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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공원 속 콘서트홀, 바닷가 오페라하우스
‘숲속 공연장’이라는 별칭을 가진 부산콘서트홀. 부산 첫 클래식 전용 공연장으로 지난 20일 개관했다.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 내에 위치한 덕분에 창밖으로 푸른 나무와 잔디를 볼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인 곳이다. 지난 주말, 공연 중간 휴식 시간에 콘서트홀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다. 잔디밭 위에서 바람을 쐬는 관객들의 여유로운 한때를 보고 있으니, 그동안 즐겨 찾던 경남 통영국제음악당 야외에서 탁 트인 바다를 조망하던 관객들의 행복한 얼굴이 겹쳐졌다.
매년 봄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기간이 되면, 클래식 애호가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는다. 부산·경남 지역뿐 아니라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구 팬들이 몰려들어 음악제 기간엔 숙소 구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올 3월 행사 땐 국내 클래식 팬들이 현재 가장 보고 싶어하는 연주자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개막 공연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야말로 ‘피켓팅’(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켓팅)이 벌어졌을 정도다.
이제는 부산도 그런 공연장과 음악 축제를 보유한 도시가 됐다.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클래식부산 정명훈 예술감독이 함께하는 부산콘서트홀 개막 페스티벌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게다가 2027년엔 바닷가 공연장인 부산오페라하우스도 부산항 북항에 문을 열 예정이다. 통영국제음악당처럼 바닷바람을 맞으며 좋은 공연을 기다리는 설렘을 부산에서도 곧 느낄 수 있게 된다.
부산의 랜드마크가 될 두 공연장의 장소성도 눈여겨봐야 한다. 콘서트홀이 위치한 부산시민공원은 일제강점기 서면 경마장, 광복 후 주한미군사령부(캠프 하야리아)를 거쳐 100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오페라하우스가 건설 중인 부산항 북항 역시 1876년 개항한 후 146년 만에 친수공간으로 재개발돼 시민에게 환원됐다. 이런 이야깃거리까지 더해진 두 공연장이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 본다.
장밋빛 전망만 나오는 건 아니다. 부산콘서트홀이 개막 페스티벌을 화려하게 치러내기는 했지만, 개관 초기 화제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유명 연주자나 오케스트라 공연에만 관객이 몰리는 편중 현상은 공연예술계의 해묵은 과제다. 한 지역 음악계 관계자는 개막 페스티벌의 관객 층이 눈에 띄게 젊어진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는데, 이 역시 개관 효과에 따른 일시적 현상은 아닌지 염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고 SNS에 인증하기 좋아하는 젊은 층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들을 지속적으로 유인할 좋은 콘텐츠 기획이 필수적이다. 미래 관객 발굴 노력도 다각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지역 음악 단체와의 상생 노력도 필요하다. 지난 20일과 21일 개관 기념 공연 ‘하나를 위한 노래’를 관람한 관객 중 일부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공연을 부산시립합창단이 아닌 창원시립합창단이 맡은 데 대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개관 페스티벌을 마무리하는 지난 27일과 28일 콘서트 오페라 ‘피델리오’ 공연에 국립합창단과 부산시립합창단이 함께하긴 했다. 그러나 개막 공연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부산시립예술단의 적극적인 참여가 아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개막 페스티벌에 부산시립교향악단의 무대가 빠진 것 역시 비판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일각에선 “의도적 배제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부산문화회관, 부산시민회관 같은 기존 노후 공연장 시설 개선도 남은 숙제다. 공연을 보는 관객 입장에서도, 무대에 서는 연주자 입장에서도 상대적으로 시설이 더 좋은 공연장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부산콘서트홀이 클래식 전용 홀의 특성을 가진 만큼, 부산문화회관과 시민회관은 다양한 장르의 공연으로 시민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차별화 전략을 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향후 시설 투자가 병행되지 않으면, 관객의 발길이 끊길 것이란 위기감마저 감돈다. 장기적으로는 부산콘서트홀과 부산오페라하우스, 부산문화회관과 시민회관을 통합 운영할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발전적 경쟁도 필요하지만, 효율적인 시설 운영을 위해선 좋은 프로그램을 선별해 각 공연장에 배정하는 방식의 통합 운영이 장기적으로 상승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란 목소리다.
부산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가 지역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공연장들도 제 역할을 다해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예술이 숨쉬는 도시 부산이 되길 바란다. 이 같은 문화예술 자산은 국내외 관광객을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산의 새로운 먹거리, 성장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부산시의 치열한 고민과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자영 문화부장 2young@busan.com
2025-06-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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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람이 추해지는 순간
교수 출신 한 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알만한 공기업 이사장으로 낙점을 받아 업무 보고를 받다 적잖게 놀랐단다. 급여나 복지에서 큰 메리트가 없다고 여겼는데 인사 파일을 열어보니 서울대 출신이 수두룩했다고. 공단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서울을 떠나서는 수행할 수 없는 업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지방 이전은 안 하는 공기업’이라고 입소문이 나면서 오버스펙의 사원이 줄줄이 입사를 했다는 것이다.
균형발전은 지극히 양가적인 화두다. 수도권 일극주의를 치료할 해법은 균형발전이라고 떠들면서도, 속으로 나와 내 가족만큼은 열외라고 다들 생각한다. 같은 직장인으로서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젊은 시절 원치 않던 인사로 겪었던 서울 타향살이는 부산이 고향인 나 역시도 편치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개인사는 개인사일 뿐이라는 점이다. 개인의 욕심이 그럴싸한 대의명분으로 둔갑할 때 조직은 몸살을 앓게 된다. 조직은 고달픈 개인사를 보듬어 줘야 하지만, 개인이 그걸 명분 삼아 대자보 붙이고 동네방네 떠들게 방치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그랬듯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게 원칙인 까닭이다.
경남 사천시를 우주항공복합도시로 육성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의지는 첫걸음을 뗐다. ‘우주항공의 날을 기념은 해야겠는데 우주항공청은 멀리 있으니 가까운 경기도에서 기념식을 하자’던 과기부의 희한한 발상이 지난달 경남과 사천의 비난 여론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대전의 항공우주연구원 노조가 나서서 우주항공청을 세종시로 돌려보내란다. 사천시 국회의원이 산하 연구기관도 본청이 위치한 사천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개정안을 발의한 바로 다음 날에 벌어진 일이다.
법안 개정이라는 게 이득을 보는 쪽과 손해를 보는 쪽의 입장이 갈리기 마련이다. 본회의를 통과하던, 폐기되던 법안이 꾸준히 발의되는 과정 자체는 건강한 입법 행위라고 봐야 한다. 한데 개정안이 나오자마자 산하 기관 노조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지역 이기주의란다. 산하 기관이 본청을 우리 동네로 다시 옮기라는 선 넘는 발언까지 내지른다. 지난해에 우주항공청이 이전을 해도 연구개발은 여기서 계속할 테니 연구개발본부를 분리신설하자는 법안까지 발의했었다. 이쯤 되면 과연 지역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건 어느 쪽일까.
개인사를 대의명분으로 둔갑시키는 몰염치가 전국적인 유행이다. 수도 이전에 반대하며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관습헌법에 해당한다’라던 2004년 헌법재판소의 어이없는 판단이 빌미를 제공했다. 몰염치는 산업은행 부산 이전에서도 볼 수 있듯 현재진행형이다. 우린 못 간다고 버티는 여의도 금융노조를 앞세워 서울과 부산을 싸움을 붙이던 이가 협치를 진두지휘할 국무총리가 되겠다고 나선 상황이니 말이다.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는 이재명 대통령과 여당의 신임을 묻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미 내년 부산 선거에 대한 큰 기대를 내비쳤단다. 여야 간 승부는 여당이 공언한 해양수산부와 HMM의 이전 성공 여부에 갈릴 터다.
그러나 해수부와 HMM 이전이라고 무탈하게 진행될까. 달랑 연구기관 두 곳을 이전하자는 법안이 발의만 되어도 난리가 나는 세상이 됐다. 공공기관 이전에서 원칙이 깨지면서 그 후유증이 부산과 사천에 이어 전국을 돌며 환부를 들쑤신다.
조직 개편으로 한순간에 사라졌던 해수부를 다시 부활시킨 일등 공신은 부산 시민이다. 그런 해수부 내부에서도 부산 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HMM에서도 내부적으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혼재한단다.
