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세계문학을 버리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상국(1946~)

세계문학을 버렸다

수심에 잠긴 세에라자드도 덮고

햄릿이나 그레고르 잠자 같은 군상들은 노끈으로 묶어

폐지 장수에게 줘 보냈다

세계문학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다

한때 그들이 사랑하고 미워하던 세상이 있었고

그들 따라 웃고 울던 무리들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하드커버로 나를 장식해주었던

문학을 내다 버렸다

교산은 어린 길동을 달래 사천 외가로 보내고

불쌍한 아Q도 울며 집을 나간지 오래

그들은 세상에 버림받았고 혁명도 끝이 났으며

인간도 이전의 인간은 아니다

세계를 버렸다

이사업자들에게는 최악의 상대이며

비용 견적만 높이는 세계문학을 버렸다

나는 이미 세계인이 된지 오래되었고

많은 미래가 과거가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아파트에는 세계가 들어갈 데가 없다

폐지 장수 리어카에 실려가는

조르바나 돈키호테 같은 이들이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분개했지만

세계는 변했고 나도 이전의 내가 아니므로

미련없이 그들을 버렸다

시집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2025) 중에서

지금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패권과 갈등으로 전쟁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진리와 가치가 담겨있는 고전이 더 이상 이 세계에 도움이 될 수 없는 걸까 생각해봅니다. 혁명 없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세계문학이 이사비용 견적만 높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는 시인의 말과 나를 장식해주었던 문학이란 말을 곱씹게 됩니다. 급변하고 있는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전은 여전히 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는 훌륭한 지침서임을 확인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