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동양화는 왜 역사성을 되찾는 의무를 짊어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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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아래에서(柳下), 1980.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소장 버드나무 아래에서(柳下), 1980.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소장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기온과 습기, 전에 겪지 못한 기상현상이 일어나는 한여름이다. 어디 잠시라도 피할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박노수의 ‘버드나무 아래에서’를 들여다본다. 시리도록 푸른 청색 잎을 늘어트린 버드나무 가지가 우리 눈 앞을 가리고 그 여백 사이에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멀리 옅은 노랑을 띤 달을 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남정 박노수(1927~2013)는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나 1945년 청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림에 뜻을 두고 상경해 이상범에게 사사했다. 해방되고 서울대 미술학부가 생기자 첫 입학생으로 1946년 입학해 김용준, 노수현, 장우성에게 배운다. 1949년 제1회 국전에 입선을 시작으로, 2회 국무총리상, 3회 특선, 4회에 동양화로는 처음 대통령상을 받아 기성 화단에 진입하게 된다.

그의 독특한 이력 하나는 1회부터 1981년 30회로 국전이 끝날 때까지 참가한 것이다. 대통령상을 받은 이듬해 이화여대 교수가 되고 또 이듬해에 추천작가가 된 이유도 있겠지만, 그 말 많고 탈 많은 국전에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것은 남들 눈과 평가보다는 자신의 예술을 담담히 실천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해방 이후 일제 잔재를 벗어나 민족미술을 수립해야 한다는 당면한 구호나 유구하고 거창한 동양화론과 화법을 추종하려는 노력은 찾기 힘들다. 1950년대에 여성 인물상을 소재로 하거나, 1960년대 중반까지 옛 선인들 시를 화제로 쓰거나 혹은 산수를 해체해 시대적 변화에 따라 조형성을 강조한 정도가 형태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1960년대 중엽부터는 오롯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그 계기는 1965년 1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 작가들이 석채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알고부터이다. 돌가루 물감인 석채 사용이 당시에 일제 잔재로 터부시되던 시절임에도 과감히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부터 중심 소재는 한지 흰색으로 두고 그 외에는 화려한 색으로 채색해 소재를 도드라지게 했다. 또 근경을 최대한 크고 가깝게 그려 강조하면서 공간 깊이를 창조하는 형식도 이즈음에 등장한다.

검은 먹선이 동양화에서는 중요한 조형 요소이기에 깊이 연구해 색과 조화되도록 사용하려 노력했다. 이런 요소를 담은 그의 작품은 노쇠한 느낌이 아니라 시각적 참신함과 마음의 여운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해방 이후 동양화는 일제의 청산과 민족의 전통을 찾으려 노력했다. 동양화가 아니라 한국화로 바꾸려는 운동도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은 동양화 아니 한국화의 세계는 어둡기만 하다. 현대미술 혹은 현대성 성격을 추구하지 못한 이유로 효력이 사라진 것일까?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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