1차 이전 당시 부산으로 터를 옮긴 한국거래소의 올해 정기인사에서는 순환근무 지원자가 몰렸다. 내규까지 동원해 근무자를 선발했다니 고무적인 현상이다. 다른 공기업에서도 가족 이주를 거부하는 직원이 줄고 정주 만족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그 사이 부산 대학가의 금융 관련 학과 입결은 꾸준히 향상되고 있다. 원칙을 지킨 공공기관 이전이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무원칙에 부화뇌동했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사람이 추해지는 건 내 욕심과 대의명분을 착각하는 순간부터다. 언제부터 녹을 먹고 사는 공직 사회에서까지 ‘악쓰고 뭉개면 우린 열외다’라는 식의 몰염치가 만연하게 됐을까. 순환근무 확대나 분소 설치 등으로 원칙에 상응하는 해법을 찾더라도 더는 소수의 악다구니에 휘둘려 지역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공공기관 이전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권상국 지역사회부장 ksk@busan.com
2025-06-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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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장기 표류 북항, 다시 쏠린 시선
약속 없는 점심때나 주말에 북항친수공원으로 향하곤 한다. 흥과 여유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마음에 쏙 드는 산책 코스다. 오가는 길에 캐리어를 끄는 관광객과 나란히 걸을라치면 짐짓 여행자 기분이 난다. 크루즈선이나 여객선이 시선에 들어오면 자연스레 휴가 계획이 떠오른다. 날씨가 궂다면 국제여객터미털 커피숍에 앉아 배며, 갈매기를 보며 잠시 여유를 갖는다.
개인적으로 무목적성의 일상 공간이지만 북항은 수시로 축제 공간이 된다. 지난달 18회째 행사를 마친 대표 항만축제 부산항축제는 매년 북항에 무대를 마련하고 손님을 맞는다. 지난 4~8일 맛집 등 로컬브랜드 110팀이 1부두 폐창고에 모여 연 축제 ‘포트빌리지 부산’엔 10만 명이 다녀갔다. 웬만한 백화점 매장을 뛰어넘는 집객 효과다. 2022년 2030엑스포 유치 때 BTS 단독 콘서트가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렸을 때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팬들이 북항을 메운 장면은 부산 시민에게 남겨진 좋은 기억이다.
무엇보다 북항은 정치의 공간이다. 북항은 이재명 대통령 취임과 함께 부산에서 가장 ‘핫’한 곳이 됐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해수부와 HMM 이전, 해사법원 본원 설립을 앞세워 부산을 해양수도로, 북극항로 거점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며 시민 지지를 이끌어냈다. 대선 마지막 유세 장소도 북항이었다.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는 해수부 이전 신속 추진을 지시하며, 다시 한 번 의지를 내비쳤다.
지역에서는 해수부와 HMM 이전 최적지로 북항을 꼽는다. 엑스포 유치 좌절 이후 시들하던 북항에 다시 한 번 관심이 모아지는 분위기다. 벌써 북항 주변 부동산에는 매물 문의가 쏟아진다고 한다.
민주당 집권 때마다 북항 소환이 반복되는 일은 우연만은 아니다. 1997년 부산항 신항 건설 계획과 함께 시작된 북항 재개발 논의를 구체화한 정치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4년 9월 노 전 대통령이 ‘지역 발전 토론회’에 참석해 북항 재개발을 언급한 이후 개발이 본격화됐고, 2007년 기본계획이 고시됐다. 그즈음 북항을 직접 찾은 그가 ‘슬리퍼를 신고 아무때나 즐길 수 있는 북항을 만들겠다’고 한 ‘선언’은 아직 북항이 나아갈 방향으로 받아들여진다.
북항 재개발 밑그림은 문재인 정부 때 구체화됐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출범과 함께 ‘북항 재개발 사업’을 국정과제로 삼았다. 현재의 북항 재개발도 2020년 공개된 북항 통합개발 마스터플랜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국가 첫 대규모 항만 재개발 사례라는 시대적 과제와 정치인들의 선언, 시민 기대까지 더해졌지만 북항은 미래 공간으로 머물러 있다.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의미다. 단적인 사례가 북항 재개발 1단계 중 면적이 가장 큰 랜드마크 부지를 둘러싼 끝 모를 표류 사태다. 그동안 복합리조트, 돔야구장, 오픈카지노 등 수차례 유치 노력이 펼쳐졌지만 번번이 투자 유치 실패, 내국인 카지노 논란 등을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랜드마크 부지를 둘러싼 동상이몽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부산시는 외자 4조 5000억 원을 확보해 최대 88층짜리 ‘부산 랜드마크타워’를 지어 공연장, 미디어 파사드, 호텔, 헬스케어센터, 쇼핑몰, 스카이파크 등을 담은 영상문화 콤플렉스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반면 사업 시행자인 부산항만공사(BPA)는 별도 활용 방안을 찾겠다며 독자 행보에 나서는 등 답답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민간에서도 최근 랜드마크 부지에 바다 야구장을 건립하자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시민과 정치인 개인 차원에서 이어지던 바다 야구장 건립 요구가 지난 4월 부산의 한 기업인이 “북항에 야구장을 건립한다면 2000억 원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다시 불붙는 분위기다. 공공 영역에서 장기간 활로를 찾지 못한 탓인지 아직 제안 수준인데도 시민 호응이 뜨겁다. 부산상공회의소도 지난해 앵커형 랜드마크인 복합리조트 유치를 공식 제안한 바 있다.
사실 북항의 변화는 이제 시작 단계라 볼 수 있다. 부산 원도심과 남구, 영도구까지 아우르는 1~3단계 전체 개발면적 900만㎡ 가운데 1단계(155만㎡) 기반시설 조성을 이제 마쳤을 뿐이다. 처음 북항 재개발 닻을 올릴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뜻에 맞게 부산의 얼굴이 바뀔지, 숱한 난개발의 역사를 답습할지, 변곡점에 섰다.
이런 가운데 새 정부가 집권 초반부터 북극항로, 해양수도 등 연이어 부산을 ‘호명’하고 해수부와 HMM 이전 같은 구체적인 사업 추진 의지까지 밝히고 나선 것은 기회임에 틀림없다. 장기간 갈피를 잡지 못한 정부와 부산시, BPA에 가장 큰 책임과 권한이 있다. 한시바삐 머리를 맞대고 기회를 살릴 논의에 나서길 주문한다.
김영한 경제부장 kim01@busan.com
2025-06-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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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부산시, 의지보다 전략이 필요하다
대선은 끝났지만 부산시는 여전히 분주하다. 제21대 대통령의 국정과제 선정을 앞두고 지역 현안을 반영하려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지난 5일 열린 ‘대통령 부산 공약 국정과제화 보고회’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보고회는 부산시의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의지만을 확인한 자리였다. 시는 전략보단 의지를 앞세우고, 현실보다 명분을 강조하는, 이른바 ‘고집 행정’의 모습을 반복했다.
한국산업은행 본사 이전과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부산시의 입장은 시의 전략 부재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두 과제는 대선 과정에서 대통령 공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산은 이전은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후보 당시 강한 어조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의 경우에도 특정 지역에만 ‘특구’ 형태의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식에 반대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부산시는 이 두 과제를 여전히 핵심 과제로 고수했다. 박 시장은 보고회에서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은 차질 없이 진행돼야 될 것이고, 산업은행 본사 이전도 지금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부산시로서는 놓칠 수 없는 과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박 시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비장한 각오마저 느껴진다. 산은 이전 등의 필요성에도 물론 공감하는 바다. 그러나 정책은 이상과 의지만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바뀌고 상대가 달라졌다면 그에 따라 협상의 접근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타협의 여지도 살펴야 한다. 국정과제 선정은 결국 중앙정부와의 협력 게임이며, 일방적 요구가 아닌 상호 조율의 산물이다. 국정 운영의 실질적 동력과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같은 밀어붙이기식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만 부를 뿐이다.
