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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브루크너 9번, 느리고 깊은 곳으로
올해는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가 태어난 지 꼭 200년 되는 해이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빈 필하모닉은 1월 1일 신년 음악회에서 이례적으로 브루크너의 곡을 연주했고, 2020년부터 시작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녹음도 마무리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2월에 부천 필하모닉이 교향곡 6번을 연주한 것을 시작으로 KBS교향악단, 서울시향, 대구시향, 광주시향 등이 모두 브루크너 교향곡을 레퍼토리에 넣었다. 부산시향도 10월 1일에 홍석원의 지휘로 교향곡 4번을 연주했다. 11월에 내한하는 사이먼 래틀 지휘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도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가지고 온다.
브루크너는 모든 면에서 느리고 늦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린츠의 성 플로리안 수도원에서 연주했고 인생 중반까지 수도사 같은 삶을 살았다. 그가 빈으로 나와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한 것은 나이 43세나 되어서였다. 그러나 발표하는 곡마다 혹평이 따랐다. 흔히 음악에는 주제 선율이 있는데, 브루크너의 음악은 뚜렷한 선율 대신 복잡한 음향과 화성의 연속이다. 게다가 길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어렵고 지루하다”라는 것이다. 음악계는 그를 시골뜨기 취급했고, 빈 필하모닉이 연주를 거부한 적도 있다. 그가 청중의 인정을 받은 것은 나이 60세가 넘어 교향곡 7번을 발표할 때쯤이었다.
브루크너는 1896년 10월 11일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총 11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앞의 두 곡은 스스로 습작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해서 번호를 매기지 않았고, 번호로는 9번 교향곡까지 작곡했다. 그나마 마지막 곡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작곡 중에 두 가지 말을 남겼다. 하나는 “이 작품은 사랑하는 신에게 바친다(Dem lieben Gott)”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혹시나 내가 마지막 악장을 완성하지 못하면, 3악장 뒤에 나의 ‘테 데움’을 이어 연주하라”라는 것이었다. 마치 이 곡을 완성하지 못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결국 4악장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오늘 세상을 떠났다. 신기하게도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교향곡과 같은 D단조로 되어 있다.
마지막 교향곡의 3악장 아다지오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상승으로 시작한다. ‘느리고 장중하게(Langsam, feierlich)’라는 지시어처럼, 곡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로 천천히 천천히 흘러간다. 그는 이 악장을 ‘인생에 대한 작별 인사’라고 표현했다. 브루크너를 특별히 사랑하던 카라얀 지휘로 1978년 빈 무지크페라인에서의 영상을 다시 본다.
2024-10-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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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아랑훼즈' 2악장
이제나저제나 바뀔까 하던 날씨가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다. 며칠 전까지 에어컨 없이 잠들기 힘들었는데, 이젠 이불 한 장은 덮어야 할 것 같다. 날씨가 달라지니 더위 때문에 미뤄뒀던 여행 욕구가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자는 여행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과 ‘여기’를 떠나서 익명이 보장되는 어딘가로 이동하면 훨씬 겸손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거리를 두고 보면 그토록 심란하던 일도, 복잡하던 사건도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법이다.
듣고 있으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음악이 있다. 아무런 가사도 없지만, 왠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이름 없는 도시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음악. 내게 있어선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2악장이 그런 음악이다. 이 곡은 스페인의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의 출세작이자 명실상부한 기타 협주곡 역사상 최고의 히트곡이다. 특히 1악장과 3악장 사이에 있는 느린 2악장은 ‘20세기 최고의 멜로디’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유명하다.
로드리고는 세 살 때 디프테리아에 걸려 후유증으로 시력을 잃게 되었다. 앞이 안 보이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음악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터키 출신의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카미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자 했지만, 카미의 부모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부모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앞을 못 보는 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음악가라니….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 확고했고 결국 카미의 부모도 손을 들게 했다.
결혼한 후에 로드리고는 장학금을 받게 되어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고, 카미는 첫아들을 임신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이는 유산되었고, 두 사람은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부부가 선택한 여행지는 스페인의 옛 왕궁이 있는 아랑훼즈였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경주나 부여 같은 곳이다. 카미는 앞이 보이지 않는 로드리고의 눈이 되어서 옛 왕궁의 화려한 풍경을 설명해 주었다. 로드리고는 카미의 손을 잡고 벽을 더듬어가며 마음에 담아놓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부인에 대한 사랑과 상상으로 떠올린 왕궁의 이미지를 엮어 만든 곡이 바로 ‘아랑훼즈 협주곡’이다. 1940년에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사인스 데 라 마사가 초연했다. 이듬해 첫딸 세실리아가 태어났고,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안달루시아 협주곡’ 등을 발표하며 로드리고는 유럽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두 사람은 정말 오래도록 정답게 살았다. 부인 카미는 1997년 92세, 로드리고는 1999년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2024-09-26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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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위대한 연인, 클라라의녹턴
작곡가들 사이엔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있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베토벤과 ‘불멸의 연인’, 쇼팽과 조르주 상드, 말러와 알마, 드뷔시와 엠마 바르다크 등 저마다의 열정과 스캔들로 음악사를 흥미롭게 만들어 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랑의 테마는 아마도 슈만, 클라라, 브람스를 둘러싼 이야기일 것이다.
