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달빛에 묻어나는 장미꽃 향기
음악평론가
여름에 덥다고 투덜거리면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처서는 지나야 해.” 살아온 경험치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머잖아 바람이 불 것이고, 들녘의 색깔이 변할 것이며, 장롱 속에 넣어둔 긴소매 옷을 주섬주섬 입게 될 것이고, 마침내 겨울이 오고 한 해가 저물 것이다. 내년에도 여름은 또 오겠지만, 다시 오는 여름은 올해의 여름과 다르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짧은 여름의 기억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 이 음악을 골랐다.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의 연가곡 〈여름밤〉에 나오는 ‘장미의 정령’이다. 베를리오즈가 시인이자 친구이기도 한 테오필 고티에의 시집 〈죽음의 연극〉에서 6편의 시를 가사로 뽑아 곡을 붙인 것이다. 원래 피아노 반주로 된 노래였으나 곡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자 관현악 반주 버전을 다시 만들었는데, 이 작품이 관현악 반주로 발표된 최초의 연가곡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프랑스 예술가곡에 약한 편이라 무대에서 들을 기회가 적은 곡이지만 숨어 있는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작품 구성을 보자면 1곡은 ‘빌라넬라’ 즉 목가(牧歌)다. 2곡은 ‘장미의 정령’, 3곡 ‘호수에서’, 4곡 ‘부재’. 5곡 ‘묘지에서-달빛’, 6곡 ‘미지의 섬’으로 이어진다. 특히 사랑받는 곡은 2곡 ‘장미의 정령’이다.
어떤 소녀가 무도회에 가면서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드레스에 꽂았다. 소녀가 무도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잠이 들자 낮에 꺾은 장미의 정령이 나타나서 얘기한다.
“... 오, 그대, 나를 꺾어버린 사람아, 그대는 나를 버리지 못할지니, 매일 밤 장미의 정령이 그대 베개 곁에서 춤을 출 것이에요. 그러나 두려워 말아요. 나는 미사도 애도가도 요구하지 않아요. 이 오묘한 향기는 나의 영혼, 나는 천국에서 온 것이므로….”
얼마나 몽환적인 노래인가. 한여름 밤의 꽃향기가 달빛에 묻어나는 듯하다.
당시 베를리오즈는 연극배우 해리엇 스미스슨과 결혼해서 살던 때였다.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따라다니며 얻어낸 결혼 생활이지만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리엇은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베를리오즈는 또 다른 여인, 소프라노 마리 레치오에게 빠졌다. ‘여름밤’은 이즈음에 작곡한 사랑 노래이며, 대상은 새로운 연인 마리 레치오인 듯하다. 곡이 출판되고 1년 후쯤에 베를리오즈는 해리엇과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갔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레치오와 결혼했다. 사랑의 계절은 그렇게 지나간다. 한 시절의 여름이 지나고 다른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