그럼에도 부산시는 기존 입장만을 반복하고 있다. ‘왜 필요한가’에 대한 주장은 넘치지만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에 대한 전략은 결여돼 있다. 부산이 요구하는 과제 하나를 밀어붙이는 동안, 다른 현실 가능한 기회들이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기회비용’이다. 고집의 대가로 무엇을 잃는지도 냉정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부산시의 이러한 ‘고집 행정’은 처음이 아니다. 수 년 전 부산시는 대체거래소 출범을 강하게 반대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증시의 규모를 고려한 ‘시기상조론’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부산에 본사를 둔 한국거래소의 위상 약화와 세수 감소, 나아가 부산 금융중심지의 위상 약화을 우려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거래소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변했다. 2021년 1월 한국거래소 손병두 당시 이사장은 “금융환경의 변화로 대체거래소를 거부할 명분이 약해진 만큼 대체거래소와의 건전한 경쟁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겠다”며 사실상 입장을 선회했다. 부산 금융계 일각에서도 대체거래소 출범을 막을 수 없다면 오히려 부산에 유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당시 대체거래소 추진 주체의 가장 큰 걸림돌이 부산시의 반대였던 점을 고려할 때, 양측의 획기적 ‘딜’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부산시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2022년 11월 금융위원회는 대체거래소 사업 허가 신청 요건과 일정을 발표했다. 사실상 대체거래소 출범이 확정된 셈이다. 이후 부산시는 뒤늦게 유치 노력에 나섰지만, 허가 요건이 명확해진 이상 (그 조건만 충족하면 되기 때문에) 부산시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는 남아있지 않았다.
더이상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실수가 되풀이될까 우려스럽다. 우려는 최근의 정치적 상황과 맞닿아 더욱 커진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된 부산시 정부가 여당인 중앙정부와 ‘협력’이 아닌 ‘경쟁’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지역 발전이라는 본질적 목적보다, 그 정책과 성과가 어느 정당의 것인가에 집착하는 모양새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 단지 상대 당의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반대한 지역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냥 과한 상상력으로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원칙’을 고수할 것이냐, ‘유연성’을 발휘할 것이냐, 선택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 부산시에 필요한 것은 조금 더 유연한 사고일 테다. 새 정부의 정책 기조를 고려해 협상 가능한 지점에서 실리를 챙기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에 앞서 무엇보다, 당리(黨利)적 판단을 배제해야 한다. 가덕신공항 적시 개항 등 부산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야가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이다. 정책 판단에 있어 어느 정당의 공인지 혹은 과인지를 따질 여유 따위는, 지금 부산에 없다.
2025-06-0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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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통령과 바다
부산 사람들에게 바다는 자연 그 이상이다. 무심코 우리 곁에 있는 듯 보여도, 바다는 부산 역사의 무대이자 희망을 품게 하는 삶의 터전이다. 어떤 미사여구를 보태도 충분하지 않은 소중한 삶의 원천이다. 그런 의미를 간파한 역대 대통령 후보들은 선거 때마다 부산 바다를 주목했다. 유권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대통령 후보들의 구애는 언제나 거대하고 화려했다. 어린 시절부터 듣던 그들의 모토가 ‘해양수도 부산’이었다. 거창한 이름 아래 그럴듯한 청사진을 그려내며 수많은 약속을 남겼다. 세계적인 항만 도시로 도약시키겠다거나, 동북아 물류 허브이자 해양 관광 중심지로, 첨단 해양 산업의 메카로, 글로벌 해양수산 중추 국가로 발전시키겠다는 그들의 말과 글은 매번 부산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바다를 내세운 대선 공약을 들고 “이번에는 믿어달라”며 팔을 힘차게 내젓고 소리치며 유세할 때마다, 시민들은 의구심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씨앗을 키웠다.
그렇게 화려했던 약속들과 함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부산은 어떤 모습인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로 시작된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만 봐도 20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미완성이다. 2020년까지 완공하려던 목표는 2027년까지로 연장됐다. 수많은 난관 속에서 더딜 수밖에 없었을 거라 이해한다 해도 시민들은 이미 기다림에 지쳤다. 피로감과 실망감만 가득하다.
시민들이 바라는 건 거창한 구호나 단발성 지원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다.
작은 실천이 부산 바다를 바꾼 사례가 있다. 2009년 부산 용호만 바닷가. 공유수면 매립 개발이 마무리되던 이곳에는 바다를 따라 높은 철조망이 둘러쳐질 예정이었다. 바다가 시민들과 철저히 단절될 위기였다. 당시 〈부산일보〉 보도를 통해 ‘시민에게 워터프런트를 돌려달라’는 여론이 일었다. 결국 용호만 일대는 산책로와 쉼터가 있는 공원 같은 수변 공간으로 탄생해 지금껏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부산시민들은 바다에서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소박한 바람을 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다 야구장’에 대한 염원이다. 1985년 준공돼 40년이 된 사직야구장은 대규모 리모델링이나 신축을 하지 않은 유일한 야구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부산시의 재건축 계획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제 부산시민들은 탁 트인 바다를 품은 야구장에서 경기를 즐기는 모습을 꿈꾼다. 2000억 원에 달하는 기업가의 기부 소식도 전해졌다. 전문가들 역시 바다 야구장이 부울경은 물론 전국에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부산의 새로운 랜드마크이자 원도심 부활의 상징이 될 것이라 입을 모은다.
유력 대선 후보들도 바다 야구장 건설 사업을 부산의 주요 공약에 포함할 것처럼 움직이다가 복잡한 이해타산을 핑계로 슬쩍 발을 빼면서 크고 작은 논란이 인다.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전문가 의견에도 정치적 논리에 밀려 발을 떼지 못한다.
북항 바닷가에 들어설 오페라하우스가 있다지만 시민의 기대를 품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어떤 의사소통 과정을 거쳐 오페라하우스를 짓게 되었나를 돌이켜 보면, 그 누구도 시민 대다수의 열망이 오롯이 반영된 것이라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6·3 대선에도 어김없이 많은 ‘바다 공약’이 등장했다. 북극항로 시대 해양 중심 도시 부산이라는 기치 아래 해양수산부와 HMM(옛 현대상선) 부산 이전, 해사법원 유치 등이 오르내린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선거용 공약 남발로 부산시민들이 헛된 기대만 가지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약속보다 더 중요한 건 실제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지 실천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이를 실현하는 일이다.
내일이면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예정에 없던 6월의 대통령 선거가 막을 내린다. 신임 대통령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에 빠진 우리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곧장 여러 국정과제 추진에 속도를 낼 것이다. 그 속에 부산 바다를 향한 공약을 반드시 포함해 실현할 책임이 그에게 있다.
부산 유권자들이 이번 대선에 던진 한 표, 한 표에는 청년 유출과 저출생, 수도권 과밀화로 소멸하는 지역에서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과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런 시민들은 새로운 대한민국 리더가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바다에 새겨진 약속, 시민들은 모두 기억하고 행동에 나설 것이다.
박세익 디지털영상센터장 run@busan.com
2025-06-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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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장미 대선, 아들의 선택은?
지난 주말 대학생 아들과 식사 자리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뽑을지 슬쩍 물어봤다. 지난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했는지 알고 있기에 이번에는 지지하는 당이 변했는지 궁금해서였다. 아들의 대답은 나중에 TV 토론을 몰아서 본 뒤 결정하겠다는 거였다.
정치 저관여자인 아들의 입장에서는 최소의 시간적 비용을 들여 검증하겠다는 의도였다. 그 또한 한 유권자의 선택이기에, 현재 TV 토론은 너무 이미지화됐다, 자극적이고 네거티브한 질문과 답변만이 난무한다, 품격 있는 태도보다는 공격적인 모습이 부각된다, 후보들의 공약을 심층적으로 검증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TV 토론 방식은 개선이 절실하다 등의 말을 미처 꺼낼 수가 없었다.
부모의 잔소리가 싫을 유권자를 위해 조용히 “그래도 공약 정도는 한번 보렴”이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나중에 〈부산일보〉에 게재된 대선 후보들의 공약 기사를 링크해서 보내 줄 생각이다.
최근 언론의 선거 보도를 보면 예전과 달리 대선 후보들의 공약을 검증하는 기사들이 눈에 많이 띈다. 바람직하다. 어쩌면 후보 간 지지율 격차가 많이 나서 기존의 경마식 보도가 재미없고 3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탄핵당한 전 대통령에 대한 견제 심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국민의 눈높이에 많이 근접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한 마디 더 얹자면, 자화자찬일지 모르나 지금까지의 〈부산일보〉의 대선 보도는 소위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미디어’들을 압도한다. 어느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철저하게 공약을 검증해 오고 있다. 특히 지방지 답게 부산·울산·경남의 지역 공약에 대해서는 지역민의 입장에서 낱낱이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언론의 돋보기 검증에 비해 이번 대선 후보들의 공약은 설익은 부분들이 많다. 탄핵에 따른 조기 대선으로 미처 준비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면죄부를 주기에도 성의가 많이 부족하다. 주로 예전 공약의 ‘판박이, 재탕’에 불과한 것들이 다수여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경기 침체와 ‘잃어버린 3년’으로 국민들이 이번 조기 대선에 거는 기대감과 열망이 높음에도 대선 후보들은 준비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우선,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제정,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 등 기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정책들을 다시 내놨다. 전혀 새롭지도 않다. 지역 특화 전략도 부족하다.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나 산은의 부산 이전은 번번이 국회에서 막혀왔지만, 이에 대한 해법은 없다. 특히 산은 이전의 경우 인력이나 시스템 이전에 대한 로드맵조차 없다.