클라라 슈만(1819~1896)은 1819년 9월 13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훗날 남편이 되는 로베르트 슈만보다는 아홉 살이 적다. 슈만(이하 로베르트 슈만)이 음악을 배우기 위해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찾아갔을 때 슈만은 스무 살 청년이었고 비크의 딸 클라라는 꼬마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때였다. 그 후 클라라의 성장은 눈부셨다. 파가니니와 리스트마저도 클라라의 연주에 찬사를 보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애지중지 길러온 천재적인 딸을 가난한 음악가에게 보내기 싫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자식을 이길 수 있는 부모는 흔치 않은 법이다. 결국 슈만과 클라라는 아버지와 법정 소송까지 해서 1840년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잘 알려진 대로 슈만은 1854년 라인강에 뛰어들었다.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나오지 못한 채 2년 후에 세상을 떠났고, 의리인지, 존경인지, 사랑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혼자된 클라라의 곁을 항상 브람스가 지켰다. 클라라는 아이들을 보살피며 틈틈이 작곡과 연주회를 이어갔다. 슈만과의 결혼 생활은 총 16년이었다. 클라라는 그 기간에 계속되는 임신, 출산, 육아를 고스란히 감당했고 남편의 우울증까지 보살펴 가면서 슈만 작품의 편곡, 초연, 출판을 맡았다.
그녀는 189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질 때까지 60여 년간 무려 1300여 회 음악회를 열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이나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처럼 재능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사라진 여성 연주자들에 비하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점은 무척 아쉽다. 그나마 오늘 소개하는 녹턴 작품6-2번 같은 곡이 남아 있어 그녀의 천재성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 곡은 1836년 출판된 ‘6개의 피아노 소품집’에 수록된 곡이다. 작곡 시점은 그보다 1, 2년 전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불과 15~16세 때 만든 작품인데, 그 서정적인 기품이 놀랍다. 이즈음에 클라라의 눈에 비친 슈만은 아저씨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오빠로 변했고, 슈만 역시 어린애가 아니라 여인으로 클라라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였다. 그 들뜬 마음이 음악 속에 이렇게나 오롯이 스며 있다.
2024-09-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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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달빛에 묻어나는 장미꽃 향기
여름에 덥다고 투덜거리면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처서는 지나야 해.” 살아온 경험치로 미루어 보건대, 아마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머잖아 바람이 불 것이고, 들녘의 색깔이 변할 것이며, 장롱 속에 넣어둔 긴소매 옷을 주섬주섬 입게 될 것이고, 마침내 겨울이 오고 한 해가 저물 것이다. 내년에도 여름은 또 오겠지만, 다시 오는 여름은 올해의 여름과 다르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짧은 여름의 기억을 붙잡아 두고 싶어서 이 음악을 골랐다.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의 연가곡 〈여름밤〉에 나오는 ‘장미의 정령’이다. 베를리오즈가 시인이자 친구이기도 한 테오필 고티에의 시집 〈죽음의 연극〉에서 6편의 시를 가사로 뽑아 곡을 붙인 것이다. 원래 피아노 반주로 된 노래였으나 곡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자 관현악 반주 버전을 다시 만들었는데, 이 작품이 관현악 반주로 발표된 최초의 연가곡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프랑스 예술가곡에 약한 편이라 무대에서 들을 기회가 적은 곡이지만 숨어 있는 명곡이라 할 수 있다.
작품 구성을 보자면 1곡은 ‘빌라넬라’ 즉 목가(牧歌)다. 2곡은 ‘장미의 정령’, 3곡 ‘호수에서’, 4곡 ‘부재’. 5곡 ‘묘지에서-달빛’, 6곡 ‘미지의 섬’으로 이어진다. 특히 사랑받는 곡은 2곡 ‘장미의 정령’이다.
어떤 소녀가 무도회에 가면서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드레스에 꽂았다. 소녀가 무도회를 마치고 돌아와서 잠이 들자 낮에 꺾은 장미의 정령이 나타나서 얘기한다.
“... 오, 그대, 나를 꺾어버린 사람아, 그대는 나를 버리지 못할지니, 매일 밤 장미의 정령이 그대 베개 곁에서 춤을 출 것이에요. 그러나 두려워 말아요. 나는 미사도 애도가도 요구하지 않아요. 이 오묘한 향기는 나의 영혼, 나는 천국에서 온 것이므로….”
얼마나 몽환적인 노래인가. 한여름 밤의 꽃향기가 달빛에 묻어나는 듯하다.
