 재배 면적 1위에 오르는 성과를 낸다. 이어 해들, 알찬미, 새청무, 삼광, 일품, 친들, 영호진미 등 국산 주자들이 약진했다.
한국산 품종의 경쟁력은 어떨까? 농촌진흥청 주최로 2013년 초밥용 쌀 블라인드 테스트가 있었다. 국산 품종과 고시히카리를 무작위로 주고 일식 요리사들에게 초밥을 만들게 한 결과, 국산인 호품과 신동진이 고시히카리를 제치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밥맛의 역전이라고 할까.
이처럼 국산 벼 품종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지난해 전체 재배 면적 69만 4404㏊ 중 아키바레, 고시히카리, 히토메보레, 밀키퀸 등 일본계는 도합 2만 7766㏊, 4%에 그쳤다. 2017년 11%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 품종은 경기도의 재배 면적이 컸는데, 외래종과는 어울리지 않는 ‘임금님쌀’ 브랜딩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겹치면서 최근년 경작지가 급감하고 국산으로 속속 대체되는 추세다.
□ 한국 밥맛 호평하는 일본 소비자
한국 품종 쌀은 지난달 첫 10t이 일본에 수출되어 완판되고 추가 선적도 이어지고 있다. 쌀 수출은 통계가 작성된 1990년 이후 35년 만에 최대 물량이다. 일본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내 한국 농협 페이지에서는 전남 해남산 ‘땅끝햇살’이 불티나게 팔렸다. 품종은 국산 새청무다. 밥맛에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들의 구매 후기는 호평 일색이다.
“일본의 혼합미보다 낫다. 다시 구매하겠다.’ ‘찰기 있는 식감이 좋았다. 맛있었다.’ ‘기대 이상의 맛이어서 놀랐다.’ 일본산에 비해 저렴한 가격 경쟁력의 영향도 컸지만, 사실상 일본 소비자에 처음 노출된 상황에서 밥맛에 후한 점수를 받은 것에 의미가 있다.
이는 벼 재배에 있어 한일 사이 ‘기울어진 운동장’ 시대가 끝났다는 점을 시사한다. 대등한 밥맛 경쟁 시대로의 전환인 셈이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로부터 쌀 재배를 매개로 문명 교류와 함께 미묘한 자존심 대결을 이어왔는데, 이번 일본 쌀 가격 폭등 시기에 한국산 쌀의 품질 수준이 재조명되면서 변곡점을 만났다.
사실 벼 품종뿐만 아니라 밥 짓는 기술에서도 한국은 열세였지만 극적인 반전을 이룬 상태다. 한국 기업들이 전기밥솥에 가마솥 내부의 초고압 원리를 구현하면서 밥 짓는 기술에서도 역전이 일어났다. 밥솥 내부 밀폐로 증기압을 높여 끓는점을 100℃ 이상 올리는 기술인데, 쌀을 빠르고 고르게 익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윤기와 점성을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한국 주부들이 더이상 일본의 코끼리표(조지루시) 전기밥솥을 선망하지 않게 된 이유다.
일본 쌀값 폭등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한국의 신품종 쌀이 일본 소비자들을 만나게 됐다. 엇갈리는 평가가 있지만 적어도 일본 소비자 만족도는 합격점을 받고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벼 재배와 밥 짓기 기술로 교류해 온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개성적인 밥맛 경쟁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2025-05-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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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이 '2찍' 도시라니
“부산은 망할 만한 도시다. 덮어놓고 국힘계 찍는 ‘2찍’들만 사는 도시가 받은 인과응보다.”
지난 번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란을 통해 부산이 망하기 시작한 시점을 논(·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5032415442648839)했더니 댓글에 이 같은 반응들이 적잖게 올라왔다. 중앙집권 시대에는 부산을 콕 찍어 20년 넘도록 규제를 해 온 대한민국이 지방자치 시대에는 부산만 특별대우 못 해준다며 역차별을 하는 바람에 부산이 쇠락했다는 게 칼럼의 주된 내용이었으나 많은 이들이 부산의 정치 성향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며 비판을 가해왔다. ‘2찍’이라는 멸칭까지 동원한 이 비판은 과연 얼마나 진실일까.
■민주당이 부산서 받은 표
가장 최근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부터 살펴보자.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부산지역에선 총 18개 의석 가운데 국민의힘이 17개 의석을 차지하며 거의 싹쓸이를 하다시피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북구갑 한 곳에서 전재수 의원만 당선됐을 뿐이다. 결과로만 보면 부산 유권자들은 국민의힘에 몰표를 준 게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부산을 ‘2찍 도시’라 부르며 욕하는 이들은 이 결과를 들이대려 할 것 같다.
하지만 후보들이 받은 표를 한꺼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부산 전체 유권자가 던진 표(더불어민주당이 불출마한 연제구 제외) 가운데 국민의힘은 49.7%를, 더불어민주당은 41.5%를 각각 받았다. 득표율 8%P대 차이에 불과한 이 결과를 놓고도 부산을 과연 ‘2찍 도시’라는 멸칭으로 부를 수 있는가.
그럼 2000년 치러졌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어땠던가. 당시 선거에서도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15석을 챙긴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3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당시 선거 득표율도 미래통합당은 52.92%, 더불어민주당은 43.99%로 의석 수만큼의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 선거 부산지역 득표율을 살펴봐도 제18대 선거 때 문재인 후보가 39.87%를 기록한 것을 필두로 제19대 문재인 후보가 38.71%, 제 20대 이재명 후보가 38.1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대통령 선거조차 40% 가까운 ‘콘크리트’ 민주당 지지세가 유지됐다는 얘기다.
이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민주당 득표율이 꾸준히 나오거나 심지어 박빙의 득표율을 기록하는데도 불구하고 ‘부산은 작대기만 꽂아 놔도 국민의힘 계열이 당선된다’는 프레임이 작동한 것은 이를 부추기는 ‘범인’이 있기 때문이다.
범인 색출을 잠시만 미루고 시간을 조금만 이전으로 돌려보자.
■제도만 바꿨을 뿐인데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1985년 2월초 어느날 부산 동구 부산일보 앞 도로. 유세차를 타고 가던 민주한국당 김정길 후보는 확성기를 통해 “아빠는 박찬종 찍고 엄마는 김정길 찍어 주이소”라는 희한한 구호를 외쳤다.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바람을 일으키던 신한민주당의 박찬종 후보와 정면대결을 하지 않겠으니 자신을 도와달라는 뜻이다. 그 구호 하나로 인해 어이없게도 득표율에서 김정길 후보가 1위, 박찬종 후보가 2위를 하는 선거 결과가 나왔다. 그럼에도 김·박 두 후보는 사이좋게 나란히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당시 국회의원 선거 제도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이다. 부산의 중·동·영도구를 한 선거구로 묶어 선거를 치른 결과 4명의 후보 중 득표율 1·2위 두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부산 전체로는 지역구 12석 가운데 3개 야당이 9석을 가져가는 파란이 일어나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가슴을 서늘케 했다.