또 GTX(광역급행철도) 전국 확대 공약은 부산만의 공약도 아닐뿐더러 이미 부산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부산형 광역급행철도(BuTX)와 겹친다. 기존 정권의 정책을 다듬은 수준에 불과하다. 막대한 재정과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실현 가능성마저 의문이 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HMM 본사의 부산 이전, 해사전문법원 신설 등 ‘해양수도 부산’ 비전을 중심으로 한 공약을 내놨다. 해수부와 HMM의 부산 이전은 그동안 지역 해양수산계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던 현안이었다. 민주당에서 지역의 요구사항을 대폭 수용한 파격적인 공약이다. 덕분에 지역 공약의 주도권을 이 후보가 선점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후보 측의 ‘해양수도 부산’ 공약으로 그동안 지역에서 최대 현안이었던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과 산은 이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또한 제기되고 있다. 또 해사법원의 경우 인천의 반발로 부산과 인천에 두 곳의 본원을 둔다는 것 또한 선심성 공약을 남발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금융중심지 부산’에 방점을 찍었다. 부산에 본점을 둔 금융기관에 증권거래세 인하 등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부여해 실질적인 금융중심지로 도약시키겠다는 것과 더불어 데이터 허브 도시 조성, 북항 바다 야구장 건립 등 신선한 공약을 제시했다. 어느 정도 고민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다만 해수부, HMM, 산은 등의 이전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어서 지역 현안과는 동떨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후보들의 공약이 아쉽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약을 ‘성의 있게’ 제시한 후보가 낫다. 대통령을 공약만 보고 뽑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공약도 보지 않고 뽑아서는 안 된다. 부산의 유권자라면 조금의 손품을 팔아서라도 후보들의 지역 공약을 살펴보길 권한다. 잔소리가 싫을 유권자 아들에게도 다시 한번 그렇게 권하겠다.
2025-05-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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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북항 바다 야구장에서 꿈꾸는 부산 프로 스포츠
지난 주말 부산 사직야구장과 구덕운동장은 부산 시민들의 함성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산 연고 프로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가 나란히 삼성 라이온즈, 수원 삼성블루윙즈와 홈 경기를 치렀다. 사직야구장에는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17일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도 올 시즌 홈 경기 중 가장 많은 8529명의 팬이 모여 열띤 응원을 펼쳤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는 올 시즌 초반 좋은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두 구단은 각각 올 시즌 ‘가을야구 진출’과 ‘K리그 1 승격’이라는 오랜 꿈을 이룰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
부산 프로 스포츠는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다른 지역 연고 구단들이 잇따라 좋은 성적을 내면서 프로 스포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민들의 높은 관심은 여러 지자체들이 프로 스포츠 인프라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팬들은 좀 더 쾌적하고 좋은 경기장과 인프라 속에서 프로 스포츠를 즐기고, 팬들의 더욱 뜨거워진 응원 속에 각 프로 구단은 더욱 좋은 성적을 냈다. 프로 스포츠 속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반면 부산 프로구단과 부산시는 그동안 선순환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팀 성적은 하위권을 밑돌았고, 구장 신축에 대한 논의는 불붙지 못했다. 그동안 사직야구장과 구덕운동장은 낡아갔고, 엄청난 유지보수 비용은 늘어갔다. 그 사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서울·인천·경기를 제외한 비수도권 5개 구단 중 신축 구장이 없는 구단은 이제 롯데 자이언츠뿐이다. ‘조류 동맹’으로 일컬어지는 한화 이글스는 올 시즌부터 신축 구장을 이용하고 있다. 부산 아이파크와 K리그 3(3부 리그) 부산교통공사 홈구장인 구덕운동장 역시 1928년 준공부터 지금까지 보수공사를 거듭하며 명맥을 잇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가 시즌 중반으로 향하는 5월 중순까지 좋은 성적을 내면서 부산 시민들 사이에서는 올해는 ‘함 해보입시더!’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는 경기장 밖 힘든 정치·경제 상황 속에서 시민들의 깊은 시름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비타민’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북항 바다 야구장 추진 소식은 ‘구도’ 부산 시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부산 원도심 상권 부활의 심장이라고 할 북항 지역에 야구장을 짓자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10년 전인 2015년 2월 당시 서병수 부산시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겸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는 함께 북항 부지를 바라보며 바다 야구장을 짓기로 의기투합(부산일보 2015년 2월 12일 자 1면 보도) 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 속에 양측 실무진들은 야구장 예정부지와 면적 등 세부적인 문제까지 검토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북항 야구장 건설은 손에 잡힐 것 같았지만, 부산시와 롯데의 대내외 여건 변화 속에 이뤄지지 못했다.
꺼진 줄 알았던 북항 바다 야구장 논의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가 탄탄한 전력을 바탕으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점차 부산 시민들과 롯데 팬들의 가을야구 진출 기대감이 커지면서 북항 바다 야구장 건설에 대한 열망도 높아지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선수와 팬들이 더 멋지고 나은 환경에서 모두 ‘행복 야구’를 즐기자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정치권도, 지역 언론도 북항 바다 야구장 건설에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여기에다 정철원 협성종합건업 회장이 북항 바다 야구장 건립을 위해 2000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야구장 신축 논의가 늘 예산 확보에 발목이 잡혔던 상황을 떠올리면 정 회장의 기부 약속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북항 바다 야구장은 단순히 야구를 즐기는 공간이 아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야구, 쇼핑, 문화, 컨벤션 기능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 조성돼야 한다. 북항 바다 야구장은 부산 원도심을 되살리고 북항 재개발 사업을 이끌 핵심 사업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북항 바다 야구장은 ‘구도 부산’을 지켜온 부산시민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설이 될 수 있다. 부산의 도시 브랜드에 활기와 열정을 더할 기회이기도 하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의 올 시즌 활약은 북항 바다 야구장 신설 논의 시작의 중요한 씨앗이다. 이제 롯데 자이언츠의 가을야구 진출·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떡잎을 틔우고, 부산시는 적극적인 행정 지원과 검토로 튼튼한 줄기를 뻗게 해야 한다. 든든한 밑거름이 될 부산 시민들의 열정 넘치는 응원은 이미 준비돼 있다. 북항 바다 야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의 9회 초 마지막 아웃 카운트, 9회 말 끝내기 홈런을 보며 환호할 수 있는 순간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김한수 편집부장 hangang@busan.com
2025-05-1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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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희망 고문 대선 공약
또다시 대선이다. 12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대선은 지역이 중앙에 존재감을 보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각 지자체는 물론 시민사회단체 등도 대선 때마다 지역 현안들의 대선 공약 반영을 위해 분주하다. 이번에도 부산에선 시와 부산상의, 시민단체 등이 최근 대선 공약에 포함되어야 할 과제들을 선정했다.
그러나 대선이 갈수록 보수 진보 양 진영의 정략적 대결로 치닫고 있는 데다, 지난 대선 때 부산 공약의 진척 상황을 보면 대선 공약이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직전 대선 주요 공약들이 결국 공수표가 돼 그간 지역에서 기울여온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현실을 보면서 허탈하기만 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공약한 2030 월드엑스포 부산 유치전은 결과를 다시 떠올리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완패했다. 당초 리야드와의 승부에서 대등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정부와 부산시의 준비 부족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에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북항 재개발 사업도 여전히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남권의 염원인 가덕신공항 건설 사업도 우여곡절을 거치며 드디어 첫삽을 뜨는가 했지만 다시 차질을 빚고 있다. 시공사인 현대건설 측이 공사 기간을 입찰 공고에서 제시한 84개월(7년)이 아니라 108개월(9년)로 고집하면서 국토부가 수의 계약 절차를 중단했다. 다시 입찰을 하든, 어떤 방식이든 당초 정부가 약속했던 2029년 개항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사이 중·장거리 해외 노선을 이용하기 위해 인천공항을 오가는 동남권 주민들의 불편과 손해는 계속되고, 트라이포트 운영을 통한 동남권 발전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윤 전 대통령의 부산 핵심 공약이던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도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산업은행 이전이 부산을 실질적인 금융중심지로 성장시키고 동남권 산업 생태계를 업그레이드시킬 촉매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민의힘 주도의 공약에 의회를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이 철저히 반대했다. 월드엑스포 유치 실패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부산시와 정부가 추진한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역시 민주당이 외면했다.