당시 베를리오즈는 연극배우 해리엇 스미스슨과 결혼해서 살던 때였다.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따라다니며 얻어낸 결혼 생활이지만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리엇은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베를리오즈는 또 다른 여인, 소프라노 마리 레치오에게 빠졌다. ‘여름밤’은 이즈음에 작곡한 사랑 노래이며, 대상은 새로운 연인 마리 레치오인 듯하다. 곡이 출판되고 1년 후쯤에 베를리오즈는 해리엇과 공식적인 별거에 들어갔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레치오와 결혼했다. 사랑의 계절은 그렇게 지나간다. 한 시절의 여름이 지나고 다른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2024-08-15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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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위대한 광대, 카루소를 기리며
흔히 천재적인 테너가 새로 등장할 때면, ‘파바로티의 환생’이라는 식으로 칭찬하곤 한다. 그러나 파바로티 이전의 테너에게 최고의 찬사는 ‘카루소의 환생’이라는 표현이었다. 그만큼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란 이름은 20세기 성악의 대명사였다.
이탈리아 나폴리 빈민가에서 일곱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난 카루소는 열 살이 되던 해부터 공장에 나가서 막일하며 밥벌이했다. 저녁 시간을 틈타서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895년 나폴리에서 데뷔한 후 급성장해 1903년부터 미국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올라 1920년 마지막 공연을 할 때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특히 오페라 ‘팔리아치’에서 광대 옷을 입고 ‘의상을 입어라’를 부르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사람들은 그를 ‘영원한 광대’ 또는 ‘위대한 광대’라고 불렀다.
카루소가 뮌헨 국립극장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을 공연할 때 일이다. 갑자기 무대장치가 쓰러지면서 카루소의 머리를 때렸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어서 공연은 계속되었는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극장장에게 한 직원이 다가와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극장장님, 만약 카루소가 불구의 몸이 되었다면, 차라리 때려죽여 버리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그 종신 연금을 우리가 어떻게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웃자고 한 말이겠지만 그만큼 카루소의 인기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와 계약하려면 일단 백지수표를 들고 가는 게 기본이었다는 말도 있다.
카루소는 초기 레코드 산업의 주인공이었다. 1902년 뉴욕 그라모폰 녹음실에서 ‘의상을 입어라’를 녹음했는데, 이 음반은 세계 최초의 밀리언셀러 음반이 되었고, 그로 인해 음반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사는 동안 약 250개의 음반을 남긴 카루소는 1921년 8월 2일, 48세라는 한창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 세상을 떠난 카루소를 생각하며 이탈리아 작곡가 루치오 달라가 지은 칸초네 ‘카루소’를 듣는다. 달라는 카루소가 말년에 투병하면서 머무르던 나폴리의 호텔에 묵으면서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비롯하여 안드레아 보첼리, 셀린 디옹, 라라 파비앙, 안나 옥사 등 많은 가수가 녹음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파바로티 버전이다. 누구보다 화려하던 사랑과 영광의 세월을 반추하면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같은 곡이다.
“불빛 반짝이는 밤바다, 바람은 몰아치고, 소렌토가 보이는 낡은 테라스에서, 한 남자가 여인을 껴안고 흐느끼네…. 당신을 정말 사랑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내겐 이 사랑이 사슬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내 혈관 속 피를 녹여내는 사슬….”
음악평론가
2024-08-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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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쇼스타코비치,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으로 번졌다. 1941년 6월 22일부터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해 9월부터 시작해서 총 871일 동안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채 모든 음식과 연료 공급을 차단했다. 10만 회가 넘는 공중 폭격을 했고, 15만 발의 포탄을 레닌그라드에 쏟아부었다. 폭격과 추위와 굶주림으로 100만여 명의 러시아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러시아군은 쥐를 잡아먹어 가면서까지 악착같이 버텼다.
쇼스타코비치(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06~1975)는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군에 자원했다. 근시가 너무 심해서 일반 군인으로는 복무할 수 없었기에 시민군에 들어가서 소방수로 일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지켜보면서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1942년 2월에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가 초연했으며, 10월엔 전투 중인 레닌그라드에서도 연주되었다. 초연 후에 이 작품은 나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곡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고, 쇼스타코비치는 일약 국가 영웅이 되었다.
7번 교향곡의 악보는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서방 세계에 전달되었다. 1942년 6월 22일에 영국 런던에서 초연했고, 마침내 7월 19일에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NBC심포니가 미국 초연을 했다. 공연은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었고, 이튿날 ‘타임’지는 소방수 모자를 쓰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표지에 게재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악명 높은 ‘즈다노프 선언’이 발표되면서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를 좀먹은 ‘최악의 형식주의자’로 몰려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때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두려움에 떨며 지내야 했다. 매일 밤 중앙위원회에서 보낸 요원들이 그를 감시했고 호시탐탐 끌고 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3년 스탈린이 죽었고, 다행히 쇼스타코비치는 죽음의 길에서 생환할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7번 교향곡의 네 개 악장이 각각 ‘전쟁’ ‘추억’ ‘광활한 조국’ ‘승리’를 상징한다고 했다. 긴박한 1악장은 “우리를 위해 죽은 영웅들을 위한 레퀴엠”이라고 설명했다. 2악장은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간주곡”이며, 길고 느린 3악장은 “다가올 승리의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행진곡풍의 4악장은 최후의 승리를 상징한다.
