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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허구한 봄꽃 중에 그 꽃만이 의미 있는 이유
가장 비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림 중 하나인 ‘아이리스’(1889)는 붓꽃을 그린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게티미술관 소장품이 유명하다. 고흐는 고통 가득한 삶에 좌절하지 않고 예술을 향한 마음으로 이겨냈다. 작품에 매긴 숫자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을 알아야 행복이라는 꿀맛을 안다. 고흐는 성공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의 예술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안다.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림 공부를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16살(1869)에는 화상인 큰아버지 추천으로 ‘구필화랑’에 취직했다. 여기서 7년 동안 근무하면서 여러 물의를 일으켜 해고되고,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1879년엔 보조 목사를 하던 중 조울증이 도져 아버지는 정신병원까지 물색하며 고흐를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이후 목사 보조, 노동자의 삶과 광부 생활을 거쳐, 1880년 말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브뤼셀로 돌아온 그는 1881년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또 중간에 그만둔다. 아카데미의 가르침보다 자신만의 창조성을 찾으려 했다. 고흐가 사망한 해가 1890년이니까, 불과 10년 만에 위대한 창조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초기 작품은 어둡고 칙칙했다. 1885년 동생 테오가 주선해 전시했지만 실패했다. 고흐는 영업을 더 잘해 보라고 했지만, 테오는 인상파처럼 밝지 않고 너무 어둡다고 되받아쳤다. 부실한 식사와 과도한 폭음·흡연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1886년 루벤스의 작품을 보고 색채를 연구한다. 특히 네덜란드 안트베르펜 항구에서 일본화 우키요에를 만나면서 이국적인 구도와 색채에 심취해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면서 깊이 연구했다. 1886년에는 파리로 이사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고, 생을 마감하는 계기가 되는 고갱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러나 2년 만에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1888년 요양을 위해 프랑스 남부 아를로 떠난다. 여기서 고갱과 두 달을 함께 작업하다 싸우고 헤어진다. 여러 설이 있지만, 이를 자책해 귀를 잘라 매춘부에게 선물하는 등 기행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 민원이 빗발쳤다고 한다. 고흐는 아를에서 30㎞ 떨어진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고는 1주일 만에 마음을 다잡고 정원에 핀 붓꽃을 그린다. 게티미술관 소장품도 이때 그린 것이다. 테오도 이 작품을 알아보고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이리스’가 지금도 위대한 작품인 것은 예술을 향한 도전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삶과 예술을 알아본 우리가 진정한 삶의 표상일지 모른다. 이 복잡한 세상 오늘만이라도 위안받고 싶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4-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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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1915년 광화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10년 전 1915년, 광화문 광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이 ‘백악춘효’(白岳春曉)(1915)라고 제목도, 풍경도 같은 것 두 점을 그렸을까? 인상파처럼 시간 흐름에 따른 빛을 그린 것은 아닐 것이고. 그해 광화문 광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안중식은 소림 조석진과 고종황제 40주년 기념 ‘어진도사도감’을 주관한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다. 또 최초 미술 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 화사(교수)로 우리 근대 화단 형성에 크게 기여한 화가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러니까 ‘백악춘효’는 그가 식견과 필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인 54세 때 그린 작품이다.
‘백악춘효’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광장과 경복궁, 백악(북악)산을 그린 수묵담채화이다. 두 점을 거의 비슷하게 그렸지만, 근정전과 경회루는 시점이 다르다. 여름에 그린 작품(왼쪽)은 신록이 우거져서 푸르다 못해 검다. 가을에 그린 작품(오른쪽)은 그 빛을 많이 잃었다. 그런데 어딘지 두 점 모두 쓸쓸함이 묻어난다. 지금 광화문 광장과는 전혀 딴 세상이다. 그때도 서울 중심이었기에 인파가 넘쳐났을 것인데 말이다. 그림에는 적막강산이다. 광화문 현판을 놓고 말 많았던 기억으로 현판을 찾아보니, 글자 없이 비었다. 또 이상한 것은 해태상 하나가 사라졌다. 나무 뒤에 숨었는지 보아도 흔적이 없다. 심전은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왜 두 점이나 그렸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1915년 일을 알아야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편에 선 일본은 기세가 등등했다. 그때 우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에는 경술국치를 당해 국적을 잃었다. 이는 일본이 치밀하게 세운 계획을 수행한 결과였고, 1915년 우리를 회유할 야욕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조선 물품을 모아 전시하는 박람회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로, 경복궁에서 열렸다.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열리는 동안 166만 명이나 다녀갔다. 서울 인구가 15만 명도 안 되던 시절에 일어난 엄청난 행사였다. 육조거리가 있던 광화문 광장에는 일본풍 물품이 넘쳐났다. 경복궁에는 박람회장으로 쓸 이상한 건물이 들어섰다.