결국 지난 대선에서 제시된 주요 대선 공약 중 실제로 이행된 것은 없다. 각 당 모두 서로 비난하기 바쁘지만, 쇠락하는 부산을 되살리기 위한 진심어린 노력은 양측 어디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의힘은 야당 설득에 소극적이었고, 민주당은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모든 일에 반대만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 전 대통령의 뜬금없는 계엄령 선포와 그에 따른 탄핵으로 인해 대선은 예정보다 2년 일찍 찾아왔다.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 없이 완전히 새롭게 판을 짜야 할 가능성도 있다. 탄핵 이후에도 자중지란인 국민의힘은 이제야 후보를 정해 아직 발표된 지역 공약이 없다. 반면 이재명 후보를 내세운 민주당은 일찌감치 공약을 발표했다. 3년 전 공약이었던 부울경 메가시티 구축과 해운·물류 클러스터 조성 외에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과 해사전문법원 설치라는 깜짝 공약을 내놨다. 해양산업의 기반을 강화하면서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강국의 중심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여기에 북극항로를 개척해 대륙철도와의 연결을 통해 부산을 동북아 물류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도 더했다.
부산의 십수년 된 과제였던 해사법원 설립과 함께 해양수산부 이전까지 발표한 이 후보의 공약에 설렌 것도 잠시, 그는 수도권 공약을 발표하면서 인천에도 해사법원을 설립하겠다고 했다. 인천에 들어설 법원은 국제 해사사건 전문으로 특화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의 구상대로면 향후 해사사건은 ‘국내 부산, 국제 인천’으로 이분화한다. 해사사건 대부분이 국제계약과 관련한 분쟁을 다루는 해외 소송이다. 부산과 인천의 표를 의식해 해사법원 공약을 이용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여기에 부산이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공약도 단순히 선거용이란 의문을 낳는다.
지난 3년을 또 허송세월하면서 부산은 더 힘들어졌다. 올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8~39세 청년 인구를 추월할 정도로, 부산은 더 노쇠해졌고 경기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소멸하는 지방을 살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선 지금 당장 뭐라도 해야 할 때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산업은행 이전과 해양수산부 이전 등 각 당 공약 가리지 말고, 바로 행동에 옮기길 바라본다.
2025-05-1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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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연휴를 잘 보내는 법
이번 주말부터 4일간의 연휴가 시작된다. 근로자의 날과 하루를 더 쉰다면 최장 6일간의 휴일을 보낼 수 있다.
연휴를 잘 보내는 법은 제각각일 것이다. 그럼 연휴를 최악으로 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꼽는 휴가를 망치는 법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스마트폰 사용이나 텔레비전 시청 같은 수동적 활동으로 휴일을 다 보내고 나면 쉬었다기보다는 허무함과 시간을 낭비했다는 후회가 든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4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은 하루 평균 3.7~5.7시간의 여가 시간을 갖는데, 여가 시간에는 텔레비전이나 동영상 시청, 인터넷 등 수동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가장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가 활동에 참여한 종류가 많을수록 여가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연간 5개 이상의 여가 활동에 참여한 이들은 여가생활 만족도(7점 척도 기준) 평균이 5.4점에 달했다. 반면, 1~2개 활동에 그친 이들의 만족도는 평균 4.8점에 머물렀다.
휴식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을 넘어, 자신의 만족감을 높이는 의도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결국 잘 쉬려면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할 때 즐거운지 자기 이해가 먼저이다.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자신의 즐거움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짖궃게 한 번씩 들려주는 섬뜩한 비유가 있다. ‘결혼은 연필깎기’라는 말이다. 연필깎기는 연필을 연필답게 만들지만, 깎이다 보면 연필은 몽당연필이 되었다가 결국 사라진다(!). 결혼뿐일까? 사회생활도 비슷할 것이다.
부모, 직장인 등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책임에만 익숙해져, 자신을 제대로 돌보기 어렵다. 역할만 있고,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직장 맞춤형 인간으로 수십 년을 살아오다 퇴직 후 무한정 주어진 시간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필이 아닌 만년필이 되려면 자기를 잘 돌보고, 필요할 때 잘 쉬어야 한다. 자신이 어떤 쉼을 추구하는지 아는 것은 자신을 잘 돌본다는 것이고, 그만큼 건강하다는 뜻이다. WHO는 자기 돌봄을 ‘개인이 자신의 건강을 증진하고, 질병을 예방하며, 질병에 대처하고, 장애를 관리하기 위해 취하는 능동적인 행동’으로 정의한다.
충분한 수면,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운동과 같은 신체적 돌봄부터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정신적 자극과 휴식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도 자기 돌봄의 영역에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식사만 하더라도 건강한 식사를 하려면 자신의 몸 상태에 따라 식사량이나 식사의 종류가 달라진다. 평균은 참고 사항이지 모범 답안이 아니기에 자신의 몸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내 몸이나 정서 상태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소통하려면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호흡에 집중하는 호흡 명상을 한 번이라도 해보면, 단 몇 초만이라도 잡생각 없이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조용히 관찰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맛을 음미하는 것, 몸을 움직일 때 근육의 긴장도를 느끼는 것 등도 말처럼 쉽지 않다.
회사와 가정에서 맡은 역할에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집중해 자신을 돌보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초고령사회에서는 각 개인이 자신에게 집중해 스스로를 돌보는 인프라가 더욱 필요하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2022년 기준 82.7세인데 건강수명은 65.8세에 불과하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는 약 17년. 수많은 이들이 삶의 후반부를 질병이나 불편과 싸우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불행한 일이다. 의사 등 전문가들을 이 간극을 줄이는 방법으로 자기 돌봄을 꼽는다.
이 때문에 최근 유튜브 등 자기 돌봄에 관한 콘텐츠가 크게 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기 돌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부산일보도 여행과 음식, 건강, 문화생활 등의 콘텐츠를 더 강화할 예정이다. 지역을 기반으로 여가를 즐기고,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담는다. 헬스장 운동 영상을 누워서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을 돌보는 행위를 직접하는 이들이 늘었으면 한다.
이번 연휴,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자기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내 몸과 마음은 어떤지, 그리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탐색하는 여행 말이다.
2025-04-27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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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기로에 선 한국 영화 그리고 부산
다음 달 개막하는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한국 영화는 20일 현재까지 단 한 편. 부산에서 활동하는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Glasses)이 유일하다. 장편영화의 경우 칸영화제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경쟁, 비경쟁, 주목할 만한 시선 등 모든 부문의 초청 리스트에 한 편도 이름을 올리지 못해 충격을 줬다. 우리 장편영화가 칸영화제에서 한 편도 초청받지 못한 건 2013년 이후 12년 만이라고 한다. K팝과 함께 K컬처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며, 잘나가던 영화산업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물론, 칸영화제 초청 여부가 한 나라의 영화 수준을 결정짓는 척도라고 볼 수는 없다. 간혹 영화제 개막 전에 추가 초청작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어 정 감독의 ‘안경’을 이을 낭보가 들려올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우리 영화계에서는 이번 성적표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미 우리 영화산업은 곳곳에서 위기 신호를 보내고 있다. 올 3월 극장 관객 수는 지난해 대비 4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액 역시 47% 줄어들었다. 관련 통계를 집계하는 영화진흥위원회 측은 장재현 감독의 ‘파묘’가 1000만 영화 반열에 오른 지난해 3월과 달리, 올해는 그만한 히트작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극장가의 실적 부진도 심각하다.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 운영사인 CJ CGV가 희망퇴직과 영화관 폐쇄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던 영화관 산업은 팬데믹 이후 잠시 회복세를 보이는 듯했지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급성장 속에 콘텐츠 소비 패턴이 다변화하면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 시기 제작됐다 미처 개봉하지 못한 이른바 ‘창고 영화’조차도 이제는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도시’를 표방하는 부산 역시 관련 산업의 부진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해 부산영상위원회의 촬영 지원작은 총 74편으로, 1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역 로케이션 촬영 수요가 줄어든 탓이다. 국내 제작사와 방송사 등이 수도권에 밀집된 탓에 대규모 인원이 이동해야 하는 지역 촬영이 더 큰 타격을 입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산영화촬영스튜디오의 지난해 총 대여 일수도 315일(5개 작품)로, 2023년 694일(6개 작품)과 비교해 절반 이상 줄었다. 코로나19 이전에 스튜디오 대여율이 90%대를 기록하는 등 매년 ‘포화’ 상태였던 것과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부산영상위원회는 해외 작품을 적극 유치하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간다는 입장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아시아 영화 허브’로 자리매김한 부산국제영화제(BIFF)도 갈 길이 멀다. 지난 2년간 공석이었던 집행위원장 자리에 지난달 BIFF 프로그래머 출신 정한석 위원장이 선임되긴 했지만, 조직 재정비 등 쌓인 과제가 적지 않다. 특히 올해 BIFF는 30주년을 맞아 경쟁 부문 신설 등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기에 더욱 더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 이런 가운데 올해 행사는 추석 연휴와 전국체전 일정 등으로 10월이 아닌 9월로 앞당겨져 행사 개최까지 남은 시간도 촉박하다.