음악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과 참상을 고발하던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의 러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도 여전히 어지러운 우크라이나의 전쟁 소식을 마주하며,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4악장-hr심포니, 클라우스 매켈라(지휘).
2024-07-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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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엘레지, 슬픈 노래의 힘
초등학교 시절, 당시에는 ‘전축’이라 부르던 물건이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가족을 모아 놓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레코드를 올렸다. 몇 장 안 되는 레코드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이미자의 음반이었고, 표지에는 ‘엘리지의 여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처연한 노랫가락이 아버지의 담배 연기 사이로 번져 나오던 풍경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엘레지’는 그리스어의 ‘엘레게이아’에서 유래된 말로 비가(悲歌), 애가(哀歌)로 번역된다. 죽은 이를 기리는 내용이 많았고, 죽음만큼이나 슬픈 이별과 아픔에 대해서도 엘레지라는 제목으로 시가를 만들었다. 문학에는 괴테 〈로마 엘레지〉, 셸리 〈아도니스〉, 릴케 〈두이노의 비가〉 등이 유명하고, 비슷한 정서를 지닌 음악에도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 마스네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포레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비외탕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등 수없이 많은 엘레지가 남아 있다.
7월 6일은 러시아의 작곡가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 1861~1906)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엘레지 한 곡을 듣는다. 아렌스키는 9세 때부터 가곡과 피아노 소품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21세 되던 1882년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곧바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임용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라흐마니노프와 스크랴빈이 모두 아렌스키에게 작곡을 배운 적 있다. 그러나 술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쳐 45세 한창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100곡이 넘는 피아노곡을 포함해 무려 250곡에 이르는 작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렌스키의 음악은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피아노 3중주 1번 작품32만은 자주 무대에 오른다. 1894년 발표한 이 곡은 세상을 떠난 첼리스트이며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을 지낸 카를 다비도프를 추억하며 쓴 곡이다.
이 시기에 비슷한 정서의 곡이 많이 눈에 띈다. 선배인 차이콥스키는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죽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라는 부제를 붙여 피아노 3중주 A단조를 썼고, 후배인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의 죽음을 애도하며 피아노 3중주 2번을 썼다. 그래서 시기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이어주는 연결점과 같은 곡이다. 특히 ‘엘레지’라 이름 붙은 3악장 아다지오가 유명하다. 지난날에 대한 회상과 한숨과 애도의 감정이 심금을 울린다.
2024-07-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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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인테르메조, 연결과 전환의 테크닉
달력을 보다가 새삼스레 놀랐다. 아!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버렸구나. 이제 장마와 불볕더위와 씨름하다 보면 금방 여름이 지나갈 것이고, 찬바람이 부는 듯하면 어느새 한 해가 저물 것이다. 시간이란 항상 야속하게 흘러가는 법, 이쯤에서 올 한 해 세웠던 계획을 중간 점검하면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음악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장치가 있다. 인테르메조(intermezzo)라는 음악 용어다. 우리말로는 간주곡(間奏曲)이라 한다. 오페라나 드라마에서 쓰는 막간 음악으로, 곡의 중간에 이야기를 전환하고 청중의 감정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곡이다.
음악사에는 꼭 들어봐야 할 간주곡이 많다. 슈베르트 ‘로자문데’ 간주곡, 비제 ‘카르멘’ 간주곡, 그라나도스 ‘고예스카스’ 간주곡 등이 모두 명곡이다. 그러나 모든 간주곡 중에서 딱 한 곡을 고르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곡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고르겠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1890년 로마에서 초연한 단막 오페라다. 1887년 손초뇨 출판사가 주최한 창작 오페라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라는 말은 ‘시골 기사’를 의미하는데, 우리 식으로 하자면 ‘향토 예비군’ 정도 되겠다. 제대하고 돌아온 청년 투리두는 옛 애인 롤라를 잊지 못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피오의 아내가 되어 있다. 자괴감과 질투로 괴로워하던 투리두는 결국 알피오와 결투를 벌이다가 허무하게 죽는다는 내용이다.
무척 간단한 스토리지만, 이 오페라에는 어떤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평범한 서민들이 겪는 질투와 분노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해 놓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베리스모’(사실주의)의 시작을 알렸다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진 평범하다 못해 지질한 본성, 성급한 분노, 후회 등의 감정을 미화하거나 승화시키지 않고 드러낸다. 그러나 이 현실적인 막장 드라마를 너무나 멋진 아리아, 합창, 간주곡으로 수놓았다.
