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허구한 봄꽃 중에 그 꽃만이 의미 있는 이유
가장 비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림 중 하나인 ‘아이리스’(1889)는 붓꽃을 그린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게티미술관 소장품이 유명하다. 고흐는 고통 가득한 삶에 좌절하지 않고 예술을 향한 마음으로 이겨냈다. 작품에 매긴 숫자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을 알아야 행복이라는 꿀맛을 안다. 고흐는 성공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의 예술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안다.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림 공부를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16살(1869)에는 화상인 큰아버지 추천으로 ‘구필화랑’에 취직했다. 여기서 7년 동안 근무하면서 여러 물의를 일으켜 해고되고,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1879년엔 보조 목사를 하던 중 조울증이 도져 아버지는 정신병원까지 물색하며 고흐를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이후 목사 보조, 노동자의 삶과 광부 생활을 거쳐, 1880년 말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브뤼셀로 돌아온 그는 1881년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또 중간에 그만둔다. 아카데미의 가르침보다 자신만의 창조성을 찾으려 했다. 고흐가 사망한 해가 1890년이니까, 불과 10년 만에 위대한 창조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초기 작품은 어둡고 칙칙했다. 1885년 동생 테오가 주선해 전시했지만 실패했다. 고흐는 영업을 더 잘해 보라고 했지만, 테오는 인상파처럼 밝지 않고 너무 어둡다고 되받아쳤다. 부실한 식사와 과도한 폭음·흡연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1886년 루벤스의 작품을 보고 색채를 연구한다. 특히 네덜란드 안트베르펜 항구에서 일본화 우키요에를 만나면서 이국적인 구도와 색채에 심취해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면서 깊이 연구했다. 1886년에는 파리로 이사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고, 생을 마감하는 계기가 되는 고갱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러나 2년 만에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1888년 요양을 위해 프랑스 남부 아를로 떠난다. 여기서 고갱과 두 달을 함께 작업하다 싸우고 헤어진다. 여러 설이 있지만, 이를 자책해 귀를 잘라 매춘부에게 선물하는 등 기행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 민원이 빗발쳤다고 한다. 고흐는 아를에서 30㎞ 떨어진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고는 1주일 만에 마음을 다잡고 정원에 핀 붓꽃을 그린다. 게티미술관 소장품도 이때 그린 것이다. 테오도 이 작품을 알아보고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이리스’가 지금도 위대한 작품인 것은 예술을 향한 도전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삶과 예술을 알아본 우리가 진정한 삶의 표상일지 모른다. 이 복잡한 세상 오늘만이라도 위안받고 싶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