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아랑훼즈' 2악장
음악평론가
이제나저제나 바뀔까 하던 날씨가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다. 며칠 전까지 에어컨 없이 잠들기 힘들었는데, 이젠 이불 한 장은 덮어야 할 것 같다. 날씨가 달라지니 더위 때문에 미뤄뒀던 여행 욕구가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자는 여행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 익명이 보장되는 어딘가로 이동하면 훨씬 겸손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거리를 두고 보면 그토록 심란하던 일도, 복잡하던 사건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법이다.
듣고 있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음악이 있다. 아무런 가사도 없지만, 왠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이름 없는 도시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음악. 내게 있어선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이 그런 음악이다. 이 곡은 스페인의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의 출세작이자 명실상부한 기타 협주곡 역사상 최고의 히트곡이다. 특히 1악장과 3악장 사이에 있는 느린 2악장은 ‘20세기 최고의 멜로디’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유명하다.
로드리고는 세 살 때 디프테리아에 걸려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게 되었다. 앞이 안 보이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음악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터키 출신의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카미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자 했지만, 카미의 부모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부모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앞을 못 보는 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음악가라니….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 확고했고 결국 카미의 부모도 손을 들게 했다.
결혼한 후에 로드리고는 장학금을 받게 되어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고, 카미는 첫아들을 임신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이는 유산되었고, 두 사람은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부부가 선택한 여행지는 스페인의 옛 왕궁이 있는 아랑훼즈였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주나 부여 같은 곳이다. 카미는 앞이 보이지 않는 로드리고의 눈이 되어서 옛 왕궁의 화려한 풍경을 설명해 주었다. 로드리고는 카미의 손을 잡고 벽을 더듬어가며 마음에 담아놓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부인에 대한 사랑과 상상으로 떠올린 왕궁의 이미지를 엮어 만든 곡이 바로 ‘아랑훼즈 협주곡’이다. 1940년에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사인스 데 라 마사가 초연했다. 이듬해 첫딸 세실리아가 태어났고,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안달루시아 협주곡’ 등을 발표하며 로드리고는 유럽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두 사람은 정말 오래도록 정답게 살았다. 부인 카미는 1997년 92세, 로드리고는 1999년 98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