마치 폭풍전야의 풍경처럼 드라마틱한 간주곡은 영화나 CF에서 배경음악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성난 황소’의 오프닝신,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 ‘대부3’의 라스트신 등에서 이 곡이 흘러나왔다. 시간의 흐름에 부대낄 때, 시간의 흔적을 더듬고 싶을 때, 이 곡만큼 배경음악으로 어울리는 곡도 찾기 힘들 것이다. 지나간 시간이 밀물처럼 들이치는 곡이다.
2024-06-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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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봄 바다에서 듣는 차이콥스키의 '뱃노래'
친구와 함께 기장의 포구로 놀러 나갔다. 바다는 잔잔했다. 바다의 풍경 속에는 배가 있어야 한다. 아련히 멀리 있어 유람선인지 고기잡이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배가 한두 척 떠 있어 줘야 바다의 공식이 완성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배에 탄 어부든 손님이든 누군가는 모종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곁들인다. 그 상상을 입력하여 만든 노래나 기악곡을 우리는 ‘뱃노래(Barcarolle)’라고 부른다.
뱃노래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어업 노동요로서의 뱃노래다. “어기 여차~” 하면서 노를 젓거나 그물을 당기고 고기를 잡는 풍경을 묘사한 노래다. 경기 민요인 ‘자진 뱃노래’, 조두남 작곡의 가곡 ‘뱃노래’, 러시아 민요 ‘볼가강의 뱃노래’ 같은 곡이다.
둘째는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띄워 놓고 즐기는 정취를 담은 음악이다. 우리나라의 ‘진도 아리랑’에 나오는 것처럼, “만경창파(萬頃蒼波)에 두둥둥 배 띄워 놓고,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놀다 가세”라는 생각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꿈꾸는 최고의 휴식이다. 서양 음악에서의 뱃노래도 주로 이런 마음을 담고 있다.
대표적으로 ‘베네치아의 뱃노래’가 있다. 마치 곤돌라를 저어가는 것처럼 여유 있는 템포와 단조롭게 흔들리는 듯한 ‘강약약’의 리듬으로 편안한 정서를 표현한다.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중에 나오는 뱃노래와 베르디 ‘가면무도회’의 뱃노래 장면 등이 있다. 기악에선 멘델스존이 ‘무언가’에 삽입한 3개의 뱃노래가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포레, 알캉, 발라키레프, 글라주노프 등이 피아노곡으로 뱃노래를 썼다.
오늘 기장 해변에서 들은 곡은 차이콥스키의 뱃노래다. 1876년,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있던 차이콥스키는 〈누벨리스트〉라는 음악 월간지에 짧은 피아노곡을 연재하게 되었다. 잡지에는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어울리는 짧은 시도 곁들여 수록하기로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사계(seasons)’인데, 비발디의 작품과는 달리 네 계절이 아니라 열두 달을 다루고 있다. 모든 곡이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6월 ‘뱃노래’와 10월 ‘가을의 노래’가 유명하다.
“해변으로 나가자, 거긴 파도가 우리의 다리에 입 맞추리라. 비밀스러운 슬픔을 담아, 별들이 우리를 비춰 주리니.” 알렉세이 플레세예프의 시와 차이콥스키의 서정적인 멜로디를 같이 음미할 수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회색 풍경마저도 일순간 푸른 바다로 바꿔 버리는 마법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2024-06-0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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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5월의 꿈, 시인의 사랑
5월이 되면 반드시 듣게 되는 음악이 있다. 일단 팝송 중에서 추억의 그룹 비지스가 부른 ‘5월 1일(First of May)’을 들어야 한다. 그건 5월을 맞이하는 개인적인 회고 의식과도 같다. 비지스를 듣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슈만(R.Schumann, 1810~1856)으로 간다. 그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 48)을 벗어날 수 없다. 테너 프리츠 분덜리히의 음반을 다시 꺼내 든다. 첫 곡,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에’가 울려 퍼지면, 그제야 봄이 왔음을 제대로 인지하게 된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에, 온갖 꽃봉오리가 피어날 때
그때 내 가슴 속에도, 사랑이 움터 올랐지.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 온갖 새들 노래할 때
그때 나 그녀에게 고백했네, 내 그리움, 내 갈망을.
가사는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곡을 만든 1840년에 슈만은 우여곡절 끝에 클라라와 결혼하게 되는데, 그 한 해 동안 무려 169곡의 가곡을 썼다. 〈시인의 사랑〉 외에도 〈미르테의 꽃〉 〈여인의 사랑과 생애〉처럼 독일 가곡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들을 쏟아냈다.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 슈만은 이렇게 썼다. “나는 가곡을 작곡할 때 늘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당신 같은 여인이 없었다면 절대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스치는 장미꽃도 예사롭지 않고, 지나가는 새도 내 사정을 묻는 듯하다. 〈시인의 사랑〉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모든 감정, 그리움과 기쁨에서 시작하여 이별의 감지, 탄식, 질투, 자조, 절망, 회상으로 진행되는 사랑의 여정을 노래로 수놓았다.
