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기억하겠습니다, No. 11 최동원
변현철 스포츠부장
14일 사직구장서 13주기 추모 행사
한화 류현진, 동상 앞 헌화·묵념 눈길
연세대 시절 ‘대통령기 우승’ 이끌어
동아대와 1박 2일간 연장 혈투 유명
1981년 실업팀 롯데 정상 등극 견인
코리안시리즈 6경기 모두 등판 괴력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낸 ‘불멸의 무쇠팔’ 고 최동원 감독의 13주기 추모 행사가 지난 14일 부산 동래구 사직구장 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한화 이글스의 류현진도 참여해 은사인 최 감독의 동상 앞에 헌화하고 묵념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괴물 투수’ 류현진과 ‘무쇠팔’ 최동원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화 1군 투수 코치였던 최동원은 스프링캠프부터 류현진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김인식 전 감독에게 반드시 선발 투수로 기용할 것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최동원의 안목은 정확했다.
류현진은 데뷔 첫해 18승6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23을 올려 신인왕과 최우수선수(MVP)를 석권,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2006년 여름 최동원은 시즌 도중 2군 투수 코치로 보직을 옮겼고, 2007년부터는 2군 감독직을 맡았다. 2008년을 끝으로 프로 지도자 생활을 마감했고,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해 2011년 9월 14일 하늘의 별이 됐다.
최동원 동상이 건립된 건 그가 세상을 떠난 2주기인 2013년 9월 14일이었으며, 이때는 류현진이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진출한 첫해였다. 류현진은 이후 MLB에서 활약을 이어가다가 올해 한화에 복귀한 것이다. 최동원은 롯데의 영웅인 것과 동시에, 이처럼 한화와도 인연이 깊다.
최동원의 ‘무쇠팔’ 본능은 고교·대학·실업 선수 시절에도 빛을 발했다.
경남고 2학년 때인 1975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 당시 2관왕을 기록 중이던 최강 팀 경북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후, 바로 그 이튿날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경이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3학년 때는 청룡기대회 승자 결정전에서 ‘해태 타이거즈 전설’ 김성한이 주전이었던 군산상고와의 경기에서 9이닝 동안 20개의 탈삼진을 잡고 완봉승을 거뒀다. 이어 최종 결승전에서 다시 마주한 군산상고를 상대로 12개의 탈삼진으로 완투승을 기록하며 청룡기를 거의 혼자 힘으로 제패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연세대 재학 시절인 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때 동아대와의 준결승전에서 나중 롯데에서 주전 투수로 활약한 임호균과의 1박 2일에 걸친 18회 연장 승부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14회까지 양 팀은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돼 다음 날로 경기가 이어졌다. 결국 최동원의 연세대는 김봉연의 솔로 홈런으로 1-0 신승을 거뒀다. 최동원은 같은 날 곧바로 열린 성균관대와의 결승전에도 선발로 등판해 9이닝 완투를 했다. 이틀 동안 무려 27이닝, 투구 수 375개에 12피안타, 33탈삼진, 2실점을 기록한 끝에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최동원의 투혼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는지, 상대 팀이었던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성균관대 감독이 경기 후 마운드에 올라 최동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최동원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당시 최고 수준인 3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 그때부터 롯데 자이언트의 에이스가 됐는데, 특히 입단 당시 코리안시리즈 6경기 중 6경기에 모두 등판해 팀을 우승으로 견인한 일화는 아직까지 유명하다.
1981년 롯데 자이언트가 소화한 팀 전체 이닝이 36경기 324이닝이었는데, 그 중 206이닝을 신인이었던 최동원이 책임졌다. 그는 17승4패라는 아주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코리안시리즈에 올려놓았다. 당시 상대 팀은 삼성 라이온즈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김시진, 장효조 등이 포진한 육군 경리단이었다. 롯데가 6차전 끝에 3승2패1무로 승리했다. 롯데의 우승과 더불어 최동원은 실업야구 최우수선수, 다승왕, 신인투수상을 수상하며 3관왕에 올랐다.
최동원은 코리아시리즈 6경기에 등판해 42와 3분의 1이닝을 던졌고, 2승1패 1세이브, 방어율 2.45를 기록했다. 특히 4차전 때 7회말까지 선발로 던지다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8회초 1루수로 보직이 변경됐고, 8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해 깔끔하게 상대 타선을 막아 한 경기에서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1982년 소속 팀이었던 롯데가 프로로 전환됐기에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전력공사에 이적해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유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1982년에 있었는데 이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임호균,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도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데뷔를 하지 못한 선수들이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한대화가 8회말 역전 스리런 홈런을 때려 일본을 5-2로 꺾고 극적으로 정상을 차지했으며, 최동원은 대표팀에서 또 한 번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변현철 기자 byunh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