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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일기] 고베항·미나토미라이엔 있고 북항엔 없는 세 가지
지난 6월 일본 고베항을 방문했다. 일본 대표 무역항인 고베항은 1995년 한신 대지진 이후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에 들어갔다. 고베항 일부는 ‘메리켄 파크’라는 이름의 친수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이곳 랜드마크인 고베타워나 고베해양박물관을 뒤로 하고, 정작 눈에 띈 건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스타벅스다. 공원 한가운데 명당을 차지한 글로벌 커피 체인점은 더위에 쫓긴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같은 시기 찾았던 요코하마도 관광객 편의를 극대화한 상업 시설이 돋보였다.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21’에는 무역 화물 창고로 쓰였던 ‘아카렌가’가 있다. 붉은 벽돌로 된 옛 외관을 유지한 덕에 요코하마항의 역사성과 정체성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1층부터 3층까지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 스튜디오 등 집객 시설로 가득했다. 항만이라는 정체성을 지킨 동시에 관광지로서 본질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산일보〉 취재진은 올해 국립부경대 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단과 공동취재단을 구성해 일본과 대만, 싱가포르를 잇달아 방문했다. 국내 첫 항만 재개발 사업인 부산항 북항이 엑스포 유치 불발 이후 좀처럼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해외 선진 항만 재개발지를 방문하고 북항에 적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취지였다.
사전 조사 때만 해도 각 지역의 ‘랜드마크’에 집중했다. 고베항의 고베타워, 대만 가오슝항의 수평 회전 다리, 싱가포르의 머라이언 동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더 크게 체감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성공한 항만 재개발지 모두 놀거리, 먹거리, 볼거리라는 세 가지 요소에 충실했다. 어느 항만 재개발지이든 관광객들은 저마다 아이스크림이나 간식을 손에 들고 바다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관람차, 크루즈를 즐기려는 이들로 티켓 판매처 앞은 늘 혼잡했다.
반면 오는 11월이면 개장 1주년을 맞는 북항 친수공원은 어떤가. 올 3월 북항 친수공원에 방문했을 때 ‘휑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출출한 배를 달랠 곳도, 재미난 경험도 찾지 못한 탓이다. 부산항축제나 스탠드업 패들보드(SUP) 대회 등 단기 축제는 흥행했지만 상시 콘텐츠는 사실상 전무하다. 부산항축제 때 큰 호응을 얻었던 보트 체험이나 푸드 트럭 등 놀거리, 먹거리, 볼거리를 갖춰야 한다. 여기에 북항만의 역사와 정체성을 입히는 것도 중요하다.
역사성과 상업성을 균형 있게 조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본과 대만, 싱가포르는 민관 협력 형태의 콘텐츠 전담 기구에서 답을 찾았다. 규모가 큰 인프라 구축은 공공이 주도하는 게 맞지만, 한정된 예산 내에서 창의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운영하려면 민간의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현지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부산항만공사는 내년 4월까지 북항 재개발 활성화 방안을 찾기 위한 용역을 진행한다. 해양수산부와 부산시도 착수 단계부터 머리를 맞댄다. 이 자리에서 북항 친수공원에 매력적인 콘텐츠를 채울 수 있는 민관 협력 기구의 형태를 구체화해야 한다. 일본 고베시는 시와 상공회의소, 그리고 지역 7개 민간 기업이 공동 출자하는 ‘제3부문’ 방식을 활용했다. 지자체가 가진 재정적 한계 안에서 민간의 창의성을 펼칠 수 있는 좋은 모델로 판단된다. 일본은 우리와 행정 체계가 유사한 만큼 적용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공공과 민간,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해야만 북항을 ‘글로벌 핫플레이스’로 도약시킬 수 있다.