기로에 선 한국 영화와 영화도시 부산의 재도약을 위해 영화진흥위원회, 부산시, BIFF, 부산영상위원회, 영화의전당 등 관련 기관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영진위는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등의 뒤를 이을 신진 감독의 발굴과 지원에 힘을 쏟아야 한다. 부산시와 부산영상위, BIFF는 생각의 전환과 새로운 시도에 과감히 나서야 할 때다. 인천이나 대전 등 서울에서 가까운 도시들과의 로케이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전주국제영화제를 비롯한 국내 영화제들이 프로그램 다양화와 영화인 참여 확대 등으로 매해 성장하고 있는 만큼 BIFF도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새 역사를 써 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부산이 BIFF의 명성에만 기댄 채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가는 영화도시라는 타이틀마저 다른 도시에 뺏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젊은 영화인들이 만든 수준 높은 작품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도록 관련 행사나 정책을 확대할 필요도 있다.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된 정유미 감독은 “칸 비평가주간에 초청된 게 영광스럽다”면서 “(이를 계기로)관객을 만날 기회가 늘어나는 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칸 이후 한국에서도 상영을 많이 하고 싶다. 관심을 갖고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동안 우리 영화산업을 키워온 관객들의 애정과 영화도시 부산을 지탱해 온 시민들의 열정도 지속되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는 24일 개막하는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도 뜨거운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해 본다.
이자영 문화부장 2young@busan.com
2025-04-2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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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좋은 청년 일자리라는 허상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쪼그라든 전교생 수에 놀라던 차에 경남에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촬영한 포토뉴스가 한 건 올라왔다. “올해는 신입생 있어요!”라며 한 명뿐인 1학년을 둘러싸고 군 관계자들이 축하 선물을 전하고 있었다. 반나절 사이 접한 소식들에 걱정보단 헛웃음이 나와 스스로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지역 소멸은 경각심이 생기기도 전에 일상에 빠르게 뿌리를 내리는 중이다. 백약이 무효라며 나라 전체가 자포자기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도시 재생이란 단어가 회자되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자체마다 원도심이 깨어나면 주민이 돌아올 거라며 낡은 골목에 페인트칠 하기 바빴다. 보조금에 눈먼 사회적 기업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사회 문제를 호소하던, 돌아보면 실소만 나오는 장면이다.
헛구호가 된 도시 재생 이야기를 꺼내는 건 지역 소멸을 막을 대안으로 자꾸만 그 시절 감성의 정책과 해법이 도드라지는 게 걱정이 되어서다.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좋은 기업과 일자리만 있으면 청년 유출을 막을 수 있다고 부르짖는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진작부터 수도권 팽창을 견제했더라면 지역 소멸의 우려는 사라졌을까. 모르긴 해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수도권 집중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촌향도 역시 수십 년 전부터 국가적 난제였다. 이제 출생율 하락까지 맞물리며 지역 소멸이란 새로운 이슈로 부상하고 있을 뿐이다.
얼마 전 한 경제단체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는 쓴웃음을 짓게 했다. 강서구 산단에서는 그렇게 보기 힘들던 청년 인력이 시내 한복판 신축 워케이션 건물에서 구인 공고를 내자 구름처럼 몰려오더란 이야기다. 대단한 급여나 복지가 보장되는 일자리가 아니어서 더 놀랐단다.
화려한 일자리만 쫓는다고 청년을 비웃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청년은 다들 딴세상 일자리를 꿈꾸는데 지역의 경제 사령탑들은 급여 보조나 기술 교육에만 예산을 쏟아붓는다. 그게 목이 말라 고향을 떠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아이에게 부모가 극복의 대상이듯, 청년에게 고향은 극복의 대상이다. 수도권이란 큰 무대를 동경하는 이들에게 고향의 일자리는 같은 값이라도 큰 매력이나 울림을 주지 못한다. 가뜩이나 양질의 일자리가 없는 판에 이런 심리적 간극까지 메우지 못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좋은 청년 일자리’란 말이 지역에선 얼마나 가성비 떨어지는 구호인가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경마광이던 제나라 장군 전기를 승리로 이끈 손빈의 비책은 ‘삼사법’이다. 손빈은 전기에게 경쟁자인 제나라 공자들이 가진 상등마에 하등마를 붙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공자들의 중등마와 하등마를 전기의 상등마와 중등마로 상대하게 했다. 자존심을 버린 배팅은 승리로 이어졌다.
부산시의회에 따르면 5년간 청년 정책의 카테고리로 투입한 예산만 6000억 원대에 달한다고 한다. 수도권 상등마에 같은 상등마로 승부수를 띄운 부산의 패착이다. 지역이 수도권과 인구 쟁탈전을 벌이며 청년 정책, 일자리 정책으로 맞대결을 벌여봐야 승산은 뻔하다.
미국 마이애미가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 등 자본가들을 끌어들이는 건 파격적인 법인세 제도다. 제주가 공공기관과 공기업 직원들의 전근지로 인기를 누리는 건 국제학교와 빼어난 자연경관이다. 부산이라면 온화한 기후와 저렴한 주택 가격, 그리고 상대적으로 나은 문화 인프라 정도가 ‘전략마’가 되겠다.
기업과 일자리 유치만이 만병통치약이라던 부산이 최근 구역별 국제학교 설립과 서울 빅5 분원 유치, 소득세 감면 등을 새 청사진으로 언급하고 있다. 늦게나마 정주 여건에 대한 공직사회의 인식이 바뀐 점이 반갑다.
국민의 반 이상이 몰려들며 수도권의 정주 여건은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위험한 신호는 앞으로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더 자주, 더 충격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코로나19가 ‘돈 버는 곳=사는 곳’이라는 그간의 직주근접 공식을 깨버렸다. 유목민의 삶을 꿈꾸는 경제 인구가 늘어나면서 정주 여건에 꾸준히 투자해 온 지역에는 반대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꿈이 고파서 고향을 떠나겠다는 청년에게 없는 ‘얄팍한 비스킷’을 주려고 지역의 역량을 소진하진 말자. 잠시 고향을 떠난 그들이 기회비용 없이 돌아와 기댈 수 있는 교육과 주거, 의료와 교통에 역량을 쏟아야 한다. 울며불며 매달리는 연인보다 자신감 넘치게 돌아선 연인 앞에서 이별의 순간 한 번 더 망설이게 마련이다.
물론, 돌아온 이들이 청년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더 성숙해진 중장년이라면 지역 입장에서 이보다 고마울 일은 없을 터다.
권상국 지역사회부장 ksk@busan.com
2025-04-1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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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리더십 부재 속 날아든 관세 청구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탄핵의 강’을 건너야 했던 국민들은 동시에 미국발 무역 질서 재편을 불안한 심경으로 지켜봐야 했다. 리더십 공백이 커진 사이 정부가 어쩔 줄 모른 채 허둥대자, 기업들은 저마다 도생을 꾀해야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생필품과 서비스 가격도 뛰기 시작하면서 서민 지갑도 닫히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걷혔다고는 하나, 한국 경제는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하다. ‘수출’이 ‘국가 생존’과 동의어인 한국에 미국이 던진 관세 폭탄의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거대한 내수 시장을 둔 중국이나 침체 속 30년을 버틴 ‘저력’을 지닌 일본과는 압박의 강도 자체가 다르다.