이쯤이면 눈치 빠른 이들은 앞선 프레임의 범인을 찾아냈을 듯하다. 그렇다. 바로 현행 소선거구제가 잘못된 프레임이 나오도록 하는 범인이다.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오직 한 명만이 당선되도록 함으로써 민의의 왜곡을 극대화해 올바른 대표성 확보에 허점을 보이는 게 소선거구제의 치명적 단점이기 때문이다. 민의의 왜곡으로 인한 극단적 결과는 선거 결과를 믿지 못하고 부정선거론이 판을 치는 토양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만약 최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가 중선거구제였다면 부산지역에선 18개 의석 중 더불어민주당이 최소 8석 정도는 확보하지 않았을까.
■개헌보다 더 서두를 일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최근 한국 사회가 개헌론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못내 아쉽다. 1987 체제 헌법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헌을 하지 않고서도 싹쓸이로 인한 전횡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해도 수년 전 정치개혁 논의가 만발했을 때 국회의원 선거 제도만 중대선거구로 바꿀 수 있었다면 제대로 된 민의 반영으로 극단적 정치 혼란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정치 세력 간에 협상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다당제가 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6·25 전쟁 이후 급속 성장을 위해 1등에게만 모든 걸 몰아주는 방식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해 온 사회다. 한 집안에선 장남에게만, 국가적으로는 수도권에만, 선거에서는 최고 득표자에게만 몰아줘 온 게 지난 역사다. 그 역사의 끝자락에서 우린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하지만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때처럼 군사 정권 하에서도 중선거구제로 다당제가 자리잡았던 시기도 분명 있었다. 조기대선 이후 한국 사회가 거듭나기 위해 개헌론만큼이나 선거 제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해야 하는 이유다. 아니, 선거 제도에 대한 논의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2025-05-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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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억 쏜다, 부산, 준비됐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롯데 자이언츠가 시즌 초반 상위권을 달리며 선전 중이다. 롯데의 활약과 함께 ‘야구 도시’ 부산이 다시 들썩이고 있다. 사직야구장에 다시 관중이 몰려들고 거리에는 롯데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활기를 더한다. 이와 함께 새로운 기대도 함께 피어나고 있다. 오랜 세월 논의만 무성했던 바다 야구장의 꿈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진심 어린 기대와 시민들의 공감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그 꿈에 최근 지역의 한 기업인이 불을 지폈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시설의 건설이 아니라 부산의 정체성과 미래를 담아낼 중요한 기회로 여겨진다.
사직야구장, 그 40년의 여정
1985년에 개장한 사직야구장은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으로서 수많은 추억을 쌓아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시설 노후화와 함께 관중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비가 내리면 피할 공간조차 부족했고, 찬바람이 불면 온기를 나눌 곳도 마땅치 않았다. 선수와 관중 사이엔 거리감이 생겼고 그 틈만큼 마음도 조금씩 멀어졌다. 많은 시민이 “이제는 새 야구장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해 11월, 부산시는 마침내 사직야구장 재건축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복합 스포츠 문화시설로 거듭날 새 구장을 2031년에 열겠다는 구상이었다. 2028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그 사이엔 리모델링을 마친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이 임시 홈구장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희망은 생각보다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지난 3월 행정안전부의 중앙투자심사에서 국비 확보 등의 문제로 사업이 반려된 것이다. 다시금 부산은 갈림길에 섰다.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제안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기가 절묘했다. 지역 상공계와 정치권, 시민사회에서 하나둘 한목소리를 냈다. 부산항 북항 재개발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 특별한 공간에 새로운 야구장을 짓자는 제안이었다.
부산 북항, 여러 꿈을 꾸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북항을 바라보며 고민해 왔다. 항만 재개발이란 거대한 지도 위에서 ‘이 도시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는 질문은 늘 숙제로 남았다. 도심과 바다의 경계에 위치한 땅 북항은 부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기대를 품었을 법한 공간이다. 특히 북항 재개발 1단지 내 랜드마크 부지는 오랫동안 부산 재도약의 상징 공간으로 주목받아 왔다. 하지만 뚜렷한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해 왔다. 초기에 세계적 랜드마크를 유치하겠다는 취지로 출발했으나, 현실성 부족과 투자 유치 실패로 표류했다. 이후 글로벌 영상문화 콤플렉스, 복합문화공간 등 다양한 방안이 제시됐지만 이 또한 구체화하지 못했다. 시민 의견 수렴 과정에서도 용도에 대한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부산항만공사와 부산시 사이의 권한 조율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민간 투자자들의 관심이 조금씩 식어가며 이 부지는 가능성만 품은 채 남아 있었다. 도시의 미래를 이끌 거점이 되어야 할 장소가 오히려 도시 계획의 공백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바다 야구장 건립, 힘찬 꿈
새로운 활로가 절실한 시점에서 부산 시민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바다 야구장 건립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돌이켜보면 바다를 품은 야구장의 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놀랍게도 이미 수년 전, 누군가는 이미 이 꿈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낸 바 있다. 2011년 양덕복 건축가는 부산 북항과 경남 거제 앞바다에 야구장을 짓는 상상도를 세상에 내놓았고, 2018년 부산 시장에 도전했던 오거돈 후보는 북항에 개방형 야구장을 짓겠다는 공약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시간이 흘러 지난해 11월, 국회 국민 동의 청원 게시판에는 ‘사직동 야구장을 부산 북항 바다 전망 야구장으로 재건축 요청에 관한 청원’이 게시되기도 했다. 게시자는 “현재 사직야구장은 접근성과 관광 매력이 부족해 시대적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부산 북항에 바다를 배경으로 한 현대적이고 매력적인 야구장을 건설해 부산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여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과거였다면 지금은 현재다. 바다 야구장 한마디에 도시가 들썩이고 있다. 정치권이 반응했고 언론이 움직였으며 시민들의 기대도 높다. 여기다 협성종합건업의 정철원 회장이 북항 야구장 건립을 위해 2000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정 회장은 상상이 현실로 향하는 신호탄을 쏜 것이다.
