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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대구서 본 간송 문화재
만금의 재산과 우리 문화재에 대한 열정으로 세워진 간송미술관(옛 보화각)은 바로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의 문화보국 정신의 구현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건물 규모 자체는 소박한 편이지만 소장 유물의 수준은 어느 박물관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그 존재 자체가 각별하다.
그러나 일반인을 위한 미술관 관람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어서 평상시엔 여간해서 잘 볼 수가 없다. 그러니 미술관이 있는 서울이 아닌 지방의 애호가들에겐 더더욱 그림의 떡이다. 그렇게 이름만 들어왔던 간송미술관의 문화재를 최근 지방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부산과 가까운 대구에 대구간송미술관이 지난달 초 개관하면서 기념으로 국보·보물전을 연 것이다. 전시물도 서울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국보·보물 40건 97점으로 지방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문화재로 구성됐다.
이 중에서도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 국보 중의 국보로 불리는 훈민정음해례본과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단연 최고의 관심 대상이었다. 관심이 뜨거웠던 만큼 두 문화재는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에서도 각각 별도의 공간에 전시됐다. 관람객들은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값을 따질 수 없는 문화재의 실물을 직접 접한다는 생각에 사뭇 조심스럽고 삼가는 자세가 역력했다. 개관전을 찾은 관람객 대부분의 주목적도 이 두 유물의 친견에 있는 듯했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첫 대면의 느낌은 은근하면서도 강렬했다.
다만 국보급 유물에 비해 대구간송미술관의 전시 운영은 대체로 실망스러웠다. 전시된 문화재의 훼손을 막으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관람객을 마치 감시 대상으로 여겨 수시로 간섭·통제하려 한 것은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나치게 어두운 조명 때문에 유물을 좀 더 가까이 보려고 다가서면 여지없이 운영 요원의 제지가 끼어들었다. 유물을 보는 중에도 뒷사람을 위해 그만 이동해 달라는 요구에 관람객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찾기는 어려웠다. 유물 설명문도 어두운 데다 글자마저 너무 작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대구간송미술관 덕분에 지방에서 보기 어려운 국보급 문화재를 친견하게 된 경험은 잊을 수 없지만 그 반대급부로 관람 과정에서 타박에 가까운 홀대를 느껴야 했다면 과한 언사일까. 더구나 부산에선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대구까지 가야 했던 심정도 씁쓸한 터였음에랴.
2024-10-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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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독서 인증샷
SNS의 시대에도 오프라인 독서클럽은 나름대로 북적이는 모양새다. 회원들은 ‘강제 독서’가 가장 큰 매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같은 책을 읽고 여러 사람들과 토론하기 때문에 내가 선호하지 않는 주제나 작가의 책이라도,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라는 뜻이다. 책 읽기가 작가나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삶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는 이유기도 하다. 좋아하는 분야만 알고리즘으로 계속 추천하는 유튜브나 SNS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의 독서 현실은 매년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참담한 상황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중 6명가량은 1년간 수험서 잡지 등을 제외한 일반 도서를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1994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일·공부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나 ‘책 이외 매체를 이용해서’가 주된 이유라고 한다.
이는 최근 SNS에 떠도는 짧으면 15초, 길어도 2~3분 정도의 자극적인 숏폼(짧은 영상)에 밀려 ‘책을 읽는 행위’가 줄어들고, ‘영상을 소비하는 시대’가 대세인 탓도 크다. 지하철에서는 젊은 층은 물론이고, 중장년층 승객들도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숏폼에 빠져 있는 장면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책을 대신한 숏폼의 중독성은 뇌 건강에 손상을 줄 정도로 심각하다고 한다. 미국 연방정부는 대표적인 SNS인 틱톡이 중독성 있는 소프트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해 어린이 정신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로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할 정도이다. 이런 숏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독서가 큰 도움이 된다.
마침, 한글날 직후에 소설 〈채식주의자〉를 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한민국에 독서 신드롬이 불고 있다. 서점에는 이미 그의 여러 대표작이 동나고, SNS에 책 구입이나 책을 읽는 모습을 찍은 게시물이 쏟아지고 있다. 노벨상 수상이 한국에서 책을 읽고 세상과 소통하는 문화를 확산하는 계기가 된 상황이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이다. ‘책을 읽는 행위가 멋진 이미지’로 각인되도록 책을 읽는 자신의 모습이나 리뷰를 SNS에 인증샷이나 숏폼으로 올리는 문화도 만들어 볼 만하다. 책과 가까워지고, 책 읽기의 진정한 재미를 만끽하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독서클럽에 가입하는 것도 권장한다. 독서가 한국의 중요한 문화로 자리 잡아 개인과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기를 희망한다.
2024-10-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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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맥주와 정치
서양에서는 맥주가 종종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맥주는 와인이나 위스키와 달리 일종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음료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2023년 미국의 맥주 버드라이트 제조회사는 한 트랜스젠더 인플루언서에게 맥주를 협찬한 게 논란이 됐다. 이를 알게 된 미국 내 보수 성향 정치인들과 인플루언서들이 강한 반감을 표하며 버드라이트를 보이콧했다. 이들은 성소수자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들이 즐겨 마시던 맥주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그 결과 버드라이트의 매출과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이 사건은 맥주가 단순한 음료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맥주는 때때로 정당 이름으로도 등장하는데, 유럽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맥주당’이 존재해 왔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맥주당이 1990년대 소련 공산주의가 몰락한 시기에 창당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1990년 12월 창당한 폴란드 맥주애호가당이다. 이듬해 총선에서 16석을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체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노르웨이 등에서 맥주를 내건 정당이 등장한다. 이들 정당은 불안정한 민주주의와 기성 정당에 대한 대안으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정치적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에는 2014년 창당한 오스트리아의 맥주당이 주목받았다. 2022년 10월 치러진 대선에서 득표율 3위에 오른 30대 젊은 청년 도미닉 블라즈니가 속한 당이 오스트리아 맥주당이기 때문이다. 이 당은 정치 무력증에 빠진 기존 유권자를 선거로 불러 모으는 계기를 만들었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 잠깐 활동했다가 사라졌던 맥주애호가당이 다시 등장했다. 러시아 일간지 코메르산트에 따르면 지난 5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맥주애호가당 재창당 총회가 열렸다. 부활한 이 정당은 현 정부에 진보적인 대안을 제시하겠단 포부도 밝혔다. 앞서 이 당은 1994년 러시아 법무부에 등록돼 1998년까지 존재했지만,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러한 흐름에서 보면, 이 당이 향후 선거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오늘날 맥주는 대중에게 정치적 낭만을 제공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술 소비량이 많은 우리나라에도 맥주당이 생긴다면 어떤 정치를 보여줄지 사뭇 궁금하다. 어쩌면 맥주당보다는 소주당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답답한 속을 푸는 데는 소주가 제격이다. 국내 정치를 바라보면 속이 터질 지경이니 말이다.
2024-10-10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