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라는 그 말 [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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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서 만들어진 좌파 개념
우리나라에선 본 의미 잃고
갈등·분열의 씨앗으로 작용

사회 모순 해법 찾기 위해선
좌와 우를 편가름 하는 대신
옳고 그름 가리는 지혜 절실

“당신, 좌파네!” 적의 가득 담은 이 말이 목하 대한민국 사회에 흘러 넘친다. ‘좌파’가 너무나 가볍게 소비되는 것이다. 나와 배치되는 상대라면 일단 좌파라고 낙인찍는다. ‘좌파’가 그리 함부로 남발해도 되는 말인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의 과거 언사와 관련한 논란이 한 예다. 이 후보자는 2022년 12월 자유민주당 주최 강연에서 좌파를 거론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문화권력도 좌파!” “‘택시운전사’ ‘암살’ ‘베테랑’ ‘기생충’은 좌파 영화!” “정우성은 좌파 연예인!” 당시 이 후보자가 무엇을 근거로 그런 가름을 했는지 분명치 않다. 정우성은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에서 내레이션을 맡아서 좌파라는데, 도통 요해 불가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벌어진 좌파 다툼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지난 11일 2차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TV토론회 장면. “한동훈 후보가 (좌파 세력의) 아이돌로 내세워진 게 아니냐?”(원희룡) “본인도 모르게 (좌파) 트로이의 목마가 되는 것 아니냐?”(윤상현) “(한 후보자에겐) 민청학련 주모자인 이모부가 계시지 않느냐?”(원희룡) “원 후보자야말로 극렬 운동권 출신 아니냐?”(한동훈) 차기 여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 뜬금없이 좌파 공방이 뜨거웠다. 한동훈이 좌파라니…. 그의 이력을 볼 때, 아무리 목불인견의 이전투구 전당대회라지만, 헛웃음이 절로 났다.

‘좌파’는 서구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근대 자유주의 시민사회의 효시였음은 두루 아는 사실. 봉건 절대왕정을 종식시키고 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세상을 만드는 게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그해 소집된 국민회의에서 혁명을 완수하려는 공화파는 왼쪽(좌파)에, 이를 막으려는 왕당파는 오른쪽(우파)에 자리 잡았다. 요컨대 좌파는 새로운 시대의 개창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일궈낸 주체였던 것이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좌파’라는 단어를 두고 저주를 쏟으며 목숨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는 곳이 우리 대한민국이다. 왜 그런가. 좌파를 지칭할 때 그 전제로 ‘좌파=악’이라는 등식을 갖기 때문이다. 어째서 악인가. 과거에는 북한에 대한 태도를 따졌다. 북한을 적대하지 않고 “공존” “평화” 운운하면 좌파라고 몰아붙였다. ‘좌파’ 앞에 ‘종북’이라는 단어가 접두어처럼 붙는 까닭이다. 요즘은 종북은 차치하고, 보수연 하는 정권의 잘못을 지적하면 일단 좌파로 분류한다. ‘채 상병 특검’을 촉구하는 동료 해병을 두고 좌파 해병으로 규정하는 데서 확인되듯, ‘좌파’ 오남용은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친구에게 “넌 좌파야!”라고 쏘아붙이는 지경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대한민국에 좌파는 있다? 없다? ‘있다’는 대답은 옳으면서도 틀리다. 스스로 좌파임을 밝히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틀렸고, 상대를 좌파로 규정하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에서 옳기 때문이다. 여하튼 서구에서 태동한 좌파가 갖는 의미와 가치가 대한민국에선 깡그리 사라졌다고 하겠다.

이런 우리 현실에서 돌아봐야 할 인물이 있다. 영국 노동당 당수였던 토니 벤(1925~2014)이다. 그는 1950년 정계에 입문한 이후 철두철미 좌파였다. 노동당 다른 의원들이 점점 우경화할 때 그는 더 좌경화했다. 그런 벤이 작고했을 때 우파 신문 〈텔레그라프〉조차 논평에서 ‘영국의 국보’라는 표현을 썼다. 그보다 앞선 2006년 BBC가 실시한 ‘현존 최고의 정치 영웅’을 묻는 조사에서 벤은 1위를 차지했다. 대표적인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의 시민들은 노동자를 지지하고 반전·인권 운동을 주도하며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등 평생을 왼쪽을 향해 걸은 벤을 진정으로 추앙하는 것이다.

좌파를 까닭 없이 증오하거나 값싸게 치부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말을 하고픈 게다. 여기서 질문 하나 더! 대한민국에 우파가 있을까? 좌파가 그런 것처럼, 스스로 우파를 자칭하는 이도 드물다. 좌파를 매도하고 비난하는 이들도 좀체 자신을 우파로 내세우지 않는다. 심지어 극우로 분류되는 쪽의 사람들도 그렇다. ‘우파=정의’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여하튼, 좌파가 반드시 악은 아니며 우파가 꼭 정의가 아니라면, 무엇이 중요한가.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다. 좌파·우파보다 정파·사파를 따지는 지혜가 절실하다. 귀족 가문의 토니 벤이 철두철미 좌파의 길을 걸은 당위와 과정을 좇다 보면 그런 지혜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을 테다. 그럼에도 이렇게 따지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쓴 당신, 좌파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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