2024-09-2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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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장 사람들의 유산 [기자일기]
야간부녀반장 박미경 씨는 ‘대가리’만 보고도 고등어를 7단계로 선별하는 30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평소엔 차분한 목소리로 커피와 함께 기자를 맞이하지만 현장에서는 180도 변했다. 작업자들이 일을 소홀히 하거나, 선사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판단될 땐 눈꼬리를 올린 채 거친 목소리도 냈다. “어시장은 저를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했고, 활력도 줬고,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죠” 인터뷰 막바지, 그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다. ‘어시장은 삶의 전부’라는 그의 표현이 전혀 과장되게 들리지 않았다.
20년 경력의 양배반장 임종훈 씨는 어시장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빠꼼이’였다. 그의 설명 덕에 어시장의 퍼즐들이 하나둘 맞춰졌다. 그는 위판장 구역별 면적과 물량, 어종을 고려해 최적의 크기로 생선 상자를 배열하는 달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 씨는 한사코 자기를 찍지 말라고 부탁했다. “못 배워서 힘든 일 한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아직 제 자식도 일하는 곳에 안 데려왔어요.”
현대화 사업을 앞둔 부산공동어시장의 역사와 사람들을 기록한 ‘피시랩소디: 바다와 식탁 사이’가 8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지금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어시장 사람들의 노하우와 가치를 사라지기 전에 담고 싶었다. 이들에게 일은 ‘밥벌이’ 이상의 의미였다. 선사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야간부녀반과 양배반도 자신들의 작업 기준을 벗어난 요구까지 받아들이진 않는다. 전국 최대 수산물 위판장에서 자신들이 거래와 유통의 시발점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쌓은 신뢰는 연간 3000억 원에 달하는 수산물을 어시장에 모으는 자산이 됐다. 부산이 얻은 ‘수산도시’라는 명성도, 그 명성에 걸맞은 어시장을 갖추기 위해 추진되는 현대화 사업도 결국 이들이 남긴 유산이다. 합당한 존중과 헌사가 따라야 하는 이유다. 몇 년 뒤 어시장에 들어설 최신식 건물 한쪽에 이들의 흔적이 담긴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들이 흘린 땀의 기억, 어시장이 품었던 그 비린내가 잊히지 않길 바란다.
2024-08-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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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일기] '월드 오브 커피 부산'이 남긴 것
부산은 ‘커피도시’다. 지난 1~4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2024 월드 오브 커피&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 부산’을 취재하며 더욱 확신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전 세계 72개국 281개사가 참가했다. 해외 바이어 5123명, 국내외 바이어를 합치면 1만 5844명이 찾았고,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세계 최대 커피산업 전문 전시회가 부산에서 열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산 커피산업 종사자는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부산을 잘 몰랐던 전 세계 커피산업 종사자는 부산 어디에서나 훌륭한 커피를 즐길 수 있고 커피와 문화, 관광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놀라워했다.
전 세계에서 ‘커피도시’라고 불리는 곳은 한 가지 측면만 발달한 경우가 많다.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리 카페 문화가 발달한 호주 멜버른, 생두 유통이 세계 최대 규모인 벨기에 앤트워프, 커피 생산량이 세계 최대인 브라질이 그렇다. 하지만 부산은 커피 생산을 제외한 모든 과정이 발달한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일한 커피도시다.
부산이 왜 커피도시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카페가 많다고 커피도시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이 날아온다. 그때마다 부산이 갖춘 천혜의 조건을 알려준다.
익히 잘 알려져 있듯 한국에서 유통되는 생두의 90% 이상이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다. 부산항은 한국의 커피 허브다. 부산이 커피를 가장 빠르게 접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는 역사 기록도 있다. 부산해관(현 부산세관) 감리서 서기관이었던 민건호가 남긴 일기 〈해은일록〉의 1884년 기록은 지금까지 발견된 한국인 최초의 커피 음용 기록이다.