어떤 파급 효과 있나
북항 활성화를 위한 전문가 싱크탱크인 북항미래포럼은 “북항 야구장 건립이 지역 사회 발전을 이끌 획기적인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정말로 그럴까? 이를 위해서는 전제가 따른다. 바다 야구장의 다목적 기능이다. 단순히 야구 경기를 위한 공간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이벤트와 문화 행사,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설계된다면, 투자 유치와 경제적 타당성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실제로 해외 사례를 보면,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스포츠 시설이 지역 경제를 견인하고 관광산업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바다 야구장은 단순히 또 하나의 야구장을 짓는 것을 넘어, 침체된 북항 재개발의 돌파구가 되고 부산의 도시 브랜드를 한층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단 얘기다. 특히 북항 부지는 별도 대체 구장 없이도 신축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바다 조망이라는 압도적인 입지 경쟁력을 갖춘 곳이다. 부산역과의 접근성도 뛰어나 전국 야구팬과 관광객을 유인할 강력한 콘텐츠로 부상할 수 있다. 해양 수도이자 야구 도시인 부산에서 바다 야구장이 가지는 상징성과 경쟁력은 이처럼 명확하다.
성공 사례도 있다
바다와 야구의 만남. 언뜻 들으면 낭만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미 그 낭만을 현실로 만든 도시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오라클 파크다. 2000년 개장한 이 구장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뷰’를 자랑하며 단숨에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풍경은 우측 담장 너머로 펼쳐진 맥코비 코브다. 홈런이 바다로 떨어지면 팬들이 카약을 타고 물살을 가르며 공을 건져 올리는 장면은 야구가 단지 스포츠를 넘어 하나의 문화이자 모험임을 보여준다. 일본 지바현의 조조 마린 스타디움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에 개장한 이 구장은 도쿄만을 배경으로 경기와 불꽃놀이가 어우러지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들 구장은 단지 경기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도시의 풍경이 되고 상징이 됐다. 하지만 이는 부산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부산이기에 더 잘할 수 있다. 부산은 이미 바다가 있고 야구를 사랑하며, 열정을 품은 팬이 있다. 이보다 더 단단한 자산이 있을까. 이는 부산만이 만들 수 있는 도시 콘텐츠다.
꿈이 현실이 되려면
묻히고 잊힌 줄 알았던 상상이 다시 부산 앞바다로 밀려오고 있다. 오랫동안 정체돼 있던 북항 논의에 도시가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지역 정치권, 언론, 상공계, 시민사회가 한목소리로 “바다 야구장을 검토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반가운 공감이 또 있었던가. 하나의 제안이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흔치 않다. 어쩌면 조기 대선 국면이 기회가 될 수 있다. 대선 후보들이 부산에 대한 진정성을 담아 이 구상을 공약으로 채택할 수 있도록 지역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 꿈은 누군가 그것을 자기 일처럼 여길 때에만 현실이 된다. 지금은 반응의 순간일 뿐, 결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정철원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2000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했지만 언론을 제외하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결코 섭섭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권이든, 행정이든, 공적 기관이든, 바다 야구장을 ‘내 일처럼’ 생각하고 끌고 갈 손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제는 공공의 의지가 응답할 차례다. 도시의 미래는 혼자 꾸는 꿈으로 완성되진 않는다. 누군가의 결단에 누군가의 실행이 더해져야 현실이 된다. 이젠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시간이다. 부산시가 “부지 이전은 검토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을 것이 아니라, 시민의 목소리,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흐름을 헤아려야 한다. 바다 야구장이라는 ‘플랜 B’를 이제는 진지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야 할 때다.
사직야구장이 과거의 부산이었다면 북항의 바다 야구장은 미래의 부산이 될 수 있다. 그곳에서 파도가 담장 너머로 부딪치고 응원의 함성이 그라운드를 가득 메우며 홈런볼이 물살을 가르며 날아간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우리가 만든 꿈의 구장”이라고. 이젠 이 도시가 답할 차례다.
2025-05-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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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요리] 전쟁터 된 오사카엑스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발 관세전쟁으로 지구촌이 요동치고 있다. 특히 관세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지는 양상이다. 미국이 관세전쟁을 시작한 배경에는 세계 1위 자리를 위협하는 중국을 길들이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기세 싸움은 사실상 일상적인 일이다. 관세와 환율 등 긴박한 현안 갈등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로의 국력을 과시한다. 경쟁국을 주눅 들게 하려는 도발, 우리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대국의 역도발이 반복되는 것이 국제사회의 이면인 것이다. 지난달 13일 개막한 2025 오사카·간사이 만국박람회(오사카엑스포)에서도 미국과 중국은 물론 개최국인 일본까지 합세한 ‘소리 없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번 엑스포에서 이들 국가는 우주 개발 패권을 둘러싼 기술력을 보여주는 전시물을 동원해 서로의 저력을 겨루고 있다. 이른바 ‘엑스포 우주전쟁’인 셈이다.
■ 미국, 아폴로 17호 월석으로 패권 과시
미국은 오사카엑스포 미국관에 달에서 가져온 돌인 ‘월석’을 공개 중이다. 미국은 1961년부터 1972년까지 NASA의 주도로 유인 달 탐사 계획인 아폴로 계획을 추진했다. 미국은 모두 6차례에 걸쳐 달에 발을 디디면서 당시 소련에 뒤처졌던 우주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장악했다. 또 달 탐사를 통해 각종 달 표면 암석 등을 채취해 지구로 귀환하는 성과를 거뒀다. 오사카엑스포에 전시된 ‘월석’은 1972년 미국의 유인 달 탐사선인 아폴로 17호가 달에서 가져온 것이다. 미국은 1970년 오사카엑스포에서도 아폴로 12호가 채취한 월석을 공개, 당시 일본의 엑스포 흥행을 견인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식에서 “화성에 성조기를 꽂겠다”라고 밝혔다. 달에 이어 화성 유인 탐사도 자신의 임기 동안 성공시키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아폴로 17호는 인류가 달에 보낸 마지막 유인 우주선이다. 이번에 아폴로 17호의 월석을 공개한 것을 두고 이제 달이 아닌 화성 진출을 통해 미국의 우위를 계속 입증하겠다는 의중을 담았다는 해석도 이어진다. 아울러 미국관은 2022년부터 미국 주도로 추진 중인 다국적 달 개척 프로젝트인 ‘아르테미스 계획’을 위해 개발된 우주발사시스템 로켓 모형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 역시도 우주 개발과 관련한 미국의 다국적 동맹의 끈끈함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 중국, 인류 첫 달 뒷면 토양으로 미국 도발?
미국은 달의 앞면을 세계 최초로 유인 탐사하는 데 성공했지만 달 뒷면 탐사는 중국이 한발 더 빨랐다. 중국이 지난해 5월 발사한 무인 달 탐사선 창어 6호는 인류 최초로 달 뒷면에서 토양 표본 1935kg을 채취해 지구로 귀환했다. 달 뒷면 토양은 달의 초기 충돌 역사, 달 뒷면의 화산 활동 등 달의 생성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오사카엑스포에 창어 6호가 가져온 토양 표본을 전시한 것은 미국도 못한 일을 자신들이 해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우주 개발 분야 패권을 쥔 미국에 대한 간접적인 도전장으로도 풀이된다.
