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이 시대의 '막걸리 긴급조치'
문학평론가
최근 들어 갑자기 호명된 “반국가 세력”
유신 시대에나 듣던 시대착오적 슬로건
권위·편견 기대는 현 정권 행태 기시감
요즘 “반국가 세력”이란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이 말이 가리키는 사람은 상당히 위험한 세력이다. 그야말로 국가에 반(反)하는 의식으로 언제라도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할 우려가 상존하는 이들이다. 쉽게 말해 ‘간첩’이나 ‘이적 행위’를 떠올리면 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니, 기후 위기니, AI(인공지능)니 하면서 전 세계인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 인류에게 닥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방안을 찾기에도 모자랄 판국인 오늘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정신을 다시 차리고 생각해 본다. 정말 반국가 세력이 존재할까? 존재한다면 이들은 지금 어떤 생각과 행동으로 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혼란을 빠뜨리게 하는가?
최근 들어 대통령의 입에서 갑자기 나오기 시작한 ‘반국가 세력’은 사실 한국이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던 무렵부터 6·25 전쟁을 거쳐 박정희 유신 정권까지 겪어야 했던 극심한 좌우 대립의 소산이다. 이념과 사상이란 이름으로 동족을 가두고 죽여야 했던 비극의 한국 현대사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말이 바로 반국가 세력이다. 실제로 한국전쟁과 여수·순천 사건 및 제주 4·3 항쟁 등의 슬픈 역사는 서로를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짓고 단죄하려 했던 집단 간의 목숨을 건 싸움으로 얼룩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국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념과 사상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어 죽어나갔다.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서도 여전히 반국가 세력이란 이름은 우리 무의식 깊숙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마치 유전병처럼 멀쩡하다가도 잊을 만하면 존재를 드러내는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묻기도 따지기도 전에, 권력의 최상부에서 제시되었다는 이유로 낙인을 찍으려고 혈안이 된 정국을 지켜보면서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근래 최저 수준의 지지율을 기록한 대통령과 정부 내각의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이 여기저기 사방에서 흘러나오던 참에 절묘하게도 반국가 세력은 호출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국가 세력이 누구이며, 어디에 암약해서 어떤 말과 행동으로 사회를 어지럽히는지 찾아야 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간첩처럼 이적 행위를 하려고 눈을 부라리거나(혹은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눈을 내리깔거나) 선량한 시민을 선동해서 국가를 전복하려는 낌새를 보이는 자를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고개를 돌리니 한숨 섞인 푸념만이 들린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을 봐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루 먹고 살아가는 데 족하거나, 하루라도 버텨보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남들만큼이라도 살아보려고 정신이 없다.
그러니 반국가 세력이란 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눈 뜨고 찾으려야 찾기 요원한 그 세력은 잊을 만하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익히고 생각하는 중에 간악한 반국가 세력이 누구인지 절로 안다. 경남 마산에서 활동하는 우무석 시인의 ‘70년대-막걸리 긴급조치’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심사 틀려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도/ 술 취해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도/ 박통과 긴조 시대에 대해/ 꽥꽥 오리울음 같은 객기 내뱉지 마라/…/ 그랬으므로 말하는 것 자체가/ 되레 운동이었던/ 코미디의 시대였으니.’(시집 〈10월의 구름들〉)
다가오는 10월 16일은 이곳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유신 독재의 반민주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통치 체제에 맞서 시민과 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친 날이다. 부산에는 계엄령, 마산에는 위수령이 내려져 수많은 사람이 경찰에 잡혀가서 고초를 겪었다. 걸핏하면 ‘긴급조치 9호 위반’ 명목으로 무고한 사람을 반국가 세력으로 낙인찍었던 이 사건은 훗날 ‘부마민주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과 함께 4대 민주화운동으로 정립되었으며 2019년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부마민주항쟁 45돌을 맞는 이즈음에 다시 듣게 되는 반국가 세력을 생각한다. 당시 항쟁의 와중에 마산경찰서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사제 총기가 발견되었고 시위는 불순 세력이 음모한 폭동이었다고 발표했지만, 조작임이 밝혀졌다. 4·19 혁명을 촉발한 마산 3·15 의거 당시에도 이승만 정권은 시위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지금 횡행하는 “반국가 세력”은 마산 3·15 의거와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이었다. 결국 정권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말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인 두 시위로 이승만·박정희 정권은 막을 내렸고, 잠시나마 민주주의의 봄볕이 찾아왔다. 그 역사를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