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의 플러그인] 깜깜이 사회
논설위원
예비후보 등록 시작, 내년 총선 서막
그런데도 아직 선거구 등은 미확정
기존 양당 정치권력의 직무유기
국민 참정권·피선거권 농락 당해
12월 임시국회 전망도 오리무중
국가적 역량 훼손 정치권이 조장
문명사회의 특징 중 하나를 들자면 다양한 정보의 공유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은 개인용 기기를 통해 지구촌 곳곳의 생생한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신기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놀랍기도 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는 생산된 정보가 유통되는 현상에만 주로 해당할 뿐이다. 정보를 생산할지 말지, 이어 생산된 정보를 공개할지 등은 여전히 생산자의 의중에 달려 있다. 일반인이 접하는 정보는 결국 가공되거나 통제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단계까지는 절대적으로 생산자가 ‘갑’이다. 정보 생산의 영역에 있고, 생산된 정보를 공유해야 할 주체가 이를 내팽개치면 그다음 단계는 깜깜이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일이 국가 차원에서 벌어진다면 그 나라는 깜깜이 상태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권이 바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 내년 4월 10일 치러지는 국가적 대사인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아예 깜깜이 선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미 12일부터 선거에 나설 예비후보자들의 등록이 시작되면서 4·10 총선은 막이 올랐다. 그동안 정치권 혁신을 바라는 열망이 높았던 만큼 국민의 관심도 매우 높다. 그런데 총선의 서막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거구 획정이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뽑는 방식은 확정된 게 없다. 그저 설왕설래만 가득하다. 헌법 기관으로 4년간 국정 운영을 책임지는 국회의원을 뽑는 국가 중대사가 이렇게 뒤죽박죽이다.
지금 국회를 양분하고 있는 거대 양당이 선거구 획정과 비례대표 선출 방식을 둘러싼 이견 줄이기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거 기득권이 현역 의원들에게 있다 보니, 굳이 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른 안건에는 손톱만 한 이익을 두고도 싸우는 거대 양당이 여기에는 서로 이심전심이다.
정치 신인들은 죽을 맛이다. 한마디로 캄캄한 밤중에 등불도 없이 길을 나서는 것과 같은 꼴이지만, 억울해도 현역 의원들이 규칙을 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무소불위의 기득권을 가진 이런 현역 의원들의 목에 아무도 방울을 달 수 없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정치 신인들은 이로 인해 선거사무소 설치는 물론 얼굴이나 이름이 적힌 홍보 현수막도 내걸 수가 없다. 유권자는 자기 지역에 누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정치의 계절, 유권자의 계절이 왔지만, 모두가 깜깜할 뿐이다.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은 거의 매번 총선 때마다 되풀이된다. 선거 때만 다가오면 여야의 기존 정치권력들은 총선 정국을 깜깜이 상태로 몰아넣는다. 선거일 1년 전까지 국회의원 지역구를 확정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은 있으나 마나다. 여야 정당 어느 데서도 신경 쓰지 않는 유령의 법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는 동안 국민의 참정권과 피선거권은 깜깜이 상태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선거구 문제만 그런 게 아니다. 11일부터 시작된 임시국회 역시 깜깜이 상태를 벗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핵심인 내년도 예산안 처리부터 더불어민주당이 예고한 이른바 ‘대장동 50억 클럽 의혹’과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과 관련한 특검법안, 그리고 김 여사 일가 관련 서울-양평 고속도로 특혜 의혹을 포함한 3건의 국정조사 여부에 따라 이번 정기국회 역시 어디로 흘러갈지 오리무중이다. 안건 자체보다 이를 통한 내년 총선에서의 유불리 여부에만 거대 양당의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에 국민의 생활이 영향을 받는데도, 국민은 정작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국가적인 중대사에 대해 얼마나 깜깜이 상태에서 살고 있는지는 지난 월드엑스포 유치 결과를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잘잘못 여부는 제쳐두고, 프랑스 파리에서 개표 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국민 누구도 참담한 패배를 예상하지 않았다.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부산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선 모두 끝까지 기대를 품었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깜깜이 상태에 있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이러한 집단 깜깜이는 당장 국가적 역량을 갉아먹는다. 국민은 자신감 상실과 실망감, 분노와 같은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 그런데 어디서도 그런 마음을 위로받을 데가 없다. 몇 마디 건네는 말을 진정한 위로라고 하기에는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다. 진정한 위로는 다시는 유사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인데, 지금 그런 일에 앞장서야 할 정치권은 스스로 국민을 깜깜이 상태로 몰아넣고 있으니, 국민은 어디서 마음을 풀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