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벤치는 권리다
이현정 사회부 차장
누군가 스웨덴에 1년간 살며 뭐가 가장 좋았냐고 물어오면, 기자는 망설임 없이 ‘벤치’라고 답한다. 해질녘이면 매일 다른 빛 조합으로 오로라 못지 않은 영롱함을 빛내던 하늘도, 폐를 뚫어낼 듯한 깨끗한 공기도, 맑은 물도 벤치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언젠가 스톡홀름에서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고는 ‘아, 잠시 앉아 풍경을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렸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눈 앞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이 경험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 뒤로는 편안한 등받이가 있는 벤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같았으면 틀림없이 좋은 경치를 만끽하기 위한 자릿값을 내러 카페나 식당에 들어갔어야 할 상황이었다.
기자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스웨덴의 ‘벤치’를 권리로 이해했다. 좋은 풍광과 자연 자원은 누구든 누려야 할 공공의 자산인 만큼, 주요 스폿(spot)에는 카페가 아닌 벤치가 있었다. 자연은, 그리고 경관은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경관을 누리기 위해 자릿값을 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벤치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였다. 나아가 도심 곳곳, 심지어는 쇼핑몰과 백화점 등에도 곳곳에 벤치가 있어 누구든 돈을 내지 않고도 쉬어갈 수 있었다. 벤치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혼자 나와 햇볕을 쫴야 하는 사람,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이들을 어딘가로 숨어들지 않게 했다.
공원 벤치에서는 생일 파티나 피크닉 파티도 자주 열렸다. 공원 벤치와 나무 사이에 가랜드와 풍선을 달고 피자 3~4판을 사오면 파티 준비가 끝이 났다. 강가, 해변가 벤치는 수영을 즐기는 이들의 공짜 휴식처였다. 벤치는 거의 모든 장소에 넉넉하게 있었다.
땅 가진 사람, 아파트 가진 사람이 멋진 풍광을 독점하는 게 당연시되는, 경관의 사유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부산에 살다 보니 ‘작지만 공적인 시설물’ 벤치가 더욱 그리워진다.
다행히 이기대 앞 아파트 허가 과정의 문제점을 짚으며, 또 아파트 계획이 철회되는 과정을 보며 부산 시민이 경관을 공공의 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그동안 부산의 해안가 경관은 아파트와 빌딩에 점령 당하며 개인의 부동산 가치를 올려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우리가 이 경관을 독점하기 위해 이만한 돈을 주고 샀으니, 너네도 그에 상응하는 돈을 내야 해”에 개인은 저항할 수 없었다. 경관 또한 돈 있는 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시민들은 경관을 누릴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경관을 가리는 건물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가 보존 가치가 높은 해안선을 사 모은다는 얘기가 더 이상 먼 나라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경관은 시각적 요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산의 경관은 부산 사람의 삶과 문화, 역사가 응축된 집합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자산이다. 또한 앞으로 부산의 경쟁력과 관광의 가치는 경관에서 판가름이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의 가장 경치 좋은 곳에도 가장 높은 빌딩이 아닌, 가장 낮은 시설물 벤치가 세워지길 바라본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