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옛 텔레비전드라마를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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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화평론가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로 본 문화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회문제 담겨
'해야 할 말'은 하는 용기가 인상적

일이 있어 30년도 더 지난 텔레비전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나의 의지는 무관하게 보게 된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1991년 대입학력고사를 볼 즈음에 시작한 드라마였다. 나는 이듬해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 생활 틈틈이 보는 둥 마는 둥 그렇게 흘깃흘깃 넘겨 보아야 했던 드라마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1997년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신문은 시청 가능한 중국 인구 9억 명 중 4.2%에 해당하는 3900만 명이 이 드라마를 보았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의외였고, 중국으로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한국 신문도 이 드라마의 성과에 자랑스럽다는 듯한 인상을 내보이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냥 의외였고, 별일에 불과했지만, 훗날 이 드라마의 파장은 한류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예광탄으로 자리 매김되었다. 그러자 이 드라마는 연구 논문 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했고, 각종 한류 서적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평소 나 역시 이 드라마가 한국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 수출 역사에서도 중요한 이정표로 남는다는 주장을 덧붙이곤 했다. 하지만 정작 55부작에 이르는 이 드라마를 다시 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추석 연휴는 길었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에, 용기를 내서 그 시작을 다시 경험하기로 했다. 긴 연휴도 그 끝을 드러내면서 당연하다는 듯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드라마 시청은 이어졌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그 시절 그 드라마와 함께 떠났던 MT도 생각났고, 한껏 비웃으며 이 작품을 은근히 폄하했던 기억도 드문드문 떠올랐다.

개인적인 추억을 논외로 친다고 해도, 이 드라마가 가진 매력을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 드라마에는 삶에 대한 명료한 발언이 담겨 있었다. 과거 재래식 ‘한국인’의 삶과 미래 ‘도시인’의 삶이 고루 담겨 있었고, 지나가 잊힌 것에 대한 미련과 함께 새롭게 찾아올 미래에 대한 우려 역시 함께 담겨 있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과거의 작품이기도 했지만, 현재의 작품도 될 수 있었다. 억지로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30년도 더 된 이 드라마 안에 지금-이 시대의 문제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격차로 인해, 우리가 걸어왔던 지난 30년의 모습이 어쩌면 이 드라마의 깊이를 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밤을 새기 시작했다. 55부작을 다 보기 위해서는 며칠을 더 보내야 할지도 몰랐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작품을 보고 써야 할 연구 논문과 저술도 잠시 잊기로 했다. 그 시절, 그때, 우리들이 보고 그 세대의 또 다른 우리들이 구상했던 이 작품은 확실히 지금 작품과 달랐다. 지금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어조로 그 시절과 그 이후의 시절, 그리고 그 이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세와 의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무언가를 주장하고자 하는 태도는 인상 깊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서로 다른 기호를 맞추어야 했던 주말 연속극이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중국인이 좋아한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인마저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한때 1980~1990년대 풍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유행에 둔감하기 때문에 지금도 그 풍조가 남아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러한 유행이 필요했다면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용기가 아니었을까. 신중함과 점잖음을 핑계로 지나치게 머뭇거리지 않고,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었던 용기는 그 시절 더욱 분명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그리운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오래된 옛날 텔레비전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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