‘월드 오브 커피&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 유치에 뜻을 모은 부산 커피인의 열정도 빼놓을 수 없다. 부산시와 전시회를 공동 주최한 스페셜티 커피협회(SCA) 관계자는 “커피도시로 마케팅하려는 지자체가 많아졌다”며 “하지만 부산만큼 커피도시라고 부를만한 조건을 갖춘 곳도 없고 커피대회나 행사를 개최하면 부산 커피인들은 자신의 이익보다 부산을 커피도시로 만들어 나가자는 열망 하나만으로 힘을 합친다”고 설명했다.
2021년 ‘부산은 커피도시다’로 처음 커피산업 취재를 시작했을 때도 부산 커피인들의 열정과 이타심에 영향을 받았다. 지금까지 부산의 커피산업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이유다.
이번 전시회는 타 업계 종사자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시 컨벤션 기획 기업인 마이스부산 강석호 대표는 “부산에서 국제적인 수준의 부스를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며 “관이 주도하는 행사 운영이나 유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앞으로도 민관이 협력해 부산 산업과 잘 맞는 국제행사를 기획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부산은 누가 뭐라 해도 커피도시다.
2024-05-0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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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일기] '공교육 첨병'이 '문제 매매꾼' 된 세상
11일 감사원이 공개한 현직 교원과 사교육 업체의 ‘문제 거래’ 실태(부산일보 3월 12일 자 11면 보도)는 무너져가는 한국 공교육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매년 수십조 원이 흘러드는 사교육 시장의 물줄기가 허술해진 공교육의 둑을 무너뜨렸다. 공교육 영역에서 보호돼야 할, 공정해야 할 시험 문항이 사교육 시장에 팔려나간 것은 이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됐다.
감사원이 밝힌 교사와 사교육 업체의 문항 거래는 심각했다. 한 현직 고교 교사는 수능·수능 모의평가 검토위원 경력을 내세워 사교육 업체에 모의고사 문항 수천 개를 넘겼다. 해당 교사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교원 8명을 포섭해 문항 공급조직도 만들었다. 그 대가는 6억 6000만 원이었다.
사교육 업체와의 뒷거래 사실을 숨긴 교사도 있었다. 한 교사는 학원 강사에게 고난도 문제를 넘기고 수억 원을 챙겼다. 해당 교사는 수능 모의평가 출제위원으로 뽑히자, 사교육 업체와의 뒷거래 사실을 숨겼다. 또 다른 교사는 배우자가 운영하는 출판사에 자신이 만든 수능 모의고사 문제를 넘겨 수억 원을 벌어들였다.
‘공교육의 첨병’이어야 할 이들 교사들은 ‘문제 매매꾼’이 됐다. 이들은 자신의 역할은 내려놓은 채 돈이 넘쳐나는 사교육 시장을 선택했다. 그 선택 과정에 자신의 존재 이유인 학생은 안중에 없었다. 학생들은 그들이 탐욕 속에 사교육 시장에 풀어 놓은 문제를 얻으러 사교육 시장에 또 한 번 내몰렸다.
분명 이번 사건은 일부 교사들의 불법적인 일탈이다. 하지만 교육계에 던진 파장은 적지 않다. 공교육 붕괴의 전조일 수 있다. 대다수의 교사들은 이들의 엇나간 결정에 개탄한다. 한 현직 고교 교장은 “소문으로 떠돌던 것이 사실이 돼 비참하다”고 했다. 한 현직 교사는 “학생들의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질까 두렵다”고 털어놨다. 이들은 사교육에 점령 당한 공교육의 현실에 안타까워했다.
교육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입시 비리에 가담한 교원의 징계 시효를 늘리기로 했다. 징계 수위도 강화한다. 이는 근본 대책이 아니다. 학생들이 사교육 시장에 내몰린 공교육의 현실은 물론 그 틈바구니에서 기득권 세력이 된 교사의 현실을 짚어야 한다. 교육부와 교사들은 공교육이 왜 존재하는지, 공교육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학생을 중심에 두고 찬찬히 되짚어야 한다. 제대로 된 진단 없이 ‘공교육을 지키겠다’는 구호는 공염불일 뿐이다.
2024-03-12 [18:24]