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산이 낳은 평화교육 선구자, 이경태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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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영 서울대 교육종합연구원 책임연구원

1911년 지금의 부산 구포에서 태어난 이경태(李慶泰). 가정형편이 어려워 서울로 이주하던 가운데 8살 때 눈앞에서 3·1운동을 목격했고, 중학생 때는 원산항에서 일본으로 실려 가는 수많은 소 떼를 보며 조선이 힘을 기르려면 교육밖에 없다고 다짐했던 소년은 이후 오사카에서 재일동포 교육의 큰 등대가 되었다.

고베에서 해방을 맞이한 조규훈(曺圭訓)은 성공한 실업가였다. 그는 언젠가는 꼭 돌아갈 고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을 위한 학교 설립을 위해 교육전문가를 수소문하여 이경태를 찾아낸다.

두 사람은 징용되어 온 조선인 젊은이들과 함께 백두동지회(白頭同志會)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1946년 3월 조선건국공업학교와 조선건국고등여학교을 창학한다. “해방 직후에 학생 200명, 교직원 16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 학원을 만들었다는 것도 그야말로 참말로 36년간 일제 압박하에 있다가 해방의 선물로 된 거지.” 법학을 전공하고 일본에서 정규학교 교사 경험이 있던 그는 처음부터 일본 정부의 정식 인가를 목표로 했다. 후대를 우리 손으로, 일본인보다 나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결과 1948년 일본 문부성의 조선인 학교 폐쇄라는 부당한 과정에서도 1949년 정규사립학교로 인가받는다. 1985년 금강학원이 인가받기까지 40년간 백두학원은 조선학교와 재일한국학교를 아울러 유일하게 대학 진학이 가능한 학교였다. 졸업생 중 1기부터 20기까지만 해도 박사학위 취득자가 23명에 달한다.

이경태는 새로운 시대에 맞춰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담아 어떠한 인재를 육성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 이념을 교훈으로 만들었다. 자주(自主), 상애(相愛), 근검(勤儉), 정상(精詳), 강건(剛健)은 놀랍게도 한국의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과 일치한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미래 교육의 방향으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이경태의 진정한 위대함은 평화교육에 있다. 1948년 남북 각각의 정부 수립,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재일동포 사회마저 갈라섰을 때도 백두학원은 유일한 남북공학이었다. “조국은 남이고 북이고 내 조국이며, 장래 통일이 될 것을 어찌하여 우리가 두 동강으로 나눌 수 있는가!” 분단 이후 태극기를 다시 올리지 않은 것은 조국 통일을 염원하는 증거였다. 만약 조국이 통일되었다면 그 어느 곳보다도 높이 국기를 게양하고 그 누구보다도 크게 국가를 불렀을 것이다. 한국에서 멸공, 반공을 외치던 시절, 이경태는 자주·평화·통일교육을 실천했다. 한국에서 통일교육이 시작된 것은 1972년이다.

2015년 부산MBC는 백두학원 전통예술부의 활동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이바라키의 여름’을 제작, 호평을 받았다. 최근 나라(奈良)에서의 한일정상회담 중 재일동포 간담 행사에서 백두학원 전통예술부가 문화 공연을 펼쳤다. 이경태가 창학한 백두학원은 지금도 한일 문화 교류의 주역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경태는 조총련계로 왜곡됐다. 필자의 학술 연구를 통해 그는 자주·평화·통일이라는 명확한 국가관 아래 교육의 자주성과 학원의 자율성에 근거해 평화교육을 실천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도 관련 기록을 수정했다.

이제 우리는 바로잡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그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2026년 백두학원 건학 80주년을 앞두고 부산이 먼저 나서야 한다. 부산 출신 평화교육 선구자 자이니치 이경태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숭고한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미래세대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자 평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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