중국은 2003년 달 탐사 프로그램인 창어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창어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을 뜻한다. 창어 계획을 총괄하는 중국 국가항천국(CNSA)은 2007년 10월 창어 1호를 발사한 데 이어 2010년 10월 창어 2호, 2013년 12월 창어 3호를 발사해 달의 3D 지도를 제작하고 통신 실험을 하는 등 달 뒷면 탐사를 위한 준비를 이어갔다. 마침내 2018년 12월 발사한 창어 4호는 달 뒷면의 폰 카르만 크레이터에 세계 최초로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2020년 11월 창어 5호는 달 앞쪽 표면에서 토양·암석 샘플을 수집한 뒤 달에서 이륙, 궤도선과 도킹하는 방식으로 지구 귀환에 성공했다.
중국은 누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현재 창어 6호 프로젝트까지 진행한 상태다. 창어 6호가 최초로 달 뒷면에서 채취한 토양 표본은 중국의 우주 기술력이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인 셈이다. 특히 미국은 정권 교체 때마다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기존 우주 개발 계획이 번복되는 상황이 반복됐지만 중국은 정권 영속성을 기반으로 장기 계획을 차질 없이 진행, 비약적인 기술 발전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이 오사카엑스포에 자신들이 인류 최초로 달에서 가져온 토양을 전시하는 것이 축적된 기술력에 바탕으로 둔 미국에 대한 도발로도 해석되는 것은 이런 이유인 것이다.
■ 일본 ‘화성의 돌’로 미국과의 동맹 과시?
일본은 1955년 3월 최초의 시험 로켓을 발사한 이후 현재까지 다양한 우주 개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은 달 탐사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유인 우주실험시설 운용과 소행성 탐사에 성공하면서 우주 강국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다. 일본우주탐사국(JAXA)이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운용 중인 유인 우주실험시설인 키보(kibo)는 2008년 3월 NASA의 우주왕복선 엔데버호에 탑재돼 첫 발사됐다. 키보는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ISS에서 인간의 우주공간 활동과 관련한 다양한 실험을 수행한다.
JAXA는 1990년대 후반 소행성 탐사 프로젝트를 본격화했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03년 5월 소행성 탐사선인 하야부사를 발사했다. 하야부사는 세계 최초로 소행성 이토카와에 착륙, 샘플을 채취한 뒤 2010년 6월 지구로 돌아왔다. 이온 추진 시스템, 자율 항법 시스템, 소행성 탐사 기술 등에 기반한 하야부사의 귀환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우주 탐사 역량을 세계에 입증한 셈이다. 일본은 2010년 5월 세계 최초로 돛의 원리를 이용해 금성까지 항해하는 우주 범선인 ‘이카로스’ 발사에도 성공했다. 초박막 필름으로 제작한 가로·세로 14m짜리 돛을 단 이카로스는 태양에서 쏟아지는 입자 반발력을 바람으로 삼아 움직인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함께 만만치 않은 우주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은 이번 오사카 엑스포에 ‘화성의 돌’을 전시 중이다. 일반에 공개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이 돌은 2000년 일본극지연구소가 남국 탐험 과정에서 채취한 것이다. 남극의 야마토 빙하에서 발견돼 ‘야마토 운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길이 29cm, 높이 17.5cm에 무게는 23.7kg으로 측정됐다. 럭비공 크기에 불과하지만 지구에서 발견된 화성 운석 중 두 번째로 큰 것으로 알려졌다. 2000만 년 전 화성과 우주 천체의 충돌로 우주로 방출된 이 운석은 5만 년 전에 지구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일본이 다른 우주 개발 성과물을 놔두고 굳이 ‘화성의 돌’을 전시한 것은 화성에 눈독을 들이는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을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특히 당초 오는 7월로 예상된 트럼프 대통령의 오사카박람회 방문이 성사돼 미국과 일본 정상이 ‘화성의 돌’을 함께 관람할 경우 미국과 일본이 우주 개발 분야에서도 동맹을 과시하며 중국을 공동 견제한다는 ‘상징적 퍼포먼스’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관측이다. 오사카엑스포가 현재 진행 중인 관세전쟁에 이어 우주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감정싸움을 본격화하는 기폭제가 될 것인지를 두고 지구촌의 관심이 모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다.
2025-05-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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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일 근무 대신 주 3일 휴무로 가는 일본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삶의 질’ 높이려다 ‘삶의 터전’ 잃습니다.” 2002년 10월 2일 자 <부산일보> 2면 하단에 큼지막한 주 5일제 반대 광고가 실렸다. ‘정부 입법 예고안대로 주 5일제를 시행하면 경제가 죽는다’는 주장이다. 근로 의욕 저하, 과소비 유발, 경제에 치명적인 악영향….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내로라하는 기관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경제 5단체의 주장은 주 2일 휴무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믿기도, 상상하기도 어려운데, 당시 주 6일 근무는 신성불가침이었고 하루 10시간 근무도 예사였다. 토요일에 오전만 일하는 반공일이 주어지면 그저 감지덕지하던 때가 있었다.
들끓는 반대를 뚫고 마침내 주 5일제가 시작됐다. 2004년 여름의 일이다. 그렇다면 주 5일제 도입으로 한국 경제는 망가졌을까. 경제성장률을 보면 기우였다는 것이 단박에 드러난다. 달러 환산 실질 경제성장률은 2003년 3.1%였는데 이후 매년 5.2%, 4.4%, 5.2%, 5.8%로 성장 동력을 잃지 않다가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2008년 3.0%로 꺾여 2009년 0.8%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듬해 2010년 7.0%로 역전했다. 성장률이 상승세를 잃지 않았다는 건 근로시간이 줄었지만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감소분이 벌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생산성의 중요성을 돌아보게 만드는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에서 근무시간에 대한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주 4일 근무제는 논란의 중심이다. 호봉제 임금 구조나 정년과도 얽혀 있고 고용 측면에서 업종별, 세대별 이해관계도 엇갈리는 고차원 방정식이기도 하다.
한국에 앞서 고령화와 인구 감소에 직면한 일본은 ‘일하는 방식의 개혁’을 국가적 의제로 삼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정년에 대해서는 기업에 선택지를 주었는데 정년을 연장하지 않고 퇴직자를 재고용하는 방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근로시간 역시 비슷한 접근법이다. 선택적 주 3일 휴무제가 확산되고 있다. 주 5일제와 주당 근로시간은 유지하면서 평일 근로시간을 늘려 하루를 추가로 쉬는 방식으로 주 3일 휴무제를 만들었다. 도쿄도가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가는 등 지자체가 앞장서고 민간 기업이 뒤따르는 식으로 확대되는 모양새다. 왜 주 4일 근무제로 부르지 않고 주 3일 휴무제로 부르는지, 또 왜 이런 식으로 휴무를 늘리는 것일까. 워라밸 시대로 진입한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을 찾아 본다.