제1곡 ‘놀랍도록 아름다운 5월에’에선 설레는 가슴으로 사랑의 시작을 얘기한다. 그 설렘은 이내 고독이 된다. 제6곡 ‘거룩한 라인강에서’부터는 이별의 불안감이 느껴진다. ‘나는 울지 않으리’라고 중얼거려보지만, 슬픔만 깊어진다. ‘꽃이라도 이 마음을 안다면’ 거기에 대고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제10곡 사랑하던 사람이 부르던 ‘그 노래가 들려오면’ 심장이 미어지는 듯하다.
제12곡 ‘맑게 갠 여름 아침에’ 다시 옛 생각을 한다. 자는 중에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내가 울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16곡 ‘옛날의 쓰라린 노래’에서 ‘하이델베르크의 술통’보다도 더 큰 관을 짜서 거기에 추억을 묻어야겠다고 말하며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무려 2분에 걸친 피아노의 후주가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연가곡이 끝난다. 더불어 봄날의 짧은 사랑 이야기도 끝난다.
2024-05-2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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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어버이날과 어린이날이 교차하는 5월이다. 아기들은 옹알이를 거쳐서 단어를 구사하게 되는데, 가장 처음 입을 떼는 말은 아마도 ‘엄마’라는 단어이다. 인간이 노래를 만들게 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주제도 어머니였다. 그래서 수많은 사모곡(思母曲)이 생겨났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드보르자크가 1880년에 만든 가곡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Songs my mother taught me)’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노래로 작곡한 것이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 독주로 들어도 좋다. 앞 소절만 들어도 이미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진하고 아름답다.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평론가이던 해럴드 숀버그는 드보르자크를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를 통틀어 가장 행복하고 가장 덜 강박적인 사람”이라 평했다. 그 말은 일리가 있다. 체코 시골의 푸줏간 집 아들이던 드보르자크의 삶은 전형적인 성공기처럼 보인다. 베토벤이나 슈만처럼 고통스러운 질병도 없었고, 바흐나 슈베르트처럼 그 시대에 인정받지 못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모차르트나 멘델스존처럼 요절하지도 않았다. 신앙심이 깊고 가정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서 드뷔시나 바그너처럼 드라마틱한 연애도 하지 않았다. 한 발씩, 확고하게 명성을 다져 나갔다.
그러나 드보르자크라고 인생의 한구석에 왜 시련이 없겠는가? 그가 한참 자리를 잡아가던 1877년, 새로 태어난 딸이 이틀 만에 사망했고, 이어 한 살짜리 딸과 세 살 된 아들이 차례로 죽었다. 이건 시련이 아니라 운명의 저주라고 해야 할 만큼 참담한 일이었다. 망연자실한 드보르자크는 비통한 심정으로 ‘스타바트 마테르(라틴어 Stabat Mater, 슬픔의 성모)’를 작곡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쳐다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던 어머니의 마음을 음악으로 나타낸 곡이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880년, 오스트리아의 테너 구스타프 발터가 자신의 독주회에서 발표할 새로운 성악곡을 요청했다. 드보르자크는 체코의 시인 아돌프 헤이두크가 쓴 시집에서 7개의 시를 발췌해 〈피아노와 목소리를 위한 7개의 집시 노래〉 작품55를 완성했다. 오늘 듣는 곡은 이 가곡집에 4번째로 나오는 곡이자 가장 유명한 곡이다.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사라진 그 옛날에.
어머니 눈가에는 눈물이 마를 날 없었지.
이제 내 아이들에게 그 멜로디를 가르친다네.
내 소중한 기억을 타고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네.
오래전 어머니가 가르쳐 준 옛 노래를 기억하며, 그 노래를 아이들에게 불러주고 싶던 아버지의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드보르자크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2024-05-0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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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새의 노래', 피스, 피스, 피스!
4월 26일은 역사 속에서 두 개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1986년 오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났고, 1937년엔 스페인의 게르니카 폭격 사건이 일어났다. 오래전 마드리드의 국립소피아왕비예술센터(왕비미술관)에서 ‘게르니카’ 그림을 실제로 보았을 때가 떠오른다. 가로 7미터, 세로 3미터가 넘는 흑백 톤의 그림이 주는 힘은 압도적이었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지 않았다면 1937년 4월 26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당시 쿠데타로 집권한 프랑코 장군은 스페인 내전을 벌여 권력을 잡았다. 1937년 오늘, 프랑코 측과 동맹을 맺은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공화파의 거점 도시 게르니카를 융단폭격했다. 바스크 지방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는 28톤이 넘는 폭탄이 쏟아졌고 무수한 양민이 불바다 속에서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참담한 마음으로 ‘게르니카’를 완성해 파리 세계박람회에 출품했다.
