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액션을 넘어선 감정의 깊이
영화평론가
애니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전기톱이 그려내는 폭주 액션 속
파멸과 순수가 공존하는 로맨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제공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기가 심상치 않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계보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 또는 견고한 마니아층을 지닌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말려’ 같은 한국인에게 익숙한 시리즈와는 결이 다르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개봉하고 있는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극장판 주술회전: 회옥·옥절’로 이어지는 흥행 흐름은 과거의 작품들과는 다른 감수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특히 올해 하반기 개봉한 ‘귀멸의 칼날’과 ‘체인소 맨’은 한국에서만 각각 560만 명과 3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들었다. 시리즈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만큼 어느 정도 서사를 알고 있어야 영화의 내용을 따라갈 수 있는데도 이런 성과가 나왔다는 건 놀랍다. 이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학과 정서에 익숙해진 10대, 20대의 감수성이 극장 경험으로까지 자연스럽게 확장된 결과로 읽을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과거 개봉작들이 주로 가족 서사나 판타지적 유희를 중심에 두었다면, 최근 작품들은 잔혹한 현실과 윤리적 긴장, 그리고 ‘생존’이라는 근원적 질문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원작자인 후지모토 타츠키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스크린으로 확장한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복잡한 설정과 보편적인 감정 사이의 균형을 포착하며 완성도를 보여준다. 애니메이션은 전기톱 악마 포치타와의 계약으로 체인소 맨이 된 소년 ‘덴지’ 앞에 신비로운 소녀 ‘레제’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전 세계 누적 발행 부수 3000만 부를 돌파한 원작 중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에피소드를 선택한 만큼, 만화의 감정선을 충실하게 옮겨오고 있다. 여기에 요시하라 타츠야 감독은 액션 디렉터 출신이라는 경력을 바탕으로 만화적 상상력을 리듬감 있는 전투 장면과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화면 구성으로 영화적 깊이를 더한다.
이 작품이 던지는 핵심은 덴지의 ‘인간적인 마음’이 레제와의 관계 속에서 시험받는 순간들에 집중되어 있다. 덴지는 악마와의 계약으로 몸이 변했음에도 따뜻한 밥, 안정된 일상,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품은 인물이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갑작스럽게 스며드는 존재로, 비 오는 날 전화박스 안에서 나누는 대화나 함께 도망을 꿈꾸는 짧은 순간들은 둘 사이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레제가 그 순수를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감정의 온기와 비극적 긴장은 극도로 고조된다.
파멸과 순수가 공존하는 이 로맨스는 덴지가 삶의 목표로 삼을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레제에게 주어진 임무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미래였음이 드러난다. 결국 이들의 관계는 순수한 감정이 잔혹한 현실과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이 남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물론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파괴적이고 역동적인 액션이지만 이를 단순한 히어로물의 쾌감으로만 소비하기 어렵다. 치열한 싸움 이후의 선택, 레제를 바라보는 흔들리는 눈빛은 사랑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의 결말은 덴지가 절망 속에서도 인간적 감정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지점으로 도달한다. 이는 레제와의 이별을 통해 덴지가 성장했다는 서사가 아니라 상처를 지닌 채로도 타인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로 이어진다. 즉 ‘체인소 맨’이 그리는 것은 영웅의 탄생이 아니다. 후지모토 타츠키 원작이 지닌 감정의 핵심을 요시하라 감독의 시선으로 다시 비춘, 현실의 잔혹함 속에서도 인간성의 마지막 조각을 지키려는 소년의 감정적 윤리이다. 그리고 이 감정의 윤리는 전기톱이 그어내는 폭주 액션과 폭탄이 터지는 전투 스펙터클이 더해질 때 오히려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