■ 평일 더 일하고 하루 더 쉬는 ‘3일 휴무’
일본 아사히신문은 최근 ‘지자체 주 3일 휴무제 확대’ 제목의 기사에서 평일 하루를 추가로 쉬는 방식의 주휴 3일 제도가 전국 지자체에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이 광역 지자체인 47개 도도부현을 상대로 조사했더니 도쿄도가 4월부터 주 3일 휴무제 시행에 들어간 것을 비롯해 모두 11곳에서 주 3일 휴무제를 결정했다.
이들 지자체에서 도입한 3일 휴무제는 근무 시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플렉스타임제가 전제가 된다. 본인이 출근하는 날의 근무 시간을 자율적으로 늘리되 주당 40시간의 법정 기준을 충족하면 평일 하루를 온전히 쉴 수 있는 방식이다. 도쿄도는 육아, 간병의 필요에 따라 조건부 인정되던 이 제도를 올해 4월부터 대다수 직원을 대상으로 확대 적용했다.
주 3일 휴무가 가능하게 된 것은 자유 근무 시간제에 해당되는 플렉스타임제가 확산된 덕분이다. 2019년 근로기준법의 플렉스타임제 조항이 개정되면서 근로시간 산정 기한이 최대 3개월까지 늘어나는 등 활용도가 높아졌다. 소정 근로시간을 채우는 조건으로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게 되면서 1주에 1일의 추가 휴무를 만들기 용이해진 것이다. 예컨대 월~금 닷새간 8시간씩 40시간을 근무해 왔다면 월~목 나흘간 10시간씩 근무해 40시간을 채운 뒤 금요일에 쉬는 방식이다. <위 사진 참조>
주 3일 휴무제는 총 근로시간과 임금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아래 표 참조>
우선 총 근로시간과 임금에 변화가 없는 근로시간 유지형이 있다. 사흘 쉬는 바람에 근로시간이 줄어도 급여가 동일한 급여 유지형과 쉬는 만큼 급여가 줄어드는 급여 감액형도 있는데 이 두 유형은 고용주와 근로자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자칫 갈등의 소지가 있다. 현재까지는 근로시간 유지형이 가장 일반적이다. 근로시간 단축과는 무관하게 정부 정책으로 추진되는 ‘일하는 방식의 개혁’의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형태다.
지자체 외에도 철도 회사 JR서일본이 4월부터 내근 직원 6000명을 대상으로 3일 휴무제를 시작하는 등 기업체에서도 확산되는 추제다. 대체로 근로시간과 급여를 유지하는 방식이 선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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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일 근무’ 대신 ‘3일 휴무’로 부르는 까닭
주 4일 근무제나 주 3일 휴무제는 1주에 나흘 출근하고 사흘 쉰다는 점에서 같은 말이다. 조삼모사처럼 비치는 이 어법은 워라밸(일과 삶의 조화)의 관점에서 읽을 때 속뜻을 알 수 있다. 주 3일 휴무제는 말 그대로 쉬는 날이 사흘이라는 점을 내세운다. 노동력 제공 의무를 규정하는 주 4일 근무제와 대비되는 지점이다. 또 주 4일 근무제는 총 근로시간의 감축을 전제로 치열한 논쟁으로 흐르기 십상이어서 오해를 피할 필요도 있다. 주 3일 휴무제 명명은 근로시간 감축은 별도 논의하되, ‘더 집중해서 일하고, 남은 시간을 자신의 삶을 위해 쓰자’는 긍정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도다. 삶의 질, 여가, 자기 계발, 가족과의 시간의 중요성을 따로 덧붙일 필요 없이 ‘사흘 쉰다’는 표현 그 자체에 워라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주 3일 휴무제 확산에는 전례 없는 구인난도 한몫하고 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면서 경제가 기지개를 켰지만 저출산과 고령화 탓에 구인난이 심화되고 있다. 구직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노동시장의 갑을 관계가 바뀌어 구직자 절대 우위 구조가 됐다. 인재 유치 경쟁이 치열해져서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3일 휴무제를 앞다퉈 도입하는 것이다. 실제 일본 인터넷 포털 사이트 야후재팬에서 ‘주 3일 휴무제’를 검색하면 ‘임금 하락 없는 3일 휴무 기업 리스트’가 넘쳐 난다. 취업 희망자가 자기 입맛대로 기업을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노동시장에 신규 유입되는 MZ세대가 어떤 기업을 선호할지는 분명하다. 기업으로서는 워라밸 경쟁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지자체가 휴무 확대에 앞장선 배경에도 인력난이 있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 지사는 휴무제 시행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직원들이 일하기 편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도입 이유를 설명했다. 이를 두고 일본 언론은 젊은 세대에서 공무원 선호도가 떨어지는 바람에 채용 시험의 경쟁률이 하락하는 상황을 이유로 분석했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지자체도 인재 유치 필요성 때문에 워라밸 경쟁력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 워라밸 시대에 진입한 한국의 선택은
한국에서 주 4일제가 처음 선거 공약으로 부상한 것은 2021년 서울시장 선거였다. 당시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현재 국민의힘 의원)이 주 4일제를 제안하며 치고 나왔고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는 4.5일제로 맞받았다.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는 “꿈같은 말”이라고 일축했다.
조기 대선에 임박한 작금에 근로시간 개편과 주 5일제는 주요 정당의 의제로 부상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주 4.5일제를 거쳐 주 4일제로 이행하는 방안을 20대 민생의제에 올렸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근로시간을 주 40시간에서 36시간, 32시간으로 단계적으로 줄이는 안을 내놨다. 국민의힘은 근로시간 단축 반대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유연한 주 4.5일제를 약속했다. 주 40시간제를 유지한 채 주중 근무를 1시간씩 늘려 금요일에 반일만 근무하는 방안이다.
두 정당은 서로의 방안을 혹평하고 있지만 적어도 워라밸 시대에 들어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과 삶의 조화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 5일제에 등장한 격렬한 반대 논리와 비교해도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어느 당에서 차기 정부를 구성할 지에 상관없이 근로시간 개편 논의는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미 일부 기업과 지자체에서 주 4.5일제가 시범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다. 선행 사례를 돌이켜보면 노동생산성과 워라밸이 관건이다. 단계적인 설계, 사회적 합의 도출에 성패가 달려 있다.
2025-04-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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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토핑 경제’ 왜 뜨나?