프랑코 독재 정권에 저항한 예술가는 피카소뿐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첼로의 전설’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도 있었다. 게르니카 폭격을 감행한 후 프랑코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였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카잘스는 프랑스 남단의 프라드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음악회를 통해 스페인의 민주화를 호소했다.
카잘스가 앙코르곡으로 가장 사랑한 레퍼토리는 ‘새의 노래(El cant dels ocells)’였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민요를 편곡한 것으로, 우리나라 ‘아리랑’ 같은 정서가 담긴 곡이다. 3분 정도의 짧은 멜로디지만 고국에 대한 사랑과 세상의 평화를 염원한 카잘스의 상징적 노래였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백발의 노인이 된 카잘스는 혼자서만 첼로를 연습할 뿐 무대에는 서지 않았다. 그런데 1971년 10월 UN 회의장에서 연주할 것을 요청받았다. 당시 95세의 카잘스는 연주 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난 40여 년간 공식적인 연주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해야 할 것 같군요. 카탈루냐 민요 ‘새의 노래’를 연주하겠습니다. 카탈루냐 새들은 하늘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피스(peace), 피스(peace), 피스(peace)!’ 그것은 바흐와 베토벤, 모든 위대한 음악가들이 사랑하고 찬미해 온 멜로디입니다. 너무나 아름답지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예술은 ‘게르니카’ 같은 그림을 그려내고, ‘새의 노래’ 같은 음악을 남겨 놓는다. 그것은 어떤 말보다 오래도록 마음을 울린다.
2024-04-2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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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클래식은 커피를 사랑해
“아, 커피 맛은 정말 기가 막히죠. 수천 번의 키스보다 더 달콤하고, 맛 좋은 포도주보다 더 부드럽죠. 커피, 커피, 난 커피를 마셔야 해요. 내게 즐거움을 주려거든, 아! 커피 한잔을 채워 줘요.”
이 곡은 그 유명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만든 ‘커피 칸타타’에 나오는 노래 가사다. 가사나 곡조도 재미있지만 노래 주위를 나비처럼 맴도는 트라베르소 플루트(가로 플루트) 소리가 정말 멋지다. 종교음악의 대가인 바흐가 어쩌다가 이런 곡을 쓰게 되었을까? 그를 위해선 바로크 시대 유럽에 번진 커피 열풍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에티오피아, 예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에 상륙한 커피는 순식간에 유럽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1645년 베네치아에 첫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1652년에는 런던에 첫 커피하우스가 생겼으며, 파리, 함부르크 등 유럽 도시마다 커피가 최고의 트랜드 상품이 되었다. 바흐가 살던 독일의 라이프치히에도 몇 개의 커피하우스가 생겼는데, 그중에서 ‘치머만 커피하우스’는 바흐의 단골 쉼터였다. 이 카페에서 밀린 악보도 필사하고, 아마추어 앙상블 연주회도 가졌다.
그러던 바흐가 매우 이례적으로 세속적인 내용의 음악 한 곡을 완성했다. 원래 제목은 ‘가만히, 떠들지 말고(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이지만 흔히들 ‘커피 칸타타’로 부른다. 커피를 너무나 사랑하는 딸과 이를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려냈다. 이 곡을 들으면 낙천적인 모습의 바흐가 그려진다. 커피잔을 들고서 “그래, 바로 이 맛이야!”라며 행복해하는 바흐 말이다.
어디 바흐뿐이랴,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할 것 없이 모두 커피를 최고의 벗처럼 여겼다. 베토벤은 “매일 아침 나는 최고의 벗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 한잔의 커피에 담긴 60알의 원두는 내게 60개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커피광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커피는 세계인이 사랑하는 최고의 음료수였고, 한국 역시 커피 소비량에선 빠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최근 발견된 사료에 의하면 커피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 1884년 부산의 해관(지금의 세관)에 근무하던 민건호가 쓴 〈해은일록〉에 나와 있다. 다음 달 초 벡스코에선 부산시와 SCA(스페셜티 커피 협회) 공동 주최로 ‘월드 오브 커피&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 부산’을 연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부산이 ‘한국 커피의 자존심’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바흐마저 음악으로 남겼듯, 커피는 그 자체로 역사이자 예술이다. 부산의 커피 문화가 산업적인 차원을 넘어 다양한 예술과 접목되기를 바란다.
2024-04-1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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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카르미나 부라나', 운명을 통과하는 인간의 노래
“오 운명이여, 그대의 변덕스러움이 달과 같구나. 언제나처럼 차올랐다가 또 이지러지는구나. 잔혹한 인생, 제 마음대로 괴롭히다가 어루만져 주네. 가난도 권력도 모두 얼음처럼 녹여 버리네…”
1895년 태어나 1982년 3월 29일 세상을 떠난 작곡가 칼 오르프의 명곡 ‘카르미나 부라나’. 그 첫 곡인 ‘오 운명이여’는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부터 한국의 드라마와 CF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곡이다. 팀파니를 동반한 합창의 강력한 힘이 듣는 사람을 단박에 휘어잡는다.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칼 오르프는 5세부터 첼로, 피아노, 오르간을 배웠고, 11세에 가곡을 작곡한 천재였다. 뮌헨음악원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한 후 만하임, 다름슈타트 등지에서 악장을 역임했다. 바로크 작곡가들의 작품을 편곡하기도 하고, 현대적인 곡도 꽤 썼지만, 1937년 ‘카르미나 부라나’를 발표하면서 이전의 작품을 모두 잊게 했다. 그만큼 결정적인 히트작이었다.