몇몇 장면만 추려도 정부와 기업 모두에서 대응력 부족이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법이나 자국법 조문 등에 전혀 개의치 않고 속전속결로 관세 부과 조치들을 쏟아내고 있다. 비단 한국만의 위기는 아니지만 협상 상대국에 대응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태세인데도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정부는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도로 경제부처가 머리를 맞댔고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실무진을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물밑 협상을 벌였다고 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2월과 지난달, 두 차례 방미길에 올랐다. 하지만 탄핵 사태로 대통령 직무 정지가 된 탓에 정부는 트럼프와 전화통화 한 통 못한 채 고지서를 받아들었다.
최종적으로 지난 3일(한국 시간) 미국 정부는 한국에 25%라는 높은 수준의 상호관세율을 매겼다. 앞으로 미국과의 개별 협상에 따라 결과는 바뀔 수 있다고 해도 정부의 ‘물밑 노력’은 얻어낸 것이 없다는 평가가 따른다. 정부 인사들은 “계엄으로 인한 리더십 공백” 탓을 했다.
기업들도 허둥대긴 마찬가지였다. 현대자동차는 선제적으로 미국 현지에 31조 원에 달하는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의선 회장을 백악관까지 불러 ‘모범 사례’로 추켜세웠다. 하지만 한동안 한국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가는 현대차 차량들은 25% 관세를 물고 미국차와 경쟁해야 한다. 미국에 모든 협조를 한 현대차가 미국 측으로부터 모종의 ‘감사 표시’를 받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상당한 관세 부과가 확정적인 반도체 부문 대표 기업,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시기 중국과 일본에 다가섰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과 곽노정SK하이닉스 사장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BMW, 메르세데스-벤츠, 퀄컴, 페덱스, 화이자 등 글로벌 CEO들과 함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공상계 대표 회견’ 자리였다. 시 주석이 “중국은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외국 기업인들에게 이상적이고 안전하며 유망한 투자처”라며 러브콜을 보냈지만 두 기업은 미중 양국 눈치를 부지런히 봐야 하는 처지가 됐다.
대기업의 경우 ‘관세 25%를 무느냐’ ‘미국의 높은 생산 비용을 감당하느냐’ 사이에 선택지라도 있다. 대기업에 기대는 하청 중소·중견기업 처지는 더 암울하다. 해외 생산기지를 갖출 여력이 없어 기업 규모를 줄일 수밖에 없는 곳이 대다수다. 낮은 인건비를 찾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등에 진출한 기업들은 한국에 있느니만 못하게 됐다.
가계 부문에는 머지 않아 인플레이션 폭탄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막대한 대출 이자에 허덕이며 소비 여력마저 줄었는데, 물가상승 압박이 더해지는 형국이다.
조기 대선으로 두 달 후 새로운 리더십이 탄생하지만 그동안 한덕수 권한대행이 국정을 책임지는 불완전한 혼란기를 보내야 한다. 준비 안 된 대선이다 보니 새 대통령은 인선, 정부 조직 개편, 국가 전략 수립 등을 마치고 완전한 리더십을 발휘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늦어지면 올해 하반기까지 우리 경제는 외부 위기에 노출된 채로 견디는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관세 전쟁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횡포’만이 아닌, 장기간 세계 무역을 이끌 새로운 질서가 정해지는 주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최강국 미국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으로 첫발을 뗐지만 각국은 앞으로 자국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보호무역 전쟁에 속속 가세할 것이 틀림없다. 대응은 나라마다 다르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미국의 ‘품’에 안길 자세고, 중국은 ‘마이 웨이’ 외에 방법이 없다.
한국 경제는 막대한 수출 감소가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경제 침체를 감내해야 할 처지다. 서두른다고 능사는 아니니 차분히, 무엇보다 세심하게 우리의 계산기를 두드려야 한다. 마지막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부는 차기 리더십이 들어서기까지 두 달간 온 지혜와 역량을 모아 가능한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 글로벌 경제 전쟁을 수행할 역량을 지닌 지도자를 뽑는 국민 지혜가 더 중요해진 시기다.
2025-04-0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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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그렇다면, 기꺼이 '양비론자'가 되겠다
요즘처럼 양비론자의 설 자리가 없던 시절이 과거 또 있었던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12·3 계엄사태 이후 “너도 잘못이 없진 않잖아”라고 하면 ‘내란세력’으로 몰아가고, 굳이 “물론 상대의 잘못이 더 크지만”이라 말을 보태면 그땐 ‘양비론자’라 매질한다.
양비론을 비난하는 그 마음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지금껏 아주 많은 경우에, 특정 사안의 논점을 흐리기 위한 수단으로 양비론이 악용돼 왔다. 많은 논쟁적 사안에서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한들 늘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은 아닐 터, 그걸 마치 대등한 듯 ‘등호’를 붙여 뭉뚱그리는 것에 물론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큰 잘못 앞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잘못이라 해서 아예 없었던 것처럼 눈감아지는 것 또한 반대다. 계엄 전후의 상황을 두고 치킨게임처럼 마주 보고 달리는 여야 모두를 탓하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그런데, 시대의 양쪽 어느 한쪽에 서지 않으면 양쪽 모두에게서 비겁한 회색분자 취급을 받는다.
사사로이 군대를 동원하고도 무렴하게 애국을 핑계 삼았던 위정자를 위해 법조문 속 ‘날’(日)의 개념조차 제멋대로 해석한 사법부를 욕할 땐 정의롭다 하더니, 야당 대표의 유죄를 무죄로 뒤바꾼 사법부를 탓하면 흰 눈부터 치켜뜬다. 사법부는 ‘마치 내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조작한 것’이라고 했던 야당 대표의 말에 대해 ‘골프를 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나 근거도 없다’라고 판단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르길, ‘대교약졸 대지약우’(大巧若拙 大智若愚)라 했다.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 하고,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 하다는 의미다. 무려 100페이지나 되는 판결문은 복잡한 법률적 수사로 빼곡하지만, 오히려 진실은 단순하다. 문제가 된 허위사실공표의 여러 핵심 중 하나는 그가 (과거 특정 시점에는) 몰랐다고 주장한 그의 부하직원을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에 있다. 그래서 그가 (예의 부하직원을 모른다고 했던 그 시점에) 부하직원과 함께 이국땅에서 골프를 쳤는지의 여부가 궁금한 거다.
그런데, ‘마치 내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조작한 것’이라는 말의 뉘앙스 뒤로 ‘(사진은 조작된 것이니) 나는 골프를 친 적이 없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느끼는 나의 뇌 구조가 이상한 것인가. 하긴, 우리는 ‘날리면’을 ‘바이든’처럼 들었던 수많은 사람의 청각 구조가 이상하다고 주장하는 세력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는 당시 예의 부하직원과 함께 골프를 쳤다.
나의 이상한 뇌 구조보다 더욱 나를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더이상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항소심 재판 결과가 불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항소심 판결이 잘못됐다고 하겠지만, 또한 누군가는 그것이 1심의 잘못을 바로잡은 판결이라고 반길 수도 있다.
두 판결 중 어디에 손 드는 것과 별개로, 하나의 사안에 대해, 심지어 새로운 증거나 진술도 없는 상황에서,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 두 재판부를 지켜 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사법부의 판단은 그저 한 재판부의 생각일 뿐, 그것이 사회정의의 실현이라 믿을 수 있을까. 결국, 재판부가 바뀌면 판단 역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누군가는 재난영화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로맨스물을 좋아하는, 그런 취향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런 재판부의 취향에 우리 사회의 정의를 맡겨야 한다. 공연히 마음 한구석이 얹힌다.
사사로이 위법한 군대를 동원했던 위정자의 탄핵심판 선고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헌법재판관들의 취향 차가 엔간해선 좁혀지지 않는가 보다. 이번 선고만큼은 헌법재판관들의 취향이 부디 일반 대중의 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모아지길 기대해보지만, 자꾸만 미뤄지는 것이 어째 영 불안하다. 소문도 흉흉하다. 인용에 손들 재판관 6명을 못 채워 선고일을 못 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하면, 헌법재판소 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해 2명의 재판관 임기가 끝나는 내달 18일까지 선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괴담도 떠돈다. 헌재 선고가 4월로 미뤄지면서 3월 마지막 주 전국 지표 여론조사에서 헌재의 탄핵심판 과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일주일 전에 비해 7% 가까이 하락했다.
