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노래, 우리의 인생” … 라우어 시니어 합창제
10월의 마지막 날 저녁, 부산 기장군 동부산관광단지의 한켠이 환히 빛났다.
‘라우어 오시리아 콘서트홀’ 앞에는 정장을 차려입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악보를 들고 마지막으로 음정을 맞추었고, 또 누군가는 “오늘은 우리가 주인공이야”라며 서로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날은 시니어 세대가 직접 무대의 중심에 서는 날이었다.
‘2025 라우어 시니어 합창제’. 인생의 경험과 예술적 열정이 어우러지는 특별한 무대가 막을 올렸다.
오후 6시, 첫 합창단이 등장하자 조명이 천천히 밝아졌다. 부산시니어연합합창단의 단원들은 단정한 흰 셔츠에 푸른 스카프를 매고 서 있었다.
“터~, 이곳은 우리가 살아온 땅…” 노래가 시작되자 객석이 조용해졌다. 목소리는 젊은 날의 추억과도 같았고, 가사 하나하나에 세월이 묻어 있었다. ‘님과 함께’가 흐를 때는 객석 여기저기에서 흥얼거림이 따라왔다.
한 단원은 노래를 마친 뒤 살짝 눈가를 훔쳤다. 그 표정에는 ‘이 무대까지 오기까지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어서 무대에 선 더부산 콘서트 콰이어는 ‘아버지의 빈뜰’로 잔잔한 감동을 이어갔다. 낮고 깊은 베이스 음이 울려 퍼지자 객석의 숨결마저 잠잠해졌다. 그들의 노래는 마치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듯했다.
세 번째로 등장한 예그린합창단은 분위기를 확 바꿨다.
‘도둑고양이’ ‘아름다운 강산’으로 이어지는 무대는 경쾌했다. 단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고, 객석에서도 손뼉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쪽에 앉은 중년 관객은 “저렇게 노래할 수 있다면 나이 드는 것도 괜찮겠다”고 중얼거렸다.
공연이 중반에 이르자, 무대 위의 에너지는 더욱 짙어졌다.
해운대 We Road Choir가 ‘과수원길’과 ‘우리’를 부를 때, 화면에는 해운대의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노래는 바람처럼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함께 걷는 인생의 길’이 느껴졌다.
“우리~, 서로의 길을 비추는 등대처럼…”
가사 속 한 문장이 스피커를 타고 퍼질 때, 관객석 어딘가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무대는 라우어 합창단의 차지였다. ‘희망은 깨어있네’, ‘청산에 살리라’, ‘등대지기’ 등 무대 중앙의 단원들이 두 손을 모아 올리며 노래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젊음 못지않게 힘찼고, 한 음 한 음이 삶의 무게와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특히 앙코르곡 ‘등대지기’가 울려 퍼질 때, 객석 전체가 하나의 코러스가 됐다.
노년의 목소리들이 만들어낸 울림은 단순한 합창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노래였다.
이날 공연의 전체 연출을 맡은 이는 오페라 감독이자 성악가 홍지혜였다.
그녀는 무대 곳곳을 세심하게 조율하며 음악과 조명, 감정선을 하나로 엮었다. 이탈리아 베르디 국립음악원 출신답게 무대의 흐름은 완벽했다. 공연 사이사이 그녀가 직접 들려주는 짧은 해설은 노래의 깊이를 더했고, 관객은 음악의 의미를 새삼 음미했다.
이번 합창제가 열린 라우어 오시리아는 단순한 시니어 주거단지가 아니다.
예술·웰니스·교육이 결합된 복합문화공간으로, ‘문화로 나이드는 삶’을 제시한다.
이곳의 문화 플랫폼 ‘라우어 라티브’는 정기적으로 음악회, 미술 전시, 북 콘서트, 요가·명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시니어 세대의 문화적 자립을 돕는다.
이번 합창제는 그 라티브의 연말 대표 프로젝트로, 시니어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참여한 첫 대형 공연이었다.
“잔잔함만이 노년의 예술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정과 에너지를 가진 세대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공연을 준비한 한 관계자의 말처럼, 이번 무대는 그 자체로 시니어 세대의 자존감 선언이었다.
모든 합창단이 다시 무대에 올라 피날레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를 때, 객석의 조명이 천천히 밝아졌다.
관객들은 하나둘 일어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세대를 잇는 노래의 다리가 놓였다. 공연이 끝나자 오랜 박수가 이어졌다.
“젊을 땐 몰랐는데, 나이 들어서 부르는 노래는 더 깊네요.”
“오늘은 인생이 무대 같았어요.”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말이 가을밤의 공기 속에 스며들었다.
푸른 해안선을 배경으로 펼쳐진 이번 ‘라우어 시니어 합창제’는 단순한 음악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년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하나의 답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음색이 변해도 그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강성할 미디어사업국 부국장 shga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