‘카르미나 부라나’는 ‘보이렌의 노래’라는 뜻이다. 1803년 독일 뮌헨 부근에 있는 보이렌 수도원에서 발견된 시가집에는 11~13세기에 활동하던 익명의 유랑 악사와 음유시인이 남긴 세속 라틴어 시가 250여 곡 들어 있었다. 오르프는 그중에서 24곡을 추려 3부의 세속 칸타타를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첫 곡 ‘오, 운명이여’는 서곡에 해당하는 노래다. 고대와 중세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인용해서 운명의 변덕스러움과 가혹함을 얘기한다. 단순한 화음과 고전적인 멜로디를 사용했지만, 합창과 타악기가 원시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만든다. 강렬하고 복잡한 리듬도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곡들은 세상을 한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속을 살아가는 방법을 노래한다. 1부 ‘봄에’는 봄날의 정취와 사랑의 감정을 담았고, 2부 ‘선술집에서’는 교회와 성직자까지 마음대로 풍자하며, 3부 ‘사랑의 뜰’에선 세상의 마지막 위안을 사랑으로 치환한다. 운명이 준 상처에 탄식하던 영혼은 마지막 24번째 곡을 이렇게 맺는다. "만세, 세상의 빛이여. 만세, 세상의 장미여. 고결한 사랑의 여신이여."
운명은 강력하고 세상은 지리멸렬하다. 그러나 우리에겐 시대를 한탄할 자유가 있고, 술을 마시며 같이 떠들 친구가 있고, 봄과 사랑을 노래할 심장이 있다. 이로써 운명에 대항하리라! 거의 1000년 전의 사람들도 그렇게 삶을 통과해 나갔음을 ‘카르미나 부라나’가 알려 준다.
2024-03-2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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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현대 음악계를 이끄는 여성 작곡가들?
영국의 온라인 예술잡지 〈바흐트랙〉(Bachtrack)은 매년 내놓는 음악계 동향 보고서로 유명하다. 비록 영국과 미국에 치우친 경향은 있지만, 올해도 2023년 열린 공연 3만 1309개를 조사해서 가장 인기 있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가장 많이 연주된 작품 등 다양한 통계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에서 눈에 띄는 점은 현대음악 레퍼토리와 여성 작곡가 인기가 급상승했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2013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현대음악 공연이 약 6%에서 14%로 증가했다. 영국에선 6%에서 15%로, 미국에서는 7.5%에서 무려 20%로 증가했다. 여전히 고전-낭만주의 레퍼토리에 치우치고 있는 우리나라 클래식 무대와는 무척 대조적이다.
‘가장 많이 연주되는 작곡가 200명’을 집계했을 때, 2013년에는 여성 작곡가가 단 2명밖에 없었는데, 2013년엔 22명으로 늘어났다. ‘살아 있는 인기 작곡가 톱 텐(Top 10)’ 리스트에서도 여성 작곡가가 4명이나 들어 있다. 러시아의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미국의 캐롤라인 쇼, 영국의 안나 클라인, 그리고 자랑스럽게도 한국의 진은숙이 포함돼 있다.
한국에서도 여성 음악가의 몫이 커지기를 바라며, 오늘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작곡가 릴리 불랑제(Lili Boulanger, 1893~1918)의 곡을 들어본다. 나디아 불랑제와 동생 릴리 불랑제는 20세기 최고의 여성 작곡가였다. 언니 나디아 불랑제는 파리음악원 작곡가 교수로 있으면서 피아졸라, 거슈윈, 코플랜드 등을 가르쳤다. 영국 로열 필하모닉과 보스턴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최초의 여성 지휘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디아는 항상 “동생의 작품에 비하면 내가 쓴 것은 하찮은 정도”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동생인 릴리는 1913년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로마대상’에서 여성 최초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릴리는 어릴 때 폐렴을 겪은 후로 항상 몸이 약했다. 나중엔 병상에 누워 언니에게 음을 불러주면서 작곡했다고 한다. 그녀는 1918년 불과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보다도 10년이나 어린 나이였다. 릴리 불랑제는 워낙 이른 나이에 죽었기에 50여 곡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오늘 듣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녹턴’ 같은 곡만 들어봐도 “아, 천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나이 18세 때 만든 곡으로, 봄날의 꽃처럼 애잔하게 남아 있다.
2024-03-14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