이제라도 하루빨리 위정자의 탄핵심판 선고가 이뤄지길 바란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야당 대표의 대법원 판결도 조속히 진행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그런 사람을 향해 양비론자라 손가락질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양비론자임을 자처하련다.
2025-03-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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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너와 나의 거리
1990년대 중반,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발견한 가장 큰 문화적 차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였다. 말 그대로 ‘나’에게 타인이 물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이 다가오느냐에 관한 것이다. 살면서 그 거리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의 어느 카페나 가게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설 때, 어느 순간 뒤에 선 사람이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형마트에서도 카트를 부딪거나, 어깨를 툭 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실수로 접촉이 발생하면 꼭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의 일상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인지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 이야기할 상황이 생겼을 때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매너를 지켰다. 그런 행동들이 사람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를 많이 줄여 주었다. ‘역시 사는 곳이 넓으니 삶의 여유도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
인구 밀도가 높은 대한민국에서는 때때로 나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줄을 선 사람이 내뿜는 숨을 고스란히 느낄 지경이었다. 거기서 대화를 하거나 통화를 하면 듣고 싶지 않은 개인사가 어지러이 귀에 들어와 박히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정중하게 “조금만 떨어져 달라”고 말해도 ‘왜 그러냐’는 표정이 돌아왔다.
서양 문화에서 말하는 사회적 거리의 마지노선은 1.2m라 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인 공간’을 지켜주는 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관계 유지는 나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며, 무엇보다 개인의 독립성과 사생활 보호를 중시한다.
이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두 문화에 장단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됐다. 상호 의존적이고 연고주의와 공동체 문화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분명 당황스럽게 가깝다. 하지만 그만큼 인간적인 정이 존재했다. 누군가의 가족을 가까이에서 지켜주려는 DNA가 몸속에 흘렀다.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와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이 훈훈했던 적도 많았다. 거리에서 불의의 사고가 나면 누구랄 것 없이 달려와 도와주는 모습이 그 증거다.
네트워킹을 그저 비즈니스 수단이라 여기는 외국인들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정이 많은 공동체를 가진 K문화를 칭송하는 시대가 됐다. 공동 경제 커뮤니티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팍팍한 삶을 헤쳐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 덕이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갈수록 낯선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등장한 뒤 알고리즘과 SNS, AI라는 말이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킨다. 2020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이 ‘거리두기’라는 차가운 말과 함께 휩쓸고 지나간 뒤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서로를 밀어내는 자석의 양극처럼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2025년 3월을 지나는 대한민국은 어느 때보다 잔인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조심스러워서 정치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SNS에서는 정치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닫는 사이에 심리적인 거리감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어 버렸다. 정치적 양극화가 선을 넘어선 탓이다.
정치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오롯이 우리의 미래다.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어떤 정책이 좋은지 이야기하고, 이를 정치인들이 수렴해 현실화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민주 사회다. 정치 문화 선진국에서는 견해가 다르다고 인간 관계까지 단절하는 경우가 드물다.
알고리즘의 미로에 갇혀 혐오만 하는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어 보인다. 그런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와 헌법의 가치를 훼손하는 생각과 언행은 비판 받고 배척되어야 하나, 생각이 다르다고 단절을 택할 이유는 없다. 서양식 문화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꽤나 난처한 존재로 여길 테다. 개인 중심의 수평적인 문화가 강해지는 현실에서 공적인 영역에서조차 너와 나의 거리를 무조건 좁혀야 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와 사회적 환경이 만든 가치를 애써 부정할 이유 역시 없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고된 삶을 견뎌온 그 DNA는 분명한 우리의 강점이다. 미국식 개인 존중이 가진 장점을 취하되, 공동체 정신을 온오프라인에서 균형감 있게 발전시키는 것이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다. 그런 사회가 미래를 담보한다. 디지털 알고리즘이 주는 편리함 속에서도 우리 사회의 DNA를 품은 아들딸을 길러내는 것 역시 우리의 의무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아서’ 누군가를 도왔다는 주인공의 말처럼, 이해하며 공존하는 대한민국이 힘의 근원이다.
박세익 디지털영상센터장 run@busan.com
2025-03-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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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교육감 선거에 대한 단상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있는 부산은 외지인들이 보기엔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전한 금융 공공기관이나 해양수산 공공기관의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부산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부산에 혼자 산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비롯한 배우자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고, 본인만 부산에 내려와 있다. 물론 미취학 아동의 경우는 부산으로 데리고 오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웬만해선 서울에 두고 온다.
아이들을 키우기엔 사교육뿐만 아니라 부산의 공교육도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비단 외지인들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지 의구심이 든다. 단순히 ‘인 서울’ 명문대 입학생 수만을 따지는 게 아니다. 학력 신장만이 아니라 특기교육이나 인성교육 등 특색있는 교육이 필요한데, 그냥저냥 시간만 보내는 교육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
교육감은 지역의 ‘교육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자리다. 각 시도의 막대한 교육재정과 교육자치를 책임진다. 부산의 경우 연간 5조 원이 넘는 예산이 배정된다. 올해 부산시교육청의 예산은 5조 3351억 원에 달할 정도다.
교육감 선거는 교육의 자치 및 전문성 강화 등의 요구로 2006년 직선제가 도입됐다. 그전까지는 학교운영위원회가 투표하는 식의 여러 가지 간선제 방식이었으나 대표성이 떨어지고 조직선거나 금권선거 등의 비리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의 교육감 후보 추천은 금지됐다. 부산시교육감 선거는 2007년 2월 첫 직선제 선거가 치러졌다.
하지만 부산시장 선거와 구청장 선거 등 지방선거에서 함께 치러지는 교육감 선거는 상대적으로 유권자의 관심도가 떨어진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 버린 50대 이상의 유권자, 아이가 없는 미혼의 유권자들에게는 마치 남의 일로 치부된다.
이 때문에 초기의 교육감 선거는 ‘로또 선거’ ‘깜깜이 선거’ ‘묻지마 선거’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후보가 난립하면서 공약이나 인물보다는 투표용지 기재 순서가 당선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1번 혹은 2번 등 앞번호를 뽑은 후보가 전국적으로 교육감으로 당선되면서 번호 추첨만 잘하면 당선되는 로또 선거로 전락한 것.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이후 진영 간 단일화 바람이 불었다. 난립하던 후보는 보수 진영이나 진보 진영이라는 진영 깃발로 모이면서 이념 대결로 치달았다.
로또 선거는 사라졌지만,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의 교육감 후보 추천 금지라는 정당공천 배제 원칙은 사실상 유명무실화됐다.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뉜 교육감 후보자들은 특정 정당의 상징색을 입고 다니거나 선거 현수막과 포스터 등에 활용하고 있다.
다음 달 2일 치러지는 부산시교육감 재선거도 예외 없다. 정책이나 인물 대결이 아니라 사실상 이념 대결로 굳어지고 있다. 정책이나 인물 검증은 뒷전이고 진영 간 단일화에 목매달고 있다.
지난 15일 정승윤 후보와 최윤홍 후보가 단일화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이번 선거도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양자 대결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 기간 등을 고려할 때 보수 단일화 결과는 오는 23일쯤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일인 다음 달 2일까지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정책 검증이나 인물 검증의 기회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정책 홍보보다는 단일화에만 목맨 후보들은 교육감 선거를 정치인들의 선거와 다를 바가 없는 이념·진영 대결로 만든 책임이 있다.
2022년 6월 치러졌던 지방선거에서 부산시교육감 선거의 투표율은 49.1%였다. 지난해 10월 서울시교육감의 보궐선거 투표율이 겨우 23.48%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 부산시교육감 재선거 투표율도 극히 저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념 대결로 치닫는 교육감 선거가 진영 간 조직 대결로 전개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그동안 매치업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책과 인물 검증에 소홀히 했던 언론도 남은 기간 분발해야 한다. 날카로운 검증의 칼을 들이대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교육감 선거는 아이들이 창의적이고 시민적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문제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선거로 보면 안 된다. 교육감 선거에 관심을 가져야만, 부산의 교육이 살아날 수 있고 부산의 미래가 희망적일 수 있다.
최세헌 편집국 부국장 cornie@busan.com
2025-03-16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