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망원경과 가속기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눈앞 부 창출과 거리 멀어도
역사 새 지평 연 첨단기술들
과학자적 호기심·끈기 덕분
외국에서 태어난 딸아이가 하루는 한국말이 어렵다며 울상을 지었다. 학교에서 ‘별을 관측하기에 적당한 도구’를 묻는 질문에 망원경·현미경·돋보기가 예시로 나왔단다. 망원경도 현미경도 돋보기도 모두 ‘작은 것을 크게 보는 것’인데,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푸념이었다. 당시 열 살이던 딸아이 덕분에 필자도 우리말의 어려움을 새삼 알게 됐다.
망원경·돋보기·현미경은 모두 작은 것을 크게 보는 원리지만, 각각의 용도에 맞도록 달리 제작된 도구다. 특히 멀리 있는 것을 당겨서 보기 위해 제작된 망원경과, 작은 것을 크게 확대하는 기능만 최대화한 현미경은 큰 차이가 있다. 빛을 모으는 볼록렌즈는 작은 것을 크게 보이게 하는 반면, 빛을 퍼뜨리는 성질이 있는 오목렌즈는 광각을 크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흔히 이런 광학기기의 경우 자세히 볼 수 있는 분해능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으나, 실은 어두운 것을 밝게 볼 수 있게 하는 집광력도 광학기기의 아주 중요한 성능이다.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을 크게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천체 관측의 중요한 도구가 됐는데, 멀리 있는 천체란 결국 빛이 그만큼 먼 거리를 달려와야 한다는 점에서 멀리 있는 별의 관측은 과거의 우주를 눈으로 관측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우주의 나이만큼이나 멀리 있는 별은 초기우주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만 보면 ‘우주 최초의 상태를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초기우주는 빛이 아무 장애 없이 통과될 만큼 투명하지 않았다. 전기적으로 중성인 안정된 원자들이 형성되기 이전, 전자·핵·양성자·쿼크 등 하전된 입자들이 우주를 가득 채워 우주가 불투명했을 때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가속기다.
흔히 입자를 가속시킨다고 알려져 있는 가속기는 하전된 입자만 전기장을 통해서 가속시킨다. 음전하를 띠는 전자가 음극과는 밀치고 양극에는 당겨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건전지의 음극과 양극을 따로 전선을 연결해서 두 판을 마주 보게 하면 가장 기본적인 가속장치가 되는데, 공기 입자가 방해하지 않도록 진공으로 만든다. 보통 음극을 뜨겁게 만들면 전자가 음극에서 방출되는데, 그래서 음극선관(Cathode-Ray Tube, CRT) 모니터는 그 자체로 작은 가속기다.
입자를 가속시키는 가속기가 초기우주 탐구를 가능하게 한 비결에는 두 가지 물리학적 이유가 있다. 입자는 빨라질수록 커다란 것은 통과해 버리고 점점 더 작은 것들과 반응하는 양자적 성질이 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인 27km 가속기에서 가속된 양성자는 1아토미터(100경 분의 1m)의 미시세계까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동시에 이 작은 공간에 집약된 엄청난 에너지는 아인슈타인의 ‘에너지와 물질의 등가원리’(E=mc²)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무거운 입자들을 생성시킨다. 좁쌀끼리 충돌시켰는데 마술처럼 수박과 호박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10여 년 전 표준모형의 화룡점정이 된 힉스 입자도 양성자보다 약 125배 무겁다. 이렇듯 가속기는 빠른 입자를 통해 미시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줄 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주엔 존재하지 않지만 최초의 우주에나 존재했을 법한 무거운 입자들을 생성시켜 우주 최초의 상태들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해 준다.
약 400년 전 거의 동시에 발명된 망원경과 현미경이 인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듯이, 약 100년 전 개발된 가속기는 우주와 물질의 근원에 대한 탐구에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거의 예외 없이 노벨상의 업적이 됐다.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 유럽은 경쟁적으로 고에너지의 가속기를 개발해 왔으며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30년 전 우리나라도 가속된 전자를 통해 고에너지의 빛(X선)을 만들어내는 포항 방사광가속기를 시작으로 최근 중이온(희귀동위원소) 가속기(RAON)를 완공하고 첫 충돌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정은 당장의 편리와 재화를 창출하는 일과 자못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첨단기술 개발의 동인이 됨은 물론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과 생각을 변화시킨다. 중국과 유럽은 최근 100km에 달하는 초대형 가속기 건설 추진을 선언하고 나섰다. 사실 현재의 우리 지식으로는 그 새로운 도구가 우리를 어떤 경지로 데려다 줄지 아직 모른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처음 만들었던 이들이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 관찰과 우주여행까지 꿈꾸었을 리 만무하다. 답답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국내외 정세와 기후변화를 실감하는 무더위 속에서도 과학자들의 호기심과 끈기는 그래서 더 위대해 보인다.
“인류의 도약은 새로운 개념보다는 새로운 도구의 발명에서 기인한 바가 훨씬 크다.”(프리먼 다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