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의 디지털 광장] 다극화 세계에 미국·러시아 공감?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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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북과 협정, 한반도 전쟁 억지"
미국의 중국 견제 도와주는 효과도

美 내부 “일극 패권 접고 다자주의로”
다극화 비전에 미러 공감 분위기

윤 대통령 2년 전 ‘담대한 구상’ 발표
실천으로 패러다임 변화 이끌 기회

국제무대에서 한동안 관심 밖이던 한반도 기류가 이른 무더위처럼 뜨거워졌습니다.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칠 변화가 모바일 세상에서도 느껴집니다. 지난 19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24년 만에 북한을 찾아 동맹에 준하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맺은 이후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협정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고, 국가안보실장은 “러시아가 북한에 정밀 무기를 지원하면, 우리도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보낼 수 있다”고 반발했습니다.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론까지 나옵니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군사 지원은 북이 침공당하는 경우로 한정된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습니다. 대북 전단, 대남 오물 풍선, 대북 확성기 방송, 비무장지대 대전차 방벽 등 긴장을 높여가던 터라, 한반도가 급속히 대치 상황으로 내닫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진실에 접근하려면 시야를 한반도 주변 4강(미일중러)까지 넓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 국력을 소모하게 하려던 미국의 애초 목적과 정반대 결과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세계은행(WB)은 2022년 구매력(PPP) 기준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이 유럽 1위, 세계 5위라고 발표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4월 러시아의 올해 GDP 성장률 예상치를 2.6%에서 3.2%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유로 지역 0.7%, 미국 2.4%보다 높습니다.

지난 18일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실린 기고문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위한 외교정책’은 이런 현실을 인정합니다.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 연설비서관이던 벤 로즈는 이 글에서 “미국이 주도하려 했던 규칙 기반 질서는 무너졌고, 달라진 세계에 맞춰 리더십 개념을 업데이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 외교가 보편적 가치에 따라 추진된다는 도덕적 근거는 사라졌고, 달러 패권 무기화는 전 세계에 피로감을 초래했다고 그는 짚었습니다. 벤 로즈가 말하는 ‘달라져야 할 미국의 리더십’은 유일 패권국이 아니라, 다자주의·다극화의 한 축으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달 중국 시진핑 주석과 만난 뒤 다극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보다 보수적이고 기득권을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과 푸틴이 같은 미래상을 그린다는 게 매우 이채롭습니다. 러시아는 중국이 미국 패권을 대체하거나 미국과 양극을 대표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미국도 대중 패권 경쟁에 엄청난 부담을 홀로 계속 지는 것보다는 과거의 적과도 연대하며 ‘우아한 후퇴’를 택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미 vs 중러’라는 기존 냉전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유리한 선거 판세를 위해 결국 북한과의 종전 선언과 수교 협상에 나설 것이란 희망 섞인 분석까지 나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더라도 북한과 종전 선언 직전까지 간 그였던 만큼, 관계 개선 기조엔 변화가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합니다.

푸틴 방북에 대한 중국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우선은 북한에 대한 장악력이 약해지게 되었고, 푸틴이 이번에 연이어 방문한 북한과 베트남이 중국의 태평양 진출로를 접한 곳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중국의 팽창주의를 견제하면서 미국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궁지에 몰린 중국은 북한과 갈등을 고조시켜 온 한국 정부와 9년 만에 외교·국방부 2+2 협의를 재개하면서 남쪽을 통한 활로 모색에 나선 형국입니다.

미국과 궤를 같이하는 일본도 북한에 공을 들입니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4월 미일 정상회담 직후 북한과 정상회담을 위한 협의를 계속 진행하겠다고 말했고, 바이든 대통령도 북일 정상회담을 환영했습니다.

20세기 냉전의 산물인 마지막 분단국가가 평화롭게 교류함으로써 세계를 공동 번영의 시대로 이끌어 가자는 데 반대할 나라는 없습니다. 일극 패권의 국제사회 피로감과 퇴행을 해소할 실질적 기회이기도 합니다.

다극화 세계를 상상하다 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했던 ‘동북아균형자론’이 떠오릅니다. “깜냥도 안 되는데 무슨 균형자냐”던 비판은 아직도 유효할까요? 20년 사이 우리 경제는 세계 10위권, 국방력은 5위권으로 강력해졌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아니 우리 민족에게 정말 소중한 기회가 왔습니다. 남북이 소통해 동아시아로부터 세계를 평화의 길로 인도할 비전은 이미 2년 전 ‘담대한 구상’으로 밝혔습니다. 한국전쟁 74주년과 호국보훈의 달 끄트머리를 지나며 실낱같은 희망 한 줄기 품어 봅니다.

이호진 모바일국장 jiny@busan.com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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