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내일(來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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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계성 수필가

우리의 만남은 그런 기적
되돌릴 수 없는 소중한 경험
그가 나를 눈뜨게 해준 것처럼,
친구의 의미에 대하여
눈뜨게 해 준 적이 있는가

30대 때의 일이니,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을 지금까지 잊지 못합니다. 그때는, 고향에 갈 때는 하루일과를 마치고 막차를 탔으므로, 마치 어둠 속을 잠행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늦가을의 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고향이 가까워져 오자 버스의 창으로 흐릿한 불빛이 보였고, 나는 유리창에 낀 뿌연 습기를 손바닥으로 닦았습니다.


고향 마을은, 마치 어둠 속에 웅크린 고독한 짐승 같아 보였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주인이 지키는 책방에 들러 책 한 권을 사고는, 어머니가 혼자 지키는 집에 들었습니다. 책을 펴들고 자리에 누웠을 때, 뒤뜰 대나무 숲에 내리는 늦가을 빗소리가 가슴을 차갑게 적시었습니다. 고향집은 고적함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날의 귀향은 그 추적거리는 늦가을 비처럼 썰렁하고 외로웠습니다. 그때 긴 마당으로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어이!…, 니가 고향에 와서 우째 내한테 신고도 없이 혼자 잔단 말이고! 대체 누구 허락받고 하는 짓이고….” 그 못 말리는 오지랖과 장난기가 서 말이나 담긴 목소리의 주인은 내 초등학교 친구였습니다. 막차에서 내리는 나를 본 누군가로부터 나의 귀향을 신고받은 모양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친구의 방문으로, 그때까지 집을 지키던 적요(寂寥)가 놀라서 도망을 가버리고, 나의 외롭던 귀향은 갑자기 정신없이 시끌벅적해져 버렸습니다, 나는 그에 이끌려 시내로 나갔고, 그는 친구들을 불러내었습니다. 그에게 불려 나온 우리는 밤새 같이 술집을 돌았습니다. 우리는 그 밤을 정다운 담소와 폭소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얼마 후, 그는 우리 친구들 중 제일 먼저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그 젊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그 밤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그 밤이 그 친구와의 마지막 술자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버릴 때까지, 앞으로의 삶이 팍팍하게 많이도 남았다고, 그런 밤은 앞으로 얼마든지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술 초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사람에게는 기약된 내일이란 없는 데도 나는 많은 내일을 믿고 있었습니다. 내일이란, 마치 흘러간 어제처럼 사람의 생각에만 존재하는 허구이지만, 사람들은 매일 내일을 만들어 동행하면서, 귀찮은 것들은 전부 내일에 맡겨버립니다. 나도 그 친구에게 권할 술잔을 매일 내일로 미루다가 끝내 권하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이 하염없는 우주 중 먼지같이 작은 지구 중에서도 그 작은 골짜기에서, 이 하염없는 세월 중 찰나 같은 이 육체의 시간 중에, 친구라는 인연으로 만나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만남의 경험은 그런 기적일 것입니다. 가을비가 추적거리던 고향의 늦은 가을밤, 그의 뜻하지 않는 방문은 내가 잃어버렸던 따뜻한 고향을 되찾게 하였으며, 늘 곁에 두고도 무감각하던 친구의 넉넉한 정을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방문은 새삼스레 내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고, 사소한 만남조차 두 번 다시 되돌려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순간들이란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살았던 삶의 길이보다 두 배나 더 긴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산 삶의 길이보다 더 많이 산 삶은, 그의 삶에 비하면 덤입니다. 나는 이렇게 오래 살면서, 그가 나를 눈뜨게 해 준 것처럼, 누구에겐가 친구의 의미에 대하여 눈뜨게 해준 적이 있는지 내게 물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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