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도둑맞은 정의
문학평론가
정부 대일 정책 국민 눈높이 맞는지 의문
양국 경제적 이익 위해 역사·진실 외면
잃어버린 정의 되찾는 주체는 결국 국민
무덥던 여름도 말복을 지나 아침에 집을 나설 때면 제법 가을바람이 느껴진다. 곧 계절이 바뀌게 된다. 예상 밖의 좋은 성적을 거둔 파리 올림픽도, 논란 속에 맞이했던 광복절도 지나갔다. 이렇게 어김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성숙’하는 것이리라. 성숙은 단지 이전보다 나아지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곡식이 비바람과 가뭄을 견디면서 끝내 알곡으로 영글듯, 성숙하기 위해서는 뜻하지 않은 난관과 풍파를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현 정부는 공정과 상식을 내걸면서 출범했다. 어느덧 2년이 지났지만 정치권의 극단적인 대치는 더욱 심화된 형국이다. 지금도 각종 이슈를 둘러싸고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하루하루 벌어먹기에 급급한 대다수 국민은 이러한 정치권의 행태에 냉소와 불신을 보낸 지 오래되었다. 공정과 상식을 외치는 이들에게 애초 그 단어의 의미를 되묻고 싶은 심정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도무지 풀릴 낌새조차 보이지 않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삶의 행복과 만족을 얻기 위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훤히 드러나는 사태의 속성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발견’과 ‘예측’이라는, 사건의 전말과 가능성을 확인한다. 사태의 과정에 놓여 있을 때는 진실 여부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대개는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 보았을 때 당시 정황을 뚜렷이 파악할 수 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일본 사도광산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에 대한 ‘강제 동원’ 표기를 묵살한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와 애초에 어떤 메시지와 ‘협약’을 주고받았는지 시간이 지나면 훤히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사도광산뿐만이 아니다. 여러 정황상 이제는 국민들에게 거의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것이 현 정부의 ‘대일 굴욕외교’이다. 오래전부터 역사의식에 문제가 있었던 사람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한 인사권 세력의 이면에는 어떤 실체가 자리 잡고 있는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고 있다. 국가 재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일자리와 청년 취업 문제, 그리고 고령화와 마이너스에 가까운 출산율에 따른 경제인구 소멸 등 풀어야 할 사안이 쌓여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가능성과 행복의 모습을 예측해야 할까.
산업사회에서 우선시되었던 물질적 가치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물질적 소유와 이익이 곧 행복과 삶의 가치로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물질은 인간 삶의 질적인 만족도와 가치를 위해서 중요하다. 그러나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하는 사회적 착란과 가치 전도는 개개인에게 떨쳐내기 힘든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다.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해 일을 한다는 태도는 좀체 보기 힘든 요즘이다. 우리 정부의 대일 외교 밑바탕에도 오랫동안 누적된 한일 간의 반목을 ‘양보’라는 제스처를 통해 해소하고, 향후 ‘발전적인’ 양국 관계를 형성한 뒤, 결국은 서로의 ‘경제와 산업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정부의 이런 의중이 나만의 상상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두 존재 사이의 발전은 지난 시간에서 겪은 숱한 사건과 감정을 지운 자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어느 한쪽이 양보하거나, 다른 한쪽이 양보를 통해 받은 이익을 다른 차원의 이익으로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것도 아니다. 현 정부가 자주 쓰는 공정과 상식을 그대로 실현하면 된다. 여기에는 더하고 빼는 복잡한 셈법을 작동시킬 여지조차 없다. 하지만 이 간단한 원리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안다. 가장 쉬운 논리를 실현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중에 ‘도둑맞은 편지’(1844)가 있다. 어느 귀부인의 도둑맞은 편지를 탐정의 추리로 되찾게 되는 간단한 줄거리의 소설이다. 이 작품의 핵심은 편지를 훔쳐 간 사람을 도난당한 사람이 알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훔쳐 간 사람 몰래 다시 원래의 위치로 편지를 되돌리는 ‘고난도’ 해결 능력을 탐정 오귀스트 뒤팽은 선보인다. 지금 우리에게 정의는 실종된 듯한 형국이다. 하지만 사라진 정의를 되찾기 전에 그것을 앗아간 존재가 누구며 무엇인지 제각각 다른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다. 정의를 잃어버린 주체가 탐정이 되어 되찾아야 하는 이중의 임무가 국민에게 주어졌다. 정의를 찾게 되면 행복과 삶의 가치는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