올해 소비 트렌드로 ‘토핑 경제’가 떠오른다. 토핑 경제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본질적인 부분보다 추가적이거나 부수적인 요소인 ‘토핑’이 더 주목받아 새로운 경제 효과를 창출하는 시장의 변화를 의미한다. 토핑은 피자를 떠올려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기본 도우(dough)에 다양한 토핑을 얹으면, 각자가 선호하는 최고의 맛을 만들어낸다. 토핑이 나만의 ‘최애’를 만드는 핵심적인 재료 역할을 하는 셈이다.
토핑 경제는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발간한 <트렌드 코리아 2025>에도 소개됐다. 범용상품을 개인화시키는 커스터마이징(맞춤 제작)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토핑 경제는 신발, 패션, 식품, 전자·가전, 뷰티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장 중이다. 구매 이후의 커스터마이징까지 미리 고려하고,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아주 미세한 차이까지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커스터마이징보다 폭넓은 개념이다.
■ ‘꾸안꾸’ 아닌 ‘꾸꾸꾸’ 시대
토핑 경제를 신발이나 패션에 접목해 본다면 ‘꾸꾸꾸’(꾸미고 꾸미고 또 꾸민다)가 대표적인 트렌드다. 얼마 전 대세였던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운 모습)와는 반대 의미다. ‘꾸꾸꾸’는 다양한 액세서리를 통해 나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트렌드다. ‘폰꾸’(폰 꾸미기),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등 특정한 상품에서만 포착되던 꾸미기 트렌드는 가방, 신발, 의류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가방에 다양한 키링과 인형을 다는 ‘백꾸’(가방 꾸미기), 신발에 독특한 신발 끈을 매거나 패치를 붙이는 ‘신꾸’(신발 꾸미기), 선글라스에 장신구를 탈부착하는 ‘선꾸’(선글라스 꾸미기) 등이 대표적이다. 바야흐로 자신의 입맛대로 상품을 꾸미는 ‘N꾸’의 시대로 접어든 셈이다.
특히 신발 종류인 크록스는 토핑을 활용해 반전 매력을 이끌어낸 대표적 사례다. 2010년 <타임>에서 ‘50가지 최악의 발명품’ 중 하나로 선정됐던 ‘못난이’ 크록스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패션 브랜드 1위에 선정됐다. 매년 1억 5000만 켤레가 판매된다. 크록스 인기를 이끈 1등 공신은 액세서리 ‘지비츠’이다. 지비츠는 크록스 신발에 있는 구멍에 맞춰 부착할 수 있는 액세서리다. 지비츠는 수많은 모양으로 출시돼 무한한 커스텀이 가능하다. 취향에 따라 다양한 지비츠를 부착해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 지비츠는 초반에 자체 개발 디자인으로 시작했지만, 현재 디즈니, 마블 등 인기 캐릭터, 저스틴 비버와 같은 팝스타, 명품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독특한 제품 탄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크록스는 국내에서 꾸준한 매출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데, 토핑인 지비츠가 이를 견인하는 셈이다.
전자·가전과 화장품업계도 토핑 경제 흐름에 동참했다. 다이슨이 지난해 9월 출시한 오디오 전용 블루투스 헤드폰 ‘온트랙’은 무려 2000가지 이상의 색 조합이 가능한 디자인 커스터마이징을 지원한다. 화장품업계에서도 인공지능(AI), 딥러닝 등을 활용해 개인의 피부 진단부터 제품 추천, 생산까지 이뤄지는 ‘뷰티테크’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 식품·외식업계 성공 키워드 토핑
식품·외식 업계에서 단연 인기를 끈 토핑 경제 트렌드는 ‘요아정’(요거트 아이스크림의 정석)이다. 요아정은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50여 개의 토핑을 취향에 맞게 조합해 즐길 수 있는 디저트 프랜차이즈다. 소셜미디어(SNS)에 이른바 ‘최애 조합’을 추천하며 유행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Z세대의 인기 음식 반열에 올랐다. 기본 상품인 아이스크림보다 부수적 요소인 토핑이 브랜드의 성공을 이끈 것이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도 이러한 소비 트렌드를 겨냥해 고객 잡기에 나섰다. 오는 28일까지 지하 1층 시그니처 팝업존에서 ‘요거트월드’ 팝업스토어 행사를 이어간다. 해당 팝업스토어의 토핑바에서 취향에 맞는 커스터마이징 디저트를 직접 만들어 색다른 맛과 재미를 경험할 수 있다.
스타벅스도 토핑 경제의 대표적 사례다. 스타벅스는 소비자의 기호에 따라 시럽·우유·자바칩 등을 추가하거나 뺄 수 있는 커스텀 주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즌별로 선보이는 젤리, 크림폼 등 한정 토핑은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또 스타벅스는 지난해 개점 25주년을 맞은 1호점 ‘이대점’에 국내 최초로 텀블러 각인 서비스를 도입했다. 소비자가 희망하는 문구나 애칭 등을 텀블러에 새길 수 있는 것이다. 글자는 최대 10자까지 가능하며, 폰트와 이미지도 선택할 수 있다. 현재 이대점 방문 고객 4명 중 1명이 각인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한다.
■ Z세대가 토핑 경제 주축
1995년부터 2009년 사이 태어난 Z세대가 시장의 새로운 소비 주축으로 급부상하며 토핑 경제의 흐름이 강화하고 있다. Z세대는 단순히 소비에 개인화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 소비자가 주체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토핑을 얹고 바꾸는 창의적 소비를 선호한다. 최근 우리나라 Z세대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으로 꼽혔던 마라탕, 버블티, 요아정의 공통점은 소비자 개개인이 각자 좋아하는 토핑을 선택해 나만의 메뉴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토핑 경제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타인과는 다른 나만의 것을 추구하고 차별화하고자 하는 심리 때문일 것이다. 특히, 자기표현 욕구가 강하고 SNS를 통한 과시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이러한 트렌드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기능이 포함된 패키지 상품 대신, 필요한 옵션만 추가해 합리적으로 소비할 수 있다는 점도 이들에게는 매력적이다. 비용 절감과 효율적인 소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AI 발전으로 정교하게 진화
토핑 경제는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게 이점을 제공한다. 소비자는 자신만의 개성을 반영한 제품을 경험하고, 기업은 이를 통해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토핑 경제는 소비자의 개성과 맞춤형 경험을 중시하는 추세에 맞춰 AI 등 기술 발전과 함께 더욱 정교하고 다양한 맞춤형 소비 트렌드로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토핑 경제’를 제시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더 이상 손댈 데 없는 완벽한 기성품을 선보이려 하기보다는 다양한 토핑 생태계를 구축해 소비자가 상품을 재해석하고 참여할 여지를 제공하라”고 조언한다. 고객이 상품을 단순히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상품을 구매한 이후에도 계속 해당 브랜드를 찾고 소비하게 만드는 전략을 기업이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다.
2025-04-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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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은 망했다, 이날부터
한때 전국 제2도시였다가 지금은 ‘노인과 바다’뿐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도시.