심전은 한탄했을 것이다. ‘춘효’(春曉)는 당나라 시대 맹호연이 자연의 삶을 노래한 시 제목이다. 양귀비와 환관에 휘둘려 국정이 문란해져 민심이 어지럽던 시대에 지은 노래였다. 이 제목을 가져다 쓴 뜻을 생각하면, 쓸쓸함이 왜 묻어나는지 알 수 있다. 다시 100년 뒤, ‘2025년 봄에 무슨 일로 광화문 광장이 난리였지’라며 궁금해하지 않을까?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4-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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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추상화도 아닌데 묘하게 이해 안 되는 작품
이인성(1912~1950) 작품 ‘해당화’는 제목만큼이나 아름답지만 묘하게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무언가 살짝살짝 어긋나는 것이 친숙하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 세상일이 상식과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리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시절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해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서동진(1900~1970)에게 수채화를 배우다 일본에서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니게 된다. 서동진 후원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1929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출품하면서 ‘천재 작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대표작은 대부분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 관전(官展)에 출품했던 것들이다. 1934년 ‘가을 어느 날’ 특선을 시작으로 35년에는 ‘경주 산곡에서’로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고, 1937년부터 추천작가가 되었다.
관람자 눈에는 평온하고 따스하지만 친숙하지 않은 ‘해당화’는 조선미술전람회가 마지막으로 열린 1944년에 출품한 작품이다. 이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라 일상은 물론이고 미술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시기였지만, 욕심껏 크게 그린 그림은 관람자를 압도해 전람회가 열리는 동안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제작 배경이나 설명이 거의 없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당화’는 어떤 역사나 단일한 사건을 이야기(1944년 입적한 한용운을 기린 것으로 해석한 글도 있다)한 것이 아니라, 공간(캔버스 화면)에 서로 연관성을 찾기 힘든 소재들로 구성돼 있다. 여러 소재가 등장하지만 서로 관계가 애매하다. 이 애매함이 가장 크게 보이는 부분은 등장인물의 관계이다. 엄마와 딸들이라고 하기에는 옷차림이나 행동이 우리 경험과 어긋난다. 셋이 자매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어색하다. 행동도 무엇을 하는지 제각각이다. 이런 애매함을 더 조장하는 것은 화면 분위기이다. 무채색으로 된 먹구름이 짓누르는 화면은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인물은 물론이고 뒤에 있는 염소인지 개인지 모를 동물도 정지되어 있다. 또 땅과 바다 그 사이에 있는 구릉 혹은 바위(?)도 논리적 전개로 볼 수 없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숨겨놓은 우산, 소라, 잡목들, 심지어 해당화와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까지 비합리적이다.
한마디로 ‘해당화’는 풍경화가 아니라 이인성이 인위적으로 구성한 구상화이다. 기묘하게 어긋나 보이는 것을 늘어놓고 보니, 작가 의도가 이런 것인가 할 정도이다. 그는 아쉽게도 38세 나이에 경찰과 시비로 일어난 권총 오발로 사망했다. 전쟁통이던 1950년, 시대적 역사적 상황을 빗대면 인간사 그런 일은 다반사였을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3-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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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봄바람에 구름도 바다도 가만 있지 못하네
1874년 4월 프랑스 파리,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와 살롱전에서 낙선한 작가들의 그림을 본 비평가는 그저 ‘인상’이나 그리는 일당이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하지만 여기 출품했던 이들이 세계 미술의 역사를 뒤바꿀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인상파(Impressionism)에 대해서 그 비평가가 가졌던 몰이해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있는지 모르겠다.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공기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것을 표현한 이래, 다시 또 햇볕 속에 다양한 색이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던 이들이 인상파였다. 이런 인상파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귀국한 고희동(1886~1965)부터이다. 그리고 인상파 이론을 잘 이해하고, 가장 인상파다운 작품을 남긴 작가는 오지호(1905~1982)라고 평가한다.
오지호는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1926년 입학해 인상파를 비롯한 당시 최신 미술 사조를 배우고 1931년 귀국한다. 이후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알았던 김주경(1902~1981) 소개로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1935년부터 재직하며, 송악산 아래 초가에서 1944년까지 살았다. 이 시기 우리나라 최초로 원색판 화집인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1938)을 발간했다. 이 화집에 실린 김주경 작품은 남아있지 않고, 오지호 작품은 ‘시골 소녀’ ‘임금원(林檎園)’ ‘처(妻)의 상(像)’ 세 점만 현재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인상파는 자연 풍경의 변화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인상을 캔버스에 기록하려 했다. 특히 인상파가 실현하려는 목적과 방법에 가장 잘 상응하는 것은 한반도 자연이라고 한 오지호의 주장을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자연은 원근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고 명징하다. 이 맑은 공기를 통과하는 광선은 물체의 내부까지 투과되어 표면색과 합쳐서 찬란하고 투명한 색조를 드러낸다.”