8대 광역시 가운데 평균 소득이 꼴찌인 도시.
지역청년 3명 가운데 1명이 취직할 곳이 없다며 떠나겠다는 도시.
바로 부산이다. 이 팩트대로라면 부산은 망했다. 그것도 철저히. 가장 가까운 시점에 새로 통계를 잡는다면 이미 제2도시 자리도 인천에 넘어가 있을지 모른다.
부산은 왜 이렇게 처절하게 망하고 말았을까.
부산 밖에서 부산을 바라보며 쉽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진단은 늘 이렇다.
“신발산업 위주 경공업 중심지였던 부산은 주력 산업 쇠퇴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대처하다 중공업이나 첨단산업으로의 산업 구조조정에 실패했다.”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의 모든 지역이 개미처럼 피나게 산업 구조조정을 하는 동안 부산은 놀고 먹었던 베짱이처럼 행동했다는 느낌을 주는 이 말은 과연 사실인가.
■부산이 망하기 시작한 날
개인이든 조직이든 더 나아가 지자체든 국가든 한 대상의 족적을 평가하기 위해선 그 대상이 딛고 서 있는 토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불공평의 대명사처럼 자주 언급되는 ‘기울어진 운동장’ 따위가 토대에 깔리면 그 족적을 결과 그대로 평가할 수 없다. 제대로 디디고 서있기조차 힘든 토대에서 왜 도약의 족적을 남기지 못 했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비판하는 당사자가 더 비판받아야 할 행동이다.
기자는 현재 상태 폭삭 망한 듯한 부산의 족적이 기울어진 토대 위에 쌓아올린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기울어진 토대가 만들어진 시점이 부산이 망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봐야 한다는 입장이며 그 시점은 특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이 망하기 시작한 날은 1972년 1월 1일이다.
그날은 법인 등록세법이 개정되면서 대도시에 법인을 설립하거나 공장, 분점 등을 설립할 경우 타지역 취등록세의 5배를 중과세하기 시작한 날이다. 오타가 아니다. 2배나 3배가 아니라 자그마치 5배다.
그럼 저 법에서 대도시는 어디를 뜻하는가. 당시엔 서울특별시와 부산직할시 두 곳만이 대도시에 해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부산을 서울과 같은 반열에 놓고 규제를 한 것이다. 인구와 경제력의 도시 집중을 막고 국토 균형발전을 꾀한다는 게 이유였다.
1945년에 28만 명에 불과하던 부산 인구가 25년 만에 20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부산이 압축적인 성장을 거듭하자 당시 중앙집권 정부가 생각해 낸 게 바로 부산 억제책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과 달리 중추관리기능이 약한 부산에 내려진 이 극약처방은 곧바로 부산의 발목을 옥죄는 족쇄가 됐다.
족쇄는 10년 뒤 무게를 더해 하나가 더 달린다. 정부가 제2차 국토계획을 추진하면서 부산을 서울과 함께 성장억제 및 관리 도시로 지정한 것이다. 그 전에 1977년엔 공업배치법에 따라 부산 일대를 제한정비지역으로 지정해 공장의 신설 또는 증설을 법적으로 제한하기까지 이른다.
■기업 탈부산 러시
부산에 채워진 취등록세 중과세 족쇄는 1995년이 돼서야 풀린다. 20년이 넘도록 채워진 족쇄로 인해 부산이 겪은 가장 아픈 상처는 굵직한 기업의 잇단 이탈이다.
부산은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찍부터 LG와 삼성 등 대표적인 대기업 집단이 자리를 잡고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던 대기업들이 부산지역 공장 설립 등에 애로를 겪자 경남이나 수도권에 공장을 옮기거나 서울로 본사를 옮기는 등의 조치를 잇따라 취한다. 부산진구 연지동에 위치한 LG 사이언스홀 외에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진 대기업들의 자취는 그렇게 부산에서 오롯이 사라졌다.
그 시기가 취등록세 중과세와 제한정비지역 지정 등과 대부분 겹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기업들이 부산 규제 때문에 다 나갔다고 한다면 어폐가 있는 말이 되겠지만 기업이 부산으로 올 이유나 메리트가 없어졌기 때문에 부산에서 사업을 접는 것이 낫다고 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대기업이 떠나면서 부산지역 제조업은 구조조정의 힘을 완전히 잃었다. 중공업이나 첨단산업 등 새로운 산업을 받아들일 혁신역량을 키우기도 전에 대기업부터 빠져나가면서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의 이탈은 갈수록 심화했다. 얼마나 이탈이 심했던지 부산상공회의소가 기업 역외이전 통계를 몇 년 동안 아예 발표조차 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부산지역 기업 역외 이전 등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를 해 온 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김대래 교수는 “서울은 제조업을 인근 지역으로 보내고도 국가 수도로서 중추관리기능을 중심으로 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부산은 역외 이전 이후 이 같은 산업을 일으킬 만한 여력이 전혀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썩어도 준치라 했건만
수십년 동안 규제를 당해 온 부산은 그러면 가만히 있었던가.
1995년 당시 통상산업부가 공업배치법을 개정하면서 인천 등 수도권에 첨단업종 대기업 신증설 허용 등의 내용을 포함시키자 부산 상공계는 분노로 들끓었다. 당시 건설교통부조차 부산 등 광역권 개발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의 수도권 공장 증설을 허용하면 기업의 수도권 집중이 심화할 것이라 반대 입장을 밝혔으나 이마저도 무시당했다.
당시 부산상공회의소 강병중 회장은 부산지역 상공인들의 뜻을 모아 공장용지난에도 각종 규제로 신음하는 부산의 처지를 강변하고 부산의 성장관리도시 규제를 풀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게 거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아직까지도 수도권 규제 완화는 수시로 고개를 들고 부산은 상대적 박탈에 시달리는 중이다.
중추관리기능을 극대화한 수도권의 탐욕적 성장에 비례해 부산은 끝없이 추락했다. 제조업의 궤멸적 몰락에 따라 서비스업 중심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한 시도를 거듭했으나 그조차 잇단 좌절을 맛봐야 했다. 20년 넘게 끌어온 신공항 논란이 그랬고 아직도 채울 길이 막막한 북항재개발이 그랬다. 엑스포 유치는 꿈만 꾸기에도 벅찼고 각종 특별법은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로 핵심내용이 빠지기 일쑤였던 데다 복합리조트 같은 과감한 시도는 돌팔매질에 시달렸다.