‘항구’(1980)는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그린 것으로 비록 우리나라 항구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공기가 어떻게 사물의 형태를 변화시키는지 볼 수 있다. 항구에 거칠게 휘몰아치는 이른 봄바람에 두꺼운 잿빛 구름도 바다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모습이다. 항구에 묶인 배는 물론이고 다닥다닥 붙은 몇 층짜리 건물도 바람에 춤추는 듯하다. 비약일지 몰라도 지금 우리들 마음에 빗댈 수 있을 듯하다.
얼마 전 모 공공미술관에서 개최한 오지호 특별전시가 끝났고, 2월에 시작한 ‘인상파’ 전시가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상파는 인상을 느낌으로 그린 화파”라는 오해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3-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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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예술도 상부상조해야 살아남는다
홀로·혼자·개성 등등, 이런 말이 최우선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되는 예술도 서로 돕고, 도우려는 행동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현악 4중주’의 서로 다른 소리가 화음을 이루어야 아름답듯이, 한 장에 여러 화가가 그린 ‘합작도’(合作圖)도 조형과 공간이 조화되어야 좋은 그림을 될 수 있다.
동양화에서 합작도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지만 희귀한 것도 아니라서, 기억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세상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해 국권을 잃었던 1900년대 초반 언제인가 그려진 것으로, 길(吉)한 의미를 뜻하는 꽃과 식물, 고동기(古銅器)나 도자기를 소재로 그린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이다. 자신이 그린 기물 옆에 호(號)를 쓰고 낙관을 한 5명이 힘을 합쳐서 그렸기 때문에 합작도라고도 부른다.
오른쪽부터 보면, 괴석과 국화는 안중식(1861~1919)이, 고동기는 김규진(1868~1933), 영지와 대나무는 이도영(1884~1933)이 그렸고, 화분과 난은 김응원(1855~1921)이 그리고 가장 왼쪽은 연꽃과 게, 쏘가리는 조석진(1853~1920)이 그렸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그린 것인지 화제(畫題)도 없고, 작품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안중식이 1919년에 사망한 것을 고려하면 그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당시 장안에서 유명한 예술가들이었고, 사회지도층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이 합작도의 시작과 끝을 맡았다. 그리고 한 가운데는 가장 젊고 안중식의 제자였던 이도영이 담당했다. 당시 사군자 중에서 ‘난’으로는 최고였던 김응원, 이렇게 넷은 1911년에 개설한 ‘서화미술회’에서 동양화를 가르치는 화사(畫師)였다. 고동기를 그린 김규진도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관직에 있었고, 장안에 사진관을 처음 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장안에서 최고의 화가이며 서예가로 꼽혔고, 1915년에 ‘서화연구회’를 개설하여 서화미술회와 쌍벽을 이루는 교육소로 성장시킨 인물이었다.
이 합작도는 어쩌면, 우리의 근대화단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서화협회’를 설립하려는 논의를 시작한 1915년 이후 언젠가 그렸을 것이다. ‘서화협회’는 1918년부터 1936년까지 민간 전람회인 ‘서화협회전람회’를 개최하면서, 1922년에 일제가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에 맞서 우리의 근대화단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중요한 단체였다. 이런 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장안에서 미술교육에 활약하는 화가들이 모인 김에 서로의 뜻을 모으는 어느 때인가 그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1915년에서 19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작은 종이가 만든 좁은 공간이지만, 이 합작도를 보면서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는데 필요한 것은 협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창대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할 수 없다. 다른 소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4중주를 연주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과 상부상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작도를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2-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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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한겨울 삭풍 견딘 '매화꽃'을 쳐다본 의미는?
구멍이 숭숭 뚫린 괴석 뒤에 선 나뭇가지에 한겨울 바람을 견디며 매화꽃 송이가 맺혔다. 봉오리를 활짝 터뜨린 것, 싹을 틔우려는 것, 이제 막 꽃잎을 피우려는 것, 가지각색이지만 삭풍은 함께 견디어 냈다. 높은 혹을 가진 거위가 예리하고 날렵하게 꺾이고 꺾인 가지에 달린 매화나무를 지나며 무심코 고개 들어 꽃을 본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묵화(사군자, 기명절지도 등)는 소재가 가진 깊은 뜻을 새기거나 음미하려고 그린 그림이다. 부연하면 역사 혹은 사건을 기록하거나 자신의 부귀를 알리려 그리는 서양화와 달리, 서화(동양화)는 몸과 마음을 수신(修身)하기 위해 그리거나 감상하며 마음을 다스리려는 것이었다. 이에 빗대어 이 작품을 생각하면 갖은 외압과 부당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고 있는지 눈앞에 핀 매화꽃을 보며 스스로 물어보려는 순간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이 작품은 여기(呂紀, 1439~1505)의 ‘사자머리 거위’(獅頭鵝圖軸)이다.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명대 서화로 ‘경기도박물관’에서 기획한 ‘명경단청: 그림 같은 그림’에 출품된 작품이다. ‘사자머리 거위’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이 그림은 시골에서 보았던 거위와 매화나무를 떠올릴 수 있게 사실적으로 그린 화조도(花鳥圖)이다. 명(明)의 9대 황제인 홍치(1488~1505) 연간에 활동한 여기는 사생파(寫生派)를 대표하는 궁정화가였으며, 화려하고 정교하게 그린 ‘화조도’를 최고로 평가받았다. 이처럼 격 높은 작가가 그저 오동통한 거위를 보라고 그렸을 리 없다. 매화와 사자머리 거위가 주제일 리 없는 것이다.
조선에서 ‘기러기’(거위 조상이 기러기이다)는 노인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그렸고, 중국에서는 거위를 높은 벼슬아치를 상징한다는 소리가 있으니, 이를 종합하면, 거위는 학식이나 지위가 있는 나이 지긋한 선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징인 거위가 지조와 절개를 뜻하는 사군자(四君子) 매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이 한 행동과 생각을 되돌아본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5~6세기)에 활동했던 사혁(謝赫)이 〈고화품록〉(古화品錄)에서 말한 ‘화육법’(畵六法)은 그림을 비평(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그리는 법이기도 하다. 자연과 사물이 가진 외양을 모방해 그대로 옮겨내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정신까지 옮겨야 진정한 서화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림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일은 그림이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고 몸으로 실천하여 수행하는 것까지이다. ‘사자머리 거위’를 다시 해석하면, 거위가 매화를 쳐다본 뜻은 높은 도덕과 절제심을 갖추기 위해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스스로에 대한 다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2-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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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고통 마주하려 극혐하는 뱀 그린 20대 천경자
‘푸른 뱀’의 해(을사년)가 밝은지 며칠 지났지만, 기대보다 불안의 소리가 크다. 희망을 말하는 이들이 사라졌다. 기대와 희망보다는 고통과 시련에 과감히 마주해야 한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20대의 천경자(1924~2015)는 뱀 수십 마리를 일부러 그렸다. 스스로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서다. 그녀 삶의 태도에서 지혜를 엿보게 된다.
천경자는 ‘여자미술전문학교’(일본 도쿄)에서 일본화를 배우고 귀국하던 중에 도움받은 명문대 중퇴생과 1944년에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았다. 1948년에는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해 형편이 좋아지나 했지만, 장결핵을 앓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생계를 위해 핏덩이 아이 둘을 키우며 광주와 목포에서 교사로서의 일과 그림 그리기를 같이했다.
그러다 목포 전시회에서 유쾌하고 활달한 남자를 만난다. 이게 새로운 불행의 시작이다. 깊은 사랑이 긴 기다림으로 된 이유는 그가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195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나라의 존망이 위기에 있었고, 사랑하던 동생은 결핵으로 1951년에 세상을 떠난다. 약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죄책감은 그녀에게 가장 큰 고통과 시련이었다.
1951년 어느 날, 아픔과 고통을 마비시킬 정도로 무서운 것을 찾다 광주역 앞에서 뱀을 파는 것을 기억했다. 천경자는 그 뒤로 매일 드나들며 뱀을 관찰하고 스케치한다. 고통을 잊기 위해 몸서리치도록 징그러운 뱀을 마주하며 그리고 또 그렸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생태’(1951)이다. 날카로운 삼각형 머리를 들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푸른 뱀, 알록달록 꽃무늬로 치장한 뱀, 두 마리가 서로 엉켜 교미하는 듯한 모습으로 고통과 시련을 담아냈다. 정면을 주시하는 뱀의 머리에서 서늘함을 볼 수 있다.
지루한 휴전회담이 지속되던 1953년 3월, 천경자는 임시수도인 부산에 개인전을 열기 위해 온다. 먼저 ‘대한미협전’(부산 칠성다방에서 개최)에 ‘생태’와 ‘닭’ 등을 출품했는데, ‘생태’는 징그럽다는 이유로 주방 바닥 한 귀퉁이로 밀려났다. 이 그림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안 시인 공초 이상순이 동네방네 소문내는 바람에 손님이 몰려들었다. 이어진 남포동 ‘국제구락부’(현주소는 중구 남포길34)의 개인전에는 아예 다방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사람들은 ‘생태’라는 그림의 의미를 구구절절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챘다. ‘고통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작품은 천경자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된다.
진짜 예술가는 고통과 시련을 회피하지 않는다. 70여 년 전 가녀린 몸으로 온 세상을 마주했던 20대에 이름없는 화가 천경자의 자세를 오늘 다시 새겨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1-08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