단언컨대 부산은 부산의 게으름 혹은 무능으로 몰락을 거듭해 온 것이 아니다. 중앙집권 시대엔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일방적 규제의 족쇄를 차야 했고 지방자치 시대엔 역시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이 지역의 정당한 요구까지 배제의 대상이 됐다. 부산의 발을 옥죈 규제와 배제의 역사가 너무 오래돼 시민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고 해서 그로 인한 일방적 피해까지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해선 곤란하다. 중앙집권 시대 중앙정부가 막았던 부산의 성장이 지방자치 시대에서조차 막혀버린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 수도권의 끝없는 팽창을 방치한다면 균형발전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떠벌이는 구두선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부산은 오늘도 규제와 배제로 인한 상처를 딛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2025-04-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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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고물가 ‘노 마크 찬스’ 때문?
물가가 끝없이 치솟고 있다. 원·달러 환율 급등과 원재료 비용 상승 등의 여파로 최근 가공식품을 비롯한 여러 제품의 가격 인상이 잇따르고 있다. 실제로 올해 가격을 인상했거나 인상 예정인 식품 및 외식업체는 40개가 넘는다. 커피, 빵, 라면, 햄버거 등 서민들이 자주 소비하는 식품 가격이 줄줄이 오르면서 물가 부담은 날로 커지고 있다. 이른바 ‘물가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12·3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 속에서 정부가 물가 관리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사이, 기업들이 이런 ‘노 마크 찬스’(no mark chance)를 활용해 가격 인상을 단행한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어떤 게 올랐나?
가격 인상은 품목을 가리지 않는다. 시기와 관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안 오르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대표적인 ‘서민 음식’인 라면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다. 농심은 지난달 17일부터 신라면을 1000원으로 올리는 등 14개 라면 제품의 가격을 올렸다. 오뚜기도 지난 1일부터 27개 라면 중 16개 제품의 출고가를 평균 7.5% 인상했다. 빵, 과자, 빙과류 등도 마찬가지다. 파리바게뜨는 2년 만에 빵 96종과 케이크 25종의 가격을 평균 5.9% 인상했으며 뚜레쥬르 역시 이달부터 빵과 케이크 110여 종의 가격을 평균 5% 올렸다. 매일유업도 이달부터 컵커피, 치즈, 두유 등 51종의 제품 가격을 평균 8.9% 인상했다. 주요 아이스크림 역시 가격표를 높여 붙였다. 최근에는 서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햄버거, 맥주도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커피 가격도 예외가 아니다. 스타벅스가 1월 원두 가격과 환율 급등을 이유로 가격을 인상하자 다른 커피 브랜드들도 가격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이와 같은 가격 인상 흐름은 정부의 공식 통계에도 반영될 정도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3월 가공식품 물가 상승률은 3.6%로 1년 3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는 올해 1~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2.1%)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특히 김치 15.3%, 커피 8.3%, 빵 6.3% 상승하며 가공식품 물가 전체를 끌어올렸다. 지난해 가공식품 물가 상승률은 1%대에 그쳤다.
■물가 상승 이유는
물가 상승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식품업계는 가격 인상이 원재료 비용 상승, 원·달러 환율 급등,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 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순한 비용 증가만으로 대규모 가격 인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실제로 식품업체들이 가격을 올릴 때 그 근거를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탄핵 정국이라는 혼란 속에서 일부 기업들이 이를 기회로 가격 인상을 단행한 측면도 존재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 몇 달간 정부가 물가 관리보다는 정치적 이슈에 집중하는 사이, 기업들이 소비자의 부담을 고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3월 중순 주요 식품업체들과 간담회를 열어 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기업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격을 계속 올리고 있다. 정부의 ‘호소’가 실효를 거두지 못한 셈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가격 인상이 경쟁보다는 가격 담합에 가까운 움직임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단순히 3월 가공식품 물가 상승률 3.6%라는 숫자는 그리 커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는 단순히 통계상 보고된 숫자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 특히 식품 가격 상승은 가계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가뜩이나 얼어붙은 소비 심리를 더욱 위축시켜 내수 경기의 부진을 더 악화시킬 우려가 크다. 지금이라도 물가 상승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소비 위축과 경기 둔화 현상은 불 보듯 뻔하단 얘기다.
■저소득층 부담 가중
문제는 이러한 가격 인상이 서민들의 장바구니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서민이 고물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가격 인상이 가속화되면서 그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다. 특히 저소득층은 물가 상승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다. 500원, 1000원의 차이가 일부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저소득층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통계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 가구는 필수 소비재인 식료품비 상승이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최근 한국경제인협회가 2014년부터 2024년까지의 소득분위별 체감물가 상승률을 분석한 결과 소득 하위 20%인 1분위의 체감물가 상승률은 23.2%로 나타났는데, 이는 상위 20%인 소득 5분위(20.6%)보다 2.6%포인트 높은 수치다. 소득이 낮을수록 물가 상승의 압박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저소득층의 부담을 가중하는 주요 원인은 식료품비와 난방비 등 생존과 직결된 필수 비용이다. 저소득층은 처분가능소득에서 식비와 주거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득 1분위 가구는 식료품·비주류음료(20.9%), 주택·수도·광열(20%), 보건(12.6%) 순으로 지출 비중이 높았지만, 소득 5분위 가구는 교통(13%), 교육(10.5%), 오락·문화(9%) 순으로 지출이 많았다. 이처럼 식료품 가격 상승은 저소득층에게 치명타가 된다는 얘기다. 고물가가 무서운 이유는 빈곤층을 비롯한 서민들이 직격탄을 맞기 때문이다. 물가가 급등하면 생계비는 늘어나지만, 소비 여력은 줄어들어 사실상 실질소득이 감소하게 된다. 고물가를 ‘소리 없는 도둑’이라 부르는 이유다.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
최근 영남 지역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인해 지역 농가도 큰 피해를 보면서 향후 농산물 수급 불안정에 따른 가격 인상 가능성도 커졌다. 게다가 5월 ‘가정의 달’을 앞두고 외식 물가가 오를 가능성도 있다. 자칫 고물가가 상당 기간 지속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다. 이대로 두면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된 지금, 정부가 물가 안정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가를 잡지 못하면, 탄핵 정국보다 더 큰 경제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
고물가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결은 결국 행정이 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이 ‘소리 없는 도둑’이 내수 경기 회복을 지연시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이에 정부는 기업들의 가격 인상에 대해 단순한 요청이나 협조·당부를 넘어 보다 강력한 주문과 함께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독과점적 지위를 이용한 과도한 가격 인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감시도 필요하다. 아울러 기업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가격 인상 과정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가격 인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그 근거를 명확히 공개하고 불필요한 가격 인상은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적 장치가 필요하다.
정부가 제대로 된 물가 안정 정책을 펼치지 않으면 '노 마크 찬스'를 악용한 과도한 가격 인상이 서민들에게 직격탄을 날릴 수밖에 없다.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지금도 벼랑 끝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다. 이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날뛰는 물가부터 잡아야 할 